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종(조선) (문단 편집) === 상왕 및 노상왕 시절 === 동생 [[태종(조선)|정안공 이방원]]에게 [[조선/왕사|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유유자적하게 살면서 여생을 보냈다. [[제사]]도 지내고 [[불공]]도 드리다가 이를 핑계로 [[전국]] 각지의 [[온천]] 유람을 떠나는 등 말년에는 [[태종(조선)|태종]]도 그의 생활을 부러워했다고 하는데 [[태종(조선)|태종]]도 [[말년]]에는 [[외로움|고독감]] 같은 것을 느꼈는지 [[상왕]]이 된 형과 어울려 노는 일이 잦았다.[* 사실 세종이 즉위하던 시기쯤 되면 아버지(10년전 사망)도 셋째형(14년 전 사망)도 죽었기에 형제나 자기 웃사람으로 치면 둘째형인 정종과 넷째형인 이방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2차 왕자의 난|어떤 사건]] 때문에 이방간과는 놀 수 없는 노릇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종과 태종이 첫눈이 내리는 날 서로 장난을 친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정확히는 [[고려]]의 옛 [[풍습]]에 첫눈을 다른 것으로 속여 보내고, 보낸 심부름꾼을 잡지 못하면 받은 쪽이, 눈치채고 심부름꾼을 붙잡으면 보낸 쪽이 한턱을 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세종실록]]》 1권, 세종 즉위년([[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10월 27일 (계묘) 10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010027_010|#]].] [[태종(조선)|태종]]도 형에게는 매우 깍듯해서 [[조선/왕사|왕위]]를 물려받은 뒤에도 형을 웃어른으로서 제대로 대접해주었다. [[상왕]]으로 물러난 뒤 [[태종(조선)|태종]]이 [[원경왕후|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원경왕후]]에게 [[후궁]] 관할권([[내명부]]의 권한)을 빼앗고 [[후궁]]을 더 들이겠다며 전 성균악정 권홍에게 단자 9필, 견 20필, 정5승포 250필, 쌀과 콩 각각 1백 석을 내려 주어 가례(嘉禮)의 혼수를 갖춰 후궁을 들이는데 거창하게 혼례를 올리려고 하자 [[상왕]] 정종이 "[[태종(조선)|금상]](今上)은 어찌하여 다시 [[결혼|장가]]들려고 하는가? 내 비록 [[아들]](적자)이 없어도 소시(少時, 젊었을 때)의 정(情)으로 인하여 차마 다시 [[결혼|장가]]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태종(조선)|금상]]은 [[아들]]이 많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라고 말해 [[태종(조선)|태종]]이 거창하게 하려던 가례색을 폐하고 조용히 [[후궁]]을 들이기도 했다. 이건 [[태종(조선)|태종]]이 뭘하건 정치에 일절 간섭하지 않던 정종이 형이 아니라 물러난 상왕으로서 유일하게 [[태종(조선)|태종]]에게 직접적으로 한소리(충고)한 것이다.[* 출처: 《[[태종실록]]》 3권, 태종 2년([[1402년]], 명 건문(建文) 4년) 2월 11일 (갑자)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202011_003|상왕의 충고에 따라 가례색을 파하다]].] 집안 어른으로서 그냥 좌시하고 보고만 있지는 못했던 모양. 물론 [[태종(조선)|태종]]은 거창한 행사만 안 했을 뿐이지 [[중국]] 제후의 예를 따라 [[후궁]]을 9명까지 다 들였다. 63살로 천수를 누렸으며, 셋째조카 충녕대군이 [[세종(조선)|세종]]으로 즉위하는 것([[1418년]])까지 보고 그 이듬해에 [[사망|승하]]했다. 당시의 평균적인 [[수명]]을 감안하면 오래 산 편이다. 당장 동생 [[태종(조선)|태종]]은 3년 뒤인 56세의 일기로 환갑도 채우지 못하고 승하했다.[* [[영조]](83살), 아버지 [[태조(조선)|태조 이성계]](74살), [[고종(대한제국)|고종]](68살), [[광해군]](67살) 다음으로 [[조선/왕사|역대 조선 국왕들]] 가운데 5번째로 장수했고, 아울러서 본인 포함 앞사람들과 더불어서 [[환갑]]을 넘긴 5명의 [[조선/왕사|조선의 군주]] 중 한 명이다. 6번째는 [[환갑]]을 맞이하기 한해 전에 [[죽음|승하]]한 [[숙종(조선)|숙종]](60세)이다.][* 물론 56세도 당시 기준으로 봐도 나름대로 [[장수]]했다고 볼 수 있는 나이이다.] 정종의 후예로는 [[덕천군]]의 [[후손]]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억기]]와 [[이경석]], 서예가로 유명한 [[이광사]]와 [[이긍익]]이 정종의 서출로 이어진 직계 후손이다. 태종의 양위로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이 되자, 태상왕 호칭이 논위되었으나 정종이 태종보다 나이가 많으니 노상왕으로 부르면 충분하다 하여 노상왕으로 불리웠다. 그의 묘는 현재 [[북한]]의 [[개성시]]에 있다. [[함흥부]]에 있는 [[태조(조선)|태조 이성계]]의 4대조 능을 제외하고는 [[조선시대]] [[조선/왕사|왕들]] 중 유일하게 [[조선왕릉|왕릉]]이 [[북한]]에 있으며 [[조선왕릉]] 중 제일 북쪽에 있는 능이다.[* [[조선/역대 왕비|왕비]]까지 포함하면 [[태조(조선)|태조]]의 첫 부인이자 정종의 생모 [[신의왕후|신의왕후 한씨]]의 능인 제릉(濟陵)도 [[개성시|개성]]에 있다.] 정확한 위치는 [[경기도]] [[개성시]]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現 [[개성시]] [[개풍군]] 령정리). 능호는 [[후릉]](厚陵)으로 정비 [[정안왕후]]와 나란히 묻힌 쌍릉인데 [[현정릉]]과 비슷한 형식이다. [[남한]]의 [[조선왕릉]] 중 제일 북쪽에 있는 능은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인조]]의 [[장릉(파주)|장릉]]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북한]]에 있는 탓에 [[후릉]]은 같이 [[북한]]에 있는 [[신의왕후]]의 제릉(濟陵), [[조선왕릉|왕릉]]의 제식을 못 갖춘 [[연산군묘]], [[광해군묘]]와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세계 유산]]에 올라가지 못하였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1142051415&code=990100&s_code=ao102|관련 기사]]. 세계유산에 추가등재되려면 통일 이후를 기약해야 되는 상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