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원군 (문단 편집) == 사후 추존 == [[인조|능양군]]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조선 제16대 왕 인조가 되자 정원'''군'''(君)에서 정원'''대원군'''(大院君)으로 격상된다. 공식적으로는 [[선조(조선)|선조]]의 뒤를 이은 [[인조]]였지만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소성대비]]에게 후계자로 추인을 받았고 민생 파탄내고 사대부 사이에서 패륜아[* 계모인 [[인목왕후]]를 [[덕수궁|서궐]]([[덕수궁 석어당|경운궁 석어당]])에 유폐하고, [[조선/왕사|왕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동복형 [[임해군]]은 '''[[사약]]을 먹이고''' 이복동생 [[영창대군]]은 '''초가집 가마불로 증살하는 방법으로 쪄죽였다'''(단, 임해군은 막장행동으로 더이상 쉴드가 불가능한 수준까지의 인성이었고, 영창대군이 쪄죽은게 확실하지 않은게 기록마다 영창대군이 죽은 이유가 다르다). 특히 임해군은 반대파 [[서인]] 세력마저도 죽이자고 모두 찬성했고, [[조선/왕사|임금]]이 동생이나 종친을 죽이는 건 당시 왕정 시대에 큰 문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손위 대비를 (공식적으로 폐위는 아니지만) 폄손절목이라는 형식으로 [[후궁]] 급으로 대우를 낮추고 감금한 건 당시 [[성리학|유교]] 윤리로써는 심각한 패륜 행위였다. [[조선/왕실|왕실]]은 사대부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아무리 계모라 하더라도 [[광해군|아들]]이 [[인목왕후|어머니]]를 박해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심각한 불효였기 때문이다.]로 찍힌 [[광해군]]을 쫓아낸 것 자체는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인조의 [[조선/왕사|정통성]]은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반란은 있었어도 [[광해군]]을 다시 추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장 큰 위기였던 [[이괄의 난]]도 어디까지나 [[이괄]] 책임이었고, 광해군을 핑계 삼아 광해군을 '''상왕으로 모시고''' 다른 이를 광해군에게 양위를 받아 [[조선/왕사|왕]]으로 옹립하려 했지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하진 않았다.] 그러나 인조는 좀 더 나아가 자신의 생부 정원군을 추숭해서 [[조선/왕사|정통성]]을 더 강화하려고 하는데, 흔히 이것을 '원종 추숭 논쟁'(元宗追崇論爭)이라 부른다. [[인조]], [[이귀]], [[최명길(조선)|최명길]] 등 외에는 거의 모든 신하가 "전교를 거두어 달라"라며 크게 반대했지만 결국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 관철시킨다. 당시 집권 [[서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정원군은 [[세자|왕세자]]인 적이 없기 때문에 [[조선/왕사|왕]]으로 [[추존]]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인조는 '''정원군도 [[선조(조선)|선조]]의 아들이었으니 가능하다'''는 논리로 밀어붙였다. 이러한 [[인조]]의 주장에 당시 사대부들은 '''"[[선조(조선)|대통]](大統)과 [[정원군|소통]](小統)도 구분 못 한다"'''고 인조를 깠다. 당시 [[조선]]에서는 혈연보다 '[[조선/왕사|종통]](宗統)을 누구에게 이어받았느냐'가 중요한데[* 비슷하게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생부는 [[흥선대원군]]이지만 [[효명세자|익종(문조)]]의 [[조선/왕사|후사]]로 입적되었기 때문에 법적 아버지는 [[효명세자]]다. [[정조(조선)|정조]]도 진종([[효장세자]])의 양자로 들어가서 "근본이 둘일 수 없다"는 논리 때문에, 더 정확히는 [[영조]]가 생전에 네 법적 아버지는 효장세자라고 못을 박고 엄명을 남겼기 때문에, 당대에는 친부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못했다.] [[유교]] 종법상 '''후임자는 전임자의 아들로서 물려받는다고 여겨졌으므로 [[광해군]]은 [[폐위|흑역사]] 처리되고 [[선조(조선)|선조]]에서 [[인조]]로 직통으로 물려받았다는 것이었다.''' 사대부로 치면 가문을 물려받는 것이고 [[조선/왕실|왕실]]은 [[종묘]]와 [[사직]]을 물려받는 사람을 아들로 치는데, 인조는 선조의 혈연상으론 손자지만 종법상으론 아들이란 것이다. 어쨌든 인조는 '''자신만의 논리를 위해''' [[이귀]], [[최명길(조선)|최명길]] 등 찬성한 소수의 대신들을 요직에 등용하여 거의 어거지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생전에 [[왕세자|세자]]였던 적도 없는 듣보잡, [[후궁]] 소생 출신 [[왕자]]가 [[조선/왕사|왕]]에 추증된 사례는 이것이 '''유일하다'''.[* 조선의 추존왕은 총 9명이다. 그 중 태조의 4대조인 [[목조(조선)|목조]], [[익조(조선)|익조]], [[도조(조선)|도조]], [[환조(조선)|환조]]는 [[조선왕조|왕조]] [[태조(조선)|창건자]] 직계조상의 [[추존]]이라는 확실한 명분이 있다. 그리고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는 생전에 [[세조(조선)|세조]]의 [[적장자]]로 확실한 [[조선/왕사|정통성]]을 지녔고, 진종으로 추존된 [[효장세자]]도 서자라는 점만 빼면 마찬가지였다. 장종/장조 등으로 추존된 [[사도세자]]도 [[왕세자|세자]]로 활동한 기간이 분명히 있다. 마지막으로 익종으로 추존된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도 3년간 세자 특히 [[대리청정]]까지 하였다. [[태조(조선)|태조]]의 4대조를 제외한 추존왕 5명 중 중 서자 출신은 있었으나([[효장세자]], [[사도세자]]) 정원군만 유일하게 세자로 활동한 기간이 전혀 없다.] [[조선]]이 '명분'과 '정통성'을 중시한 [[성리학]]의 나라였기에 이런 절차가 없으면 권력 기반도 흔들렸던 사회였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이해해 줄 필요가 있겠지만, 이미 [[인조반정|반정]]은 사대부들의 지지와 [[인목왕후]]의 추인, [[명나라]] 책봉까지 받아서 [[조선/왕사|정통성]] 면에서는 문제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 시기가 명 청 교체기로 [[병자호란]]을 앞두고 바쁘게 돌아가던 시대임을 생각하면 쓸데 없는 짓으로 비칠 수도 있다. 실제로 [[인조]]는 대외 문제보다 이 문제를 훨씬 중시했고 이때 총애를 받던 [[김류]]가 세력을 잃고 [[이귀]]와 [[최명길(조선)|최명길]]이 전면에 나서게 되나, 이귀는 얼마 가지 못해 죽고 대신 그 아들 [[이시백]]이 총애를 받았다. 결국 선조 - 정원군 - 인조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왕으로 격상되어 [[추존]]왕으로서 '''원종대왕(元宗大王)'''이라는 [[묘호]]를 받았고 아내와 함께 결국 [[종묘]] 영녕전에 모셔지게 된다. 그리고 아내 연주군부인 구씨 또한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로 추존되었다. 결국 문제는 '''서자라서 추존한 게 그른 것이 아니고, [[왕세자|세자]] 자리에 한시도 있던 적이 없던 것이 문제'''였다.[* [[태조(조선)|이성계]]의 조상들을 제외하면 [[조선]]에서 유일하게 세자에 오른 적이 없었던 [[추존]]왕이다. 게다가 이성계의 직계조상들도 비록 원나라 벼슬이기는 하지만 대대로 세습을 받아서 가문을 승계한 우두머리들이다.] [[성종(조선)|성종]]이 자기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德宗)으로 추존한 것은 자신의 [[조선/왕사|정통성]] 제고를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일단 덕종은 [[세조(조선)|세조]]의 [[왕세자|세자]]였기 때문에 충분히 정당성이 있었다. 애초에 세자의 지위는 다른 왕자와 격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다른 왕자는 [[대군]]이라 하더라도 사적인 [[조선/왕사|국왕]]의 혈육에 불과하지만 세자는 책봉 받은 이상 신하들과 백성들에겐 '''두 번째 임금'''[* 왕과 세자는 군신 관계이자 부자 관계이다. 그러나 세자와 다른 이의 관계는 군신 관계다. 옷부터 다른 왕자나 가까운 종친들은 대신들과 같은 자색(보라색) 관복을 입는데, [[왕세자|세자]]는 아청색 '''[[곤룡포]]'''를 입는다. 또한 [[대리청정]]할 때 한정이지만 왕과 세자를 '대조(大朝)' '소조(小朝)'로 '''병칭'''하기도 한다.]이다. 다른 형제 종친 및 손위 항렬이라도 세자와 '군신 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에 그의 후손이 왕이 되면 [[추존]]하는 것이다. 생전에 세자와 부자 관계이며 군신 관계인 세손이 [[조선/왕사|임금]]이 되면 임금의 아버지[* [[유교]]에선 부자 관계가 군신 관계보다 중하다. [[송나라|송]] [[고종(송)|고종]]이 [[금나라|금]] [[황제]]를 큰 아버지로 불렀지만 그게 부자 관계보다 나은데, 부자 관계가 되면 죽으라고 하면 진짜 죽어야 한다.]인 [[왕세자|세자]]가, 아들도 [[조선/왕사|임금]]인데 아버지가 고작 [[왕세자|세자]]에 머물러야겠냐 해서 하는 것이 [[추존]]이다.[* 당연히 종법상 아버지만 추존되고 생부라고 추존되는 게 아니다. [[정조(조선)|정조]]가 [[사도세자]] 대신 [[효장세자]]를 [[추존]]한 것은 사도세자 대신 [[영조]]가 효장세자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시킨 종법 질서 때문이다.] 따라서 왕의 혈육이라고 해서 아무나 퍼주는 것이 아니다. 그나마 정원군의 '[[추존|추숭]](追崇)'을 주장하는 신료들의 주장 중 명분이 있었던 것은 [[선조(조선)|선조]]와 [[인조]]로 이어지는 대통에서 아버지 대(代)의 [[항렬]]이 비게 된다는 점이었다. [[조선/왕사|조선 왕조]]에서 [[추존|추숭]]된 9명의 추존왕을 빼고 보면 딱 한 항렬에서만 실제 임금이 배출되지 않았는데 [[영조]]와 [[정조(조선)|정조]] 사이의 대(代)에서 였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정조가 [[사도세자]]가 죽고 영조의 장자 [[효장세자]]에 입적되고 등극 후 영조의 장자였던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면서 해결되었고, 먼 훗날의 이야기지만 [[고종(대한제국)|고종]] 때 당시 의리보다 인정상 정조의 친부인 사도세자도 장조의황제로 ([[황제]])추존되어 같은 항렬에서 2명의 추존 왕이 나왔다. [[순조]]와 [[헌종(조선)|헌종]] 사이에도 조-손 관계로 대통이 이어져 추숭 왕인 [[효명세자|익종]]만 있었으나 헌종이 급사하고 아저씨 뻘인 [[철종(조선)|철종]]이 즉위해 해당 항렬에 실제 [[조선/왕사|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처럼 항렬을 비우지 않고 [[조선/왕사|왕통]]을 잇는 것은 나름 정통성 확보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었고 [[선조(조선)|선조]]에서 [[인조]] 사이에는 실제로 즉위했던 [[광해군]]이 있었으나 [[폐위]] 되었으므로 해당 항렬에는 [[시호]]를 받은 왕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선조의 아들들 중 [[임해군]],[*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승려]]가 되어 출가했기 때문에 후손은 없을 듯하다.([[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77678|임해군 아들 일연 스님에 관한 기사]])] [[광해군]],[* [[폐세자 이지|세자]]가 있었으나 [[인조반정|반정]] 후 유배갔고 그 후 땅굴을 파고 도망치려다가 발각되어 [[자살|자결]]을 명받아 죽었다.] [[의안군]], [[신성군]] 등이 후손을 남기지 못한 상황에서 후손을 남긴 왕자들 중에서는 정원군이 가장 맏이[* [[선조(조선)|선조]]가 당시 살아있을때 유일하게 먼저 정원군의 자식(선조한테는 손자)을 보았기에 정원군의 자식이었던 [[인조|능양군 인조]]는 할아버지 [[선조(조선)|선조]]한테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래서 인조의 이름과 자(아호)를 직접 지어주는 등 애지중지했다.]였다. 요약해 보면 아버지 항렬이 [[종묘]]에서 비게 된다는 것과 [[선조(조선)|선조]]의 후손들의 실질적인 맏이라는 점이 그나마 추숭의 명분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은 이어졌고, 특히 [[장유(조선)|장유]](張維)[* [[인조]]의 차남인 [[봉림대군|효종]]의 [[장인어른|장인]]이다. 즉 인조에게는 [[사돈]].]는 《전례문답(典禮問答)》을 지어 반박하였는데, [[노희공]]이 형으로서 [[노민공|민공]]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동생인 민공을 고위로 삼았던 《춘추(春秋)》의 기록을 증거로 주장하였다. 한 마디로 앞 사람 이어서 바톤 터치 하면 그만이라는 소리. 결국 '[[선조(조선)|대통]]'(大統)을 중히 여기는게 당시 중론이었던 것이다. 단, 이 경우도 형제 계승이라서 아버지 [[항렬]]이 비는건 아니며, 이전에 옆집 [[명나라]] [[가정제]] 즉위시에는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갈 여지가 있었으나 아버지를 [[황제]]를 [[추존]]한 사례가 있어서,[* 다만 이 경우도 엄청난 반발과 논쟁, 대규모 사직 사태 끝에 [[추존]]이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는 [[황실]]의 안정을 중시하는 보수파 관료들은 [[가정제]]가 큰아버지 [[홍치제]]를 양부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를 내키지 않아한 가정제가 부모를 바꾸어서는 안 되며 본인이 [[황제]]이니 아버지인 [[주우원]]도 역시 황제여야 한다며 [[추존]]을 강하게 밀어붙인 것. 자세한 내용은 [[가정제]] 문서 참고.] 아버지 [[항렬]]이 아예 없는 [[인조]]의 경우는 명분이 조금 더 있었다. 전대인 [[선조(조선)|선조]], 후대의 [[철종(조선)|철종]]과 [[고종(대한제국)|고종]]도 각각 자신의 아버지였던 [[덕흥대원군]], [[전계대원군]]과 [[흥선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이 세워질 때 흥선대원군이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왕국 체제에서의 왕은 그 위에 무엇도 없는 가장 높은 지위이지만, [[황제]]국 체제에서의 왕은 제후([[왕작]])이라서 개념이 다르다. 단적으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친형 이재면 또한 [[흥친왕]]이 되었고, 고종의 아들들 역시 군이 아니라 [[영친왕]], [[의친왕]] 등 [[친왕]]의 작위 등으로 불리게 된다. 그러다가 [[경술국치]] 이후에는 [[대한제국/황실|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추락하면서 공이 되는 것이고.] 이는 당연히 법적인 아버지가 생부보다 우선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조선 시대]]에는 큰아버지 가문으로 입적되면 생부를 삼촌으로 불러야 했으며, 다른 먼 친척의 [[양자(가족)|양자]]가 되어도 그에 따른 호칭으로 불러야 했다. 사대부의 대표격인 [[조선/왕실|왕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인조]]는 유독 이 문제에 혼자 집착해 열을 올렸다. 이는 앞서 나온 대로 [[선조(조선)|선조]]와 [[인조]]로 이어지는 대통에서 아버지 대(代)의 [[항렬]]이 비게 된다는 점 때문인데, 쉽게 말하자면 정원군의 추존 없이는 인조는 역대 조선 임금 중 '''유일하게 왕의 아들이 아닌 자'''가 되기 때문이었다.[* 건국왕이자 조상 4대를 추숭한 [[태조(조선)|태조]] 이성계를 빼놓고 보아도, 당시 시점에서 [[정종(조선)|공정왕]], [[태종(조선)|태종]], [[세종(조선)|세종]], [[문종(조선)|문종]], [[단종(조선)|노산군]], [[세조(조선)|세조]], [[예종(조선)|예종]], [[연산군]], [[중종(조선)|중종]], [[인종(조선)|인종]], [[명종(조선)|명종]], [[광해군]]은 국왕의 친아들이었고, [[선조(조선)|선조]]는 [[명종(조선)|명종]]의 양자였으며, [[성종(조선)|성종]]은 추존왕인 [[의경세자|덕종]]의 아들이었다. 후대까지 보아도 [[효종(조선)|효종]], [[현종(조선)|현종]], [[숙종(조선)|숙종]], [[경종(조선)|경종]], [[영조]], [[순조]], [[순종(대한제국)|순종]]은 국왕의 친아들이었고, [[정조(조선)|정조]]와 [[고종(대한제국)|고종]]은 각각 추존왕인 [[효장세자|진종]]와 [[효명세자|익종]]의 양자, [[헌종(조선)|헌종]]은 추존왕인 [[효명세자|익종]]의 아들, [[철종(조선)|철종]]은 [[순조]]의 양자였다.] 이 때문에 정원군은 방계 종친이자 [[인빈 김씨|후궁]] 소생의 서자로서 [[조선]]의 [[조선/왕사|왕]]으로 유일하게 [[추존|추숭]]된 인물이 되었다. [[병자호란|호란]][[삼전도의 굴욕|으로 떨어진]] 권위를 어떻게든 끌어올리기 위해서로 보인다는 견해가 있으나, [[병자호란]](1636) 당시에는 이미 추존이 끝나 있었으므로 선후가 맞지 않는다.[* [[정묘호란]](1627)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시기상 맞지 않다. 그 이전인 [[1623년]](인조 즉위년)부터 이미 이미 친부모에 대한 호칭 문제가 불거져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인조 본인이 [[조선/왕사|계승]] 방식이 아니라 [[인조반정|쿠데타]]로 [[조선/왕사|왕위]]를 빼앗았다는 점 때문에 정통성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 자격지심 되어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조]]의 이런 행위는 이후 [[소현세자]] 죽음 문제까지 겹치면서 더더욱 [[조선/왕사|정통성]] 논란이 생겼다. 이로 인해 손자 [[현종(조선)|현종]]때 터진 사건이 바로 '''[[예송논쟁]]'''이다. [[조선/왕사|왕]]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덕흥대원군]]과 달리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조성 당시에는 [[경기도]] 김포군 고현내면 당곡리]에 있는 이 사람 무덤은 어엿한 '능(陵)'으로 명칭은 [[장릉(김포)|장릉(章陵)]]이다. [[장릉 검단신도시 아파트 불법건축 논란]]이 발생한 그 장릉 지역 맞다. 참고로 아들 [[인조]]의 무덤도 똑같이 '[[장릉(파주)|장릉(長陵)]]'으로 불리며, 다른 장릉으로는 [[강원도]] [[영월군]]에 소재한 [[단종(조선)|단종]]의 능인 [[장릉(영월)|장릉(莊陵)]]이 있다. 물론 잘 알려진 곳은 단종의 능. 이전에는 흥경원(興慶園)으로 불렸는데, 원래 그 자리는 부인 [[인헌왕후|연주군부인 구씨]]의 원인 육경원(毓慶園)이 조성되어 있었다. 조성 초기에는 [[경기도]] [[남양주시|양주군]] [[금곡동(남양주)|금촌면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남양주)|금곡동]])에 있다가 육경원으로 천장, 앞에서 서술한 이름으로 바꾸고 [[추존]]과 동시에 지금의 이름으로 하고 [[조선왕릉|왕릉]] 제도에 맞게 '능(陵)'의 형식에 정식으로 새로 조성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