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종(조선) (문단 편집) == 여담 == * [[집현전]][* 현재는 집현전이 아니라 [[경복궁 수정전]]으로 바뀌어 있다.]이 [[세종(조선)|세종]] 때 처음 설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정종 때의 일이다. 정종 2년인 [[1399년]]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경전의 강론을 담당하게 했다. 세종이 한 일은 집현전 설치가 아니라 기능을 확대한 것이다. 집현전 학사들의 업적을 생각해보면 정종의 [[신의 한 수]]였다. * '''[[이숙번]]과의 정쟁에서 진 적이 있다'''. [[이숙번]]의 집 앞으로 새로 길이 나기로 됐는데 [[이숙번]]이 "누구 마음대로?" 라며 펄펄 뛰었고 "[[인덕궁]] 앞에 좋은 자리가 있는데 거기에 길을 놓으라"며 반협박을 했는데 [[인덕궁]]이 바로 정종이 사는 곳이다. 정종도 "내 집 앞에 길을 왜 놓냐"며 못마땅해 했으나 그로서는 [[이숙번]]의 요구를 철회시킬 힘이 없었고 결국 그의 집 앞으로 길이 놓였다.[*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6월 19일 (병인)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306019_002|#]].] 이건 [[태종(조선)|태종]]이 정종 부부의 위상을 낮추기 위해 방관해서 가능했다고 봐야한다. '''[[정종(조선)|정종]]과 [[태종(조선)|태종]]이 사적으로는 화목했지만''' 사후 [[묘호]]도 올리지 않고, [[성비 원씨]]를 우대해 [[조선]] 첫 대비인 [[정안왕후]]의 지위를 흔드는 등 뒤에선 [[태종(조선)|태종]]이 정종의 [[자식]]이 되어야 했던 [[역사]]를 지우고, 자신의 부모로서 그들의 권위를 낮추기 위한 시도가 이어졌다.[* 다만 위에서 보았듯 [[묘호]] 문제는 이 때까지는 [[묘호]]를 써야하냐 말아야 하냐가 논란거리였다. 그나마 [[시호]]랍시고 올린게 겨우 6글자 뿐인게 논란거리. 애초에 [[묘호]]는 [[성종(조선)|성종]] 시절까지 논란이 이어져 [[성종(조선)|성종]]이 "우린 [[제후국]]인데 참람하게 [[묘호]]를 쓰고 있다" 라고 한탄했을 정도다.] 이것도 그 일환. '''다만''' 후에 [[이숙번]]을 [[유배|귀양]] 보내 [[숙청]]해버리고 아들 [[세종(조선)|세종]]에게 절대로 죽을 때까지 [[귀양]]을 풀지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한 것으로 보아, '''[[태종(조선)|태종]]도''' [[이숙번]]의 그러한 능력이 필요했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인해 [[이숙번]]의 만행을 적당히 봐주고 있었을 뿐, 속으로는 [[정종(조선)|자기 형]]한테까지 겁없이 개기는 [[이숙번]]에게 이를 나름 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효자인 [[세종(조선)|세종]]은 [[태종(조선)|아버지]]의 [[유언]]대로 절대로 [[이숙번]]을 관직에 재등용하지 않았다. 다만, [[세종(조선)|세종]]은 개인적으로는 [[이숙번]]은 용서해줄만 하다고 여겼다. 물론 정종에게 한 일을 용서해줄만 한건 아니고 [[숙청]]한 이유에 대해서였다.[* [[세종(조선)|세종]]은 [[이숙번]]에 대해서 "[[이숙번]]은 [[민무구]]와 [[민무질]] 등을 제거하는 일에 앞장서고 나서 유양과 함께 [[태종(조선)|부왕]]께 '[[양녕대군|세자]]께서 저희를 미워하실 지 모르니 자주 [[양녕대군|세자 저하]]를 뵙게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고 했다. 직접 청한 것으로 보아 역심을 가졌다 할 수 없고 유양은 용서받았으니 [[이숙번|숙번]]에게 무슨 죄가 없겠는가?" 라고 말했다.] * '''동생 [[태종(조선)|태종]]과는 화목하게 지낸 듯 하다'''. [[고려시대]]에는 첫눈이 내리면 그 첫 눈을 담아 약이 되는 음식(약이(藥餌))이라고 속이고 누군가에게 보내면 첫눈을 받은 사람이 [[술]]을 한 잔 쏴야 했고, 반대로 [[심부름]] 오거나 혹은 미리 보낸 사람을 잡으면 보낸 사람이 쏴야 하는 풍습이 있었다. [[고려시대]]에 태어난 [[정종(조선)|정종]]과 [[태종(조선)|태종]]도 이러한 장난을 매년 즐겼던 듯, [[태종(조선)|태종]]이 아들 [[세종(조선)|세종]]에게 [[양위]]한 후인 [[1418년]](세종 즉위년) [[10월 27일]] 첫눈이 내리자 장난기가 돈 [[태종(조선)|태종]]이 첫눈을 상자에 담아 최유를 시켜서 형 정종에게 약이라고 속이고 전달했다. 그러나 약 상자(?)가 도착하기도 전에 소식을 들은 정종은 이미 이를 알고 최유를 잡으라고 하지만, 이미 최유는 눈치를 채고 잽싸게 도망가버렸다. 할 수 없이 정종은 첫눈을 받은 후 동생 [[태종(조선)|태종]]에게 큰 술자리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세종실록]]》 1권, 세종 즉위년([[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10월 27일 (계묘) 10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010027_010|#]].] * [[청나라]]로 보면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2남인 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다이샨|다이샨]]과 매우 유사하다. 둘 다 무골에 군공이 크고 정치적 야심이 적었다는 것. [[태종(조선)|이방원]]은 [[숭덕제|홍타이지]]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다만 [[아이신기오로 다이샨|다이샨]]은 정치적인 야심이 적었다기 보다는 동생인 [[숭덕제|홍타이지]]에게 밀렸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누르하치]] 사후 [[아이신기오로 다이샨|다이샨]]은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지만, [[숭덕제|홍타이지]]가 [[아이신기오로 다이샨|다이샨]]과 [[계모]]와의 [[불륜]]을 공개하면서 정치적으로 치명타를 입는 바람에 동생인 [[숭덕제|홍타이지]]에게 확실하게 밀려나고 말았다.] * [[살해|참살]]당하며 제 명에 못 죽은 이복아우들인 [[이방번|무안대군]]과 [[이방석|의안대군]]을 제외한 '''동복형제들 중 가장 오래 살았는데''', 본인 바로 위의 형이자 맏형인 [[진안대군]](방우)은 40세에 [[사망]]했고, 바로 아랫동생인 [[익안대군]](방의)은 45세, [[회안대군]](방간)과 [[태종(조선)|태종]]은 각각 58세와 56세로 사망한 반면 본인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최장수인 63세까지 살면서 형제들 중 유일하게 [[환갑]]을 넘겼다[* [[조선/왕실|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생몰년도가 미상인 [[덕안대군]]은 일단 태종이 [[1367년]](공민왕 16년) 생이니 [[1368년]](공민왕 17년) 이후에 태어났고, [[1387년]](우왕 13년)에 숨졌다고 알려져 있다. [[덕안대군]]도 일단 [[성년|어른]]이 되기도 전에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인이 '''[[태조(조선)|태조]]의 자식들 중 가장 [[무장|무골]]'''인데다 동생 [[태종(조선)|태종]]에게 [[양위]] 후에는 전국을 여행하며 몸에 좋은 [[온천]]을 즐기고 [[격구]]를 치면서 편하게 보낸 덕분으로 보인다. [[조선/왕사|조선 왕들]] 중에는 정종보다 단명한 군주들[* 예를 들어 [[문종(조선)|문종]]과 [[단종(조선)|단종]], [[예종(조선)|예종]], [[인종(조선)|인종]], [[경종(조선)|경종]], [[헌종(조선)|헌종]] 등이 있다.]이 많은데 [[조선/왕사|군주]]가 가진 업무량을 생각해보면 당연할지도. * [[고려]] 말에는 [[장군]]이었던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전쟁터를 종군하기도 했던 전형적인 무장이다. 기록에 의하면 체구가 [[곰]]처럼 강건하고 왼쪽 눈 밑에 큰 [[사마귀]]가 있었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 [[태조(조선)|이성계]]의 무인적인 기질만큼은 형제들 중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고 한다. * [[조선]] [[조선/왕사|국왕]] 중 최초로 [[한성부|한양]] [[경복궁]] [[경복궁 근정전|정전]]에서 즉위한 [[정종(조선)|왕]]이며, 당시 만 41세로서 [[조선/왕사|역대 국왕]] 중 즉위 당시 [[나이]]가 가장 많았던 부친 [[태조(조선)|태조]](즉위 당시 만 57세) 다음으로 즉위할 때의 [[나이]]가 많았다. [[정종(조선)|정종]][[왕비|비]] [[정안왕후]]는 [[조선/역대 왕비|왕비]] 즉위 때의 나이가 가장 많은 [[왕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