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진석(추기경) (문단 편집) === 출생과 가계 === 1931년 12월 7일, 경기도 경성부 수표정(現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그 당시에는 진짜 보기 드문 [[무매독자]]로 태어났다. 정진석 추기경의 모친 [[전주 이씨]] 이복순(李福順) 루시아 여사(1909. 3. 5 ~ 1996)[* 이희선(李熙旋)의 딸이다.]는 태몽으로 머리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266008&cid=51293&categoryId=51293|주교관]](Mitra)을 쓰고 손에 지팡이를 든 어느 청년이 "어머니, 저 주교 됐어요."하고 말하는 꿈을 꿨다고 한다.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181528|1998년 가톨릭신문 보도]] 그의 부친인 정원모(鄭元謨, 1909. 10. 9 ~ ?) 갈리스도는 1909년 10월 9일 한성부 서서 인달방 장흥고계(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자동)의 양반가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당시 사회주의자로서 활동했다. 그는 [[경기고등학교|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로 건너가 1927년 4월 [[여순공과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1년이 못 되어 학업을 중단하였다. 이후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현 서울특별시 성동구 하왕십리동)에 거주하였다. 1931년 3월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 공산청년부 조직원이 되었으며, 학생부 책임비서로서 노동절 기념행사를 위한 격문을 배포하였다가 그해 5월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부로 압송되었고, 6월경에는 용산경찰서에 구금되었다. [[http://db.history.go.kr/id/ia_4927_3827|#]] 1934년 3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정원모(1931년).jpg|width=100%]]}}} || || 1931년 조선공산당 관련 사건으로 검거된 정진석의 부친 정원모의 사진. || || 좌측·중간 : 1931년 6월 15일, [[서울용산경찰서|경성부 용산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br]우측 : 1931년 7월 1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1935년 출옥 후 간도로 건너가 1937년 8월부터 동아일보 [[투먼시|도문]](圖們)지국에서 기자 생활을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7HIL_A1909_1_0026862|하기도 했으며]], 부친과 함께 함경남도 [[원산시|원산부]]로 가서 건어물을 판매하는 개인사업을 경영하기도 했다. 1944년 12월 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에 연루되어 경기도경찰부에 검거되었다. 갖은 고문을 겪고 1945년 여름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8.15 광복 후 그해 9월 월북하여 줄곧 북한 정부의 산업관계 행정부서에서 '흑색금속'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과장 직을 역임했으며, 정진석의 큰아버지 정윤모(鄭允謨, 1904. 5. 27 ~ 1981. 2. 20)씨 등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서울 점령 직후에는 '시찰대' 명목으로 서울에 거주하는 친·인척들을 만나 자신이 "북한의 따발총을 개발하는 데에 여러 가지로 기여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뒤 1953년 5월 화학건설공업성 화학공업국장, 1955년 1월 산업통상자원부의 차관급에 상응하는 화학공업성 부상(副相)에까지 올랐으나, 이후 1957년 5월 시멘트공장 지배인으로 좌천되고 1959년 공직 박탈, 즉 숙청되었다. 아마도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만주 빨치산 계열이 아니었기 때문에 1956년 있었던 8월 종파사건 이후 숙청 행렬을 피해가지 못한 듯 보인다.[[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75#0DKU|#]] 이러한 가정사는 정진석 추기경이 2006년 추기경으로 서임되기 전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다. 정 추기경이 젊을 시절 한국 사회에서는, 본인은 전혀 그런 성향이 없다 하더라도 가까운 가족이 월북을 하게 되면 (심지어 억울하게 납북을 당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연좌제가 적용되어 사회생활에서 대단히 큰 불이익을 받아야만 했다. 정 추기경은 31년생이고 아버지가 1935년도 간도로 건너가서 활동하고 광복 후 월북해버렸으므로 불과 3-4세 무렵에 실질적으로 아버지가 없는 상태로 자라났다. 가족들도 정 추기경이 받을 사회적 불이익을 염려하여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일본으로 갔다가 연락이 두절되었다'고만 알려주었고, 어머니 이복순 여사는 1996년 죽을 때까지 남편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아서 정 추기경은 아버지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성인이 되고 호적 초본을 떼다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정 추기경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2006년 2월 28일 프레시안에서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66|최초로 이 사실을 보도하였다]]. 이 보도가 나간 후 서울대교구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아버지가 정원모 씨가 맞다고 확인하였고 정 추기경 역시 이 보도가 사실이라며, 3월 8일 동아일보에서 소설가 [[최인호(작가)|최인호]]와의 [[https://www.donga.com/news/People/article/all/20060308/8282548/1|대담]]을 통하여 본인이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 경위, 아버지에 대한 느낌, 평양대교구장 서리로서 갖는 생각 등을 담담하게 술회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