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일우(신부) (문단 편집) == 상세 ==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톨릭]] [[신부(성직자)|신부]]로, [[세례명]]은 [[사도 요한]]. '빈민 사목의 대부'로도 불리는 인물이다. [[1960년]] 9월 [[예수회]] 신학생 신분으로 처음 [[대한민국]] 땅을 밟은 후, 1963년 사목 실습을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가 [[성품성사|사제서품]]을 받았다. 4년 뒤 고등학교 은사인 바실 프라이스 신부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에 해외선교사제로 파견되어 돌아왔다.[* 프라이스 신부는 [[서강대학교]] 설립의 주역 중 한명으로 1966년 국내 최초로 노동문제 연구소를 열어 34년 동안 노동자들에게 노동법, 노조 활동, 단체교섭 방법 등을 가르치며 국내 노동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2004년 선종.] 정 신부는 프라이스 신부와 함께 서강대에서 강의하던 1972년 학생들이 [[유신]] 반대 운동을 하다 당시 중앙정보부에 잡혀 들어간 것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에 눈을 떴다. 이때 정 신부는 "대한아 슬퍼한다. 언론자유 시들어간다."고 쓴 피켓과 상복차림으로 명동에 갔다가 반정부 시위로 잡혀갔다. 경찰이 "왜 그랬냐?"고 물어보자 정 신부는 "대한민국은 언론의 자유가 없고 죽어간다." 라고 답했다. 이에 경찰이 "아니요, 한국에는 얼마든지 언론자유가 있어요." 라고 말하자 '''"그럼 내가 왜 여기 있나요."'''라고 반문했다. 이후 개발 논리에 밀려 비참하게 살아가는 [[빈민]]들의 삶을 접한 뒤 [[청계천]]과 [[양평동]] [[판잣집|판자촌]] 빈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빈민들을 위한 사목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때 [[제정구]]를 만나 일생의 동지가 되었다. 빈민들이 스스로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의식 교육을 하고 판자촌 철거 반대 시위를 주도하면서 빈민의 '정신적 아버지'로 자리잡았다.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둔 1980년대, 곳곳에서 철거작업이 진행되자 [[상계동]]과 [[목동(서울)|목동]] 등지에서 철거민을 도왔고 이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복음자리 딸기잼'을 만들어 팔았다. 1998년 귀화한 뒤 [[충청북도]] [[괴산군]]에 농촌 청년 자립을 돕기 위한 누룩공동체를 만들어 농촌 사목에도 힘을 쏟았다. 정일우 신부는 1986년에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빈민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제정구]] 전 의원과 공동 수상했다. 그렇게 잘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이름 없이 남들을 돕다 2014년 6월 2일 선종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SSrMLPJYLsM|[PBC뉴스] 정일우 신부 선종]]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