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진석(추기경) (문단 편집) === 신학교 입학 === 어릴 때부터 과학자가 장래희망이던 그는 [[경성부]] [[계성초등학교(서울)|계성국민학교]]와 [[중앙고등학교|중앙중학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기 전인 6년제 [[구제중학교]] 과정으로, [[중앙중학교(서울)|중앙중학교]]ㆍ[[중앙고등학교]] 41회 졸업생에 해당된다. 2006년 6월 모교에 방문해 강연을 하였으며, 2008년 7월 개교 100주년 기념 미사를 집전하였다.]를 거쳐 1950년 6월[* 원래 신학기 시작은 4월이었는데 미군정 하에 미국식 학제에 따라 9월로 바뀌었다가, 이것을 다시 원상회복하는 과정에서 이 해에만 6월에 입학했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그 해 발생한 6.25 전쟁은 그의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사제 대신에 일반 사회인으로 진출했더라면 월북자인 부친을 둔 그가 연좌제의 제약을 받았을 것이니, 결국 가톨릭 성직자라는 또 다른 진로에서 서울대교구장, 추기경이라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서울대학교를 중퇴하고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61년에 [[성품성사|사제품]]을 받았다. 한국전쟁 당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널브러져 있던 시체들을 보면서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하는데[* 자신의 은신처에 같이 숨어 있던 육촌 동생을 폭격으로 바로 옆에서 잃었다. 그의 세례명이 [[미카엘]]이었는데, 그가 죽은 바로 다음 날이 추석이요, 그 다음 날이 성 미카엘 축일이었다.], 그 사건이 바로 대한민국 국군의 흑역사로 기록된 [[국민방위군 사건]]이다.[* 당시 동네 친구와 같이 행군했는데, 입대하기 전 어머니의 재봉틀을 판 돈으로 철조망 근처에서 김밥이나 떡 등을 먹으면서 겨우 연명했다고 한다.] 당시 생존자 중 하나였다. 정 추기경이 6.25 전쟁 때 미군 통역병으로 근무하던 중 부산광역시에서 김영식 베드로 신부{{{-3 (1909~1963. 천주교 서울대교구)}}}를 만나 고아원 운영을 3년 동안 도왔는데, 이것이 정 추기경의 사제성소가 되었고 이후 신학교 입학을 확실하게 결심하게 되었다. 당시 정 추기경은 외아들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신학교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어머니 이복순 루치아 여사의 간곡한 부탁 덕분에 당시 교구장이었던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로부터 신학교 입학을 허용(관면)받았고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