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족산성 (문단 편집) == 역사 == 원래 정족산성은 원래 이름은 '''삼랑성'''(三郞城)으로 [[단군]]의 세 아들이 정족산에 쌓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정족산성은 조그마한 산성으로 별로 유명하지 않다. 오히려 산성 안에 있는 [[전등사]](傳燈寺)가 강화도 내에서 유명했다. [[흥선대원군]]이 1866년 [[병인박해]]로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처형하자, 프랑스 정부는 화가 나서 해군 특전대 약 6백여 명을 조선에 파병하였다. 프랑스군은 문수산성에서 한성근이 이끄는 조선군과 맞서 사상자 27명을 내는 등 피해를 입지만 결국 [[강화도]]에 상륙했다.[* 이 과정에서 외규장각에 있는 도서가 프랑스군 손에 넘어가는 등 문화적인 피해도 크게 입었다.] [[양헌수]]는 휘하 군사 120명을 이끌고 덕진진을 통해 유일하게 함락되지 않은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수성장(守城將)[* 성을 지키는 장수란 뜻]이 되었다. 프랑스군은 이를 알고 병력 60여 명을 보내었다. 양헌수는 사거리가 짧은 조총의 단점과 프랑스와의 전력차를 인정하고, 총을 잘 쏘는 포수들을 입대시키고 프랑스군이 성에 가까히 접근하면 쏘는 근접사격을 도입했다. 마침내 프랑스군이 성 가까이에 접근한 순간 근접사격을 가하자,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에 부상자 35명이 생기는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당시 프랑스 병력들은 놀러가는 기분으로 음식을 잔뜩 싣고 방심한 채로 정족산성에 접근하다가 당한 것. 프랑스 장교들은 빡이 쳐서 정족산성을 다시 공격하자고 건의하지만, 지휘관 로즈 제독은 정족산성을 함락하기에는 병력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강화도에서 철군하라고 명했다. 상기 정족산성 안의 사찰 전등사에는 과거 정족산 사고(鼎足山 史庫)가 있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다. 정족산을 지켜냄으로써 사고도 함께 지킬 수 있었다. 정족산성 전투의 공으로 양헌수는 승진하여 나중에는 [[공조판서]]까지 되었다. 조정은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해 1873년 정족산성 입구에 승전비를 세웠는데, 훗날 인천시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cha.go.kr/1625201.jpg|width=100%]]}}} || || {{{#fff '''정족산성 정해루 안쪽 전경[* [[http://www.cha.go.kr/unisearch/images/history_site/1625201.jpg|사진 출처 - 문화재청.]]] '''}}} || 정족산 전투는 오늘날에도 근대사를 배울 때 꼭 나온다. [[광성보]]와 더불어 병인양요를 대표하는 격전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