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충신 (문단 편집) === [[출생]] === 1576년 전라도 광주목(현 광주광역시)에서 정윤(鄭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까지는 천민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글을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노비종모법 때문. 친부는 [[중인]] 출신 정도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중인은 상민과 그리 뚜렷하게 구분되는 계급은 아니었다. 다만 양반도 애초에 상민이라도 벼슬만 하면 얻을 수 있는 계급이었고 조선시대 신분 구분은 공식적으로는 양인이냐 천민이냐 만을 구분하는 양천제였기에 양반, 중인, 상민이 무 자르듯 뚜렷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근거가 있다. * 아버지가 [[아전]]이라는 기록이 정충신 사후 작성된 [[행장]]에 적혀 있다. 이 행장은 가족/친인척이나 지인이 작성하기에 부풀려서 쓰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럼에도 고작 아전으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즉 부계도 양반이 아닌 양인이었다는 것. * 기록 전체를 보자면 경우에 따라서는 정충신은 조부 대부터 대대로 병졸이었다고 하기도 한다.[* 천민은 병역에서 면제된다. 양반은 원래는 병역을 똑같이 져야 하지만 실상은 대체로 군포를 내는 등으로 대충 면제 받았다.] * 또 정충신이 권율의 보고서를 국왕 선조에게 바치고 면천되었으며, 이후 관직에 오른 과정도 기록이 확실하지 않다. 일각에서는 광주부에 예속된 심부름꾼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전이라는 벼슬로 면천을 시켜주고, 다음 해 무과 급제자 명단에 포함시켜 벼슬을 주었을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과거 급제자는 조부의 이름까지는 당연히 기재하여야 하는데, 당장 조부의 이름조차 무엇인지 기록이 전혀 없는 상황이고, 뜬금없이 7대조 할아버지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록에서 정충신이 선조에게 장계를 전달하고, 그대로 이항복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점에 아전 벼슬(?)을 주었을 가능성은 낮다. 이항복의 밑에 있었다는 것은 어쨌거나 중앙으로 진출했다는 얘기인데, 과연 지방 관리인 아전으로 만들었을까? 일단 인조실록 14년 정충신의 졸기에서는 출신이 아전이라고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광주 아전'이었다. * 정충신이 권율 휘하였을 당시 그 신분에 대한 기록은 일반 병사에서 지인(知人)까지 다양하다. 후대 기록이라 좀 신빙성은 떨어진다. 17세 때 당시 [[광주광역시|광주]]목사였던 [[권율]]의 휘하에 들어가 권율의 [[노비|노복(奴僕)]] 역할을 맡아왔다. 일반병이었지만, 민첩하고 영리해서 권율에게 총애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