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이형 (문단 편집) === 19년간의 옥고 === 정이형은 신의주에서 열린 제1회 공판에서 경어를 사용할 것을 요구했고 고려혁명당에 대한 신문에는 완전히 침묵했으며, 말을 못하게 하는 재판에는 대답하지 않겠다며 공술을 거절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태도를 재판 내내 지속했고, 제3회 공판에서는 "나는 절대로 공술하지 않을 터이오. 당신네 임의로 처리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그리고 다른 피고들은 속히 판결을 지으시오."라 말하기까지 했다. 이에 재판장이 변호사 최창조에게 의뢰해 정이형에게 공술을 하도록 권유했지만, 정이형은 단호히 거부했다. >우리같은 약한 사람은 불온하다고 삭제로 하라지요. 최선생의 말씀은 고맙습니다만은. 그 후 정이형은 제4회 공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 <조선일보> 1928년 3월 11일자 기사에 따르면, 정이형은 검사가 자신에게 사형을 구형하는 것을 보고 빙그레 웃을 뿐 조금도 공포의 기색이 없이 태연자약하게 서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언도 공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했다가 복심의 개최가 지연되자 동지 이동락, 방찬문, 이원주, 유공삼 등과 함께 공소를 취하하고 평양형무소에서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정이형은 [[8.15 해방]]이 도래할 때까지 19년간 평양 형무소와 대전 형무소에서 옥중 생활을 하면서 몸가짐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모범 생활을 해서 타 죄수들로부터 '15번 어른' 혹은 '15번 양반'[* 정이형의 죄수 번호가 1515번이었기 때문이다.]으로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그의 처남 강영채의 증언에 따르면,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그의 집을 침입한 강도가 그의 정체를 알고 난 뒤 "15번 양반이군요. 안들어올 곳을 들어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라며 돌아갔다고 한다. 정이형은 옥중 생활에서 많은 독서를 했다. 그는 베이징에 있는 아들을 통해 많은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특히 <25사>라는 중국역사책은 감방에 항상 비치해 놓고 읽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일본은 반드시 망할 것이며, 해방이 되면 좌, 우가 틀림없이 싸울 테니 이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여기고 공산주의자와도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특히 간도 공산당 폭동사건의 지도자였던 김근과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해방이 되면 서로 담합하여 좌우의 대립과 분열을 막자고 약속했다고 한다. 정이형은 또 부인 강탄탄과 종종 편지를 주고받았고, 1932년 7월에 그녀와 면회했다. 그는 오랜 세월 독립운동에 전념하느라 집안을 돌보지 않은 것에 죄책감을 품었고, 강탄탄에게 자신을 잊고 출가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탄탄이 듣지 않고 끝까지 옥바라지할 뜻을 밝히자, 정이형은 편지에 "내가 한국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강탄탄 여사와 인연이 없었으면 좋았을 터인데"라고 적었고, 이를 본 오송리 동네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고 한다. 정이형은 부인, 딸, 조카, 동지들과 옥중에서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그 편지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편지들 중 내용이 불온하다고 하여 발송 허가를 받지 못한 편지들이 일부 남아 있다. 이 편지들은 정이형이 출옥 때 가지고 온 것을 딸 정문경이 보관하고 있었기 떄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41~1942년 10월 7일, 정이형은 딸 정문경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가정의 은택을 맛보지 못하는 문경에게 >가장 유효한 시기에 품행에 대한 조언을 구하지 못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아버지는 장소의 불길과 편지의 부자유도 모다 불구하고 이 편지를 써서 보내오니 부디 잘 이해하고 깊이 명심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옥엽(정이형의 이복형인 정원익의 셋째 아들 정문연의 딸)에게도 보여주고 잘 지도하여 주기를 부탁하노라. >우리 조선사회가 부패한 제일의 요한 원인은 남녀를 물론하고 정조관념이 박약한 것입니다. 과거나 현재를 물론하고 교양이 높은 극소수의 인사를 제한 외에는 남성의 정조관념은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회에 태어난 조선여성들은 참말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남성에 대한 주의는 언제든지 극히 삼가고 깊이 조심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입니다. >장래에 지도적 입장이 되려거든 상류사회의 행복을 누리려거든 먼저 자기 자신이 단정한 품행을 가져야 하는 것은 물론임이라. 현대 소위 신여성이라는 그네들이 구사회에 갇혀 있는 규문을 열고 나와서 하여 놓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데 남성의 방탕한 악습에 물이 들어서 전반사회를 부패하게 하고 있는 현상이야 참으로 한심하지만 절대로 그런 사람들에게 물들지 말도록 공부하기를 바라노라. >공부하는 이상은 글자만을 배우는 것 아니요, 자기 인격을 향상하기 위하야 하는 것이니 절대로 악습관에 감염되지 말고 오퐁속에 타락하지 말기를 바란다. 여성의 태도는 모직물 같이 유화하고 여성의 의지는 강제품같이 강인하여야 함이라. 아모리 꺾어도 꺾이지 않고, 아무리 밟아도 밟혀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함이다. 언제든지 남녀 동등의 인격을 보존하여야 할 것이다. 여학시대의 품행은 자기 일생을 두고 중대한 영향을 가지는 것이니 문경의 장래를 위하여 명예상 주의할 것이며, 불행한 아버지의 명예를 생각하여서라도 부디 주의하시기를 천만번 부탁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상급학교로 들어갈수록 교제는 넓어지고 신분은 높아지는 것이니 장래가 원대한 청년의 남성 한 사람이라도 못쓰게 만들지 말며 장래가 무한한 자기의 인격상 소호라도 오점이 없도록 근신하기를 바랍니다. 지금같이 순결하고 그 품행을 더욱 더욱 고상하게 하는 것이 공부니까 부디 아버지의 편지를 헛되이 보지 말아주기를 부탁한다. >감옥에 있는 아버지 원흠 서, 10월 7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