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충신 (문단 편집) === [[광해군]] 시절 === 1602년 [[조선]] 사신 자격으로 [[명나라]]를 방문하였으며, 압록강을 건너 [[여진족]]의 동태와 정세를 파악하는 역할을 하였다가, 1608년 조산보 만호직에 임명되어 무관으로 활동했다. 1618년 스승인 백사 [[이항복]]이 [[인목대비]] 폐비론에 반대 입장을 밝히는데, 제자로서 같은 입장을 따르면서 스승을 따라 유배를 떠나기도 하였다. 이때 이항복과의 유배 기록인 백사북천일록을 남겼다. 특히 이 무렵의 오성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었다. 의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중풍에 걸리면 웬만한 사람은 문병도 오지 않는다고[* 즉 "당신은 이제 끝났다"는 의미이다. 중풍으로 떨어진 사람에게 같은 사람이 2번 찾아왔다면 덕을 많이 쌓았다는 방증이란 얘기도 있을 정도다.] 할만큼 치명적인 질환인데, 유배지까지 따라와 스승을 [[간병]]했던 것. 사르후 전투 패배 후 다시 등용되어 만포 첨사가 되어 국경 수비를 맡았고, 1621년 8월 광해군의 명으로 금나라에 다녀왔다. 조정 대신들의 반대로 국서를 보낼 수 없게 되자 국서없이 광해군의 뜻을 전하러 간 것이다. 정충신이 요양성에 도착했지만 누르하치는 만날 수 없었다. 대신 억류된 강홍립 등을 만나고 팔기군의 규모와 깃발의 형태 등도 염탐하여 보고했다. '''까놓고 말해서, [[광해군]]의 외교는 조정이 아니라, 광해군의 명을 받은 정충신을 위시한 북방의 장수들이 진행했다.''' 현대 미디어에서의 과장과는 달리, [[광해군]] 시대에는 국운을 걸 정도로 외교에 열성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왜란으로 더 이상 적극적인 견제가 힘들어진 반동으로 첩보와 외교에 힘써 광해군-인조의 외교 정책의 큰 틀을 마련한 선조 시절과, 광해군의 난치 및 후금의 강성으로 운신의 폭이 극히 좁아진 인조 시기에 열성적이었다. 인조 시기 서인 세력이 고려 때도 금과 송을 함께 섬겼는데 화친 못할게 뭐냐고 하고, 인조는 가도의 모문룡 잔당이 밖으로 나와 평안도 땅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며 토벌을 논의하던 것과 달리 광해군 시대의 북인 세력은 오랑캐와 싸우자며 헛소리를 하다가, 정작 [[사르후 전투]]에서 처발리자 우리 탓이 아니라는 변명을 외교랍시고 진행하던 수준이었다. 그리고 대놓고 북인을 밀어주며 타 당파를 배제해 이런 정국을 만든게 광해군이다. 외교적 안목 부분은 광해군이 뛰어나지만 내치가 엉망이라 정작 자기 정책 지지해줄 인원은 싹 몰아내놓아 소 끌리듯 끌려다니는 상황을 초래했다. 그 탓에 광해군은 정부가 아니라 정충신 등을 중심으로 외교를 진행해야 했고, 홍타이지를 포섭하려 하거나 홍타이지와 따이샨을 이간질시켜서 후금 후계자 구도에 내분을 일으키려는 공작 시도나 후금의 내부 군사정보 등을 빼내는 첩보 활동 등을 벌여야 했다.[* 반대로 인조 정권은 [[승정원일기]]가 공개되면서 인조실록이 심하게 짜깁기된 사료이며 실상과 다른 점이 많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승정원일기와 청측 기록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실록에 근거한 한명기의 주장에 반대하는 의견도 생기고 있다. 그리고 인조실록에서도 정묘호란 이전에 모문룡의 침공을 경계하며 모문룡과 전투를 준비하는 말이 나오나 후금에 대해서는 전문가였던 정충신과 남이흥의 주장을 소외시키고 사실상 모문룡만 신경쓰냐고 대비를 소홀히 하고 만다. 심지어 수많은 병사를 징발했지만 이괄의 난이 안겨준 충격으로 인해 다시 수도권을 반란으로 털릴 것을 우려하여 여유병력을 충분히 만들어냈음에도 정충신과 남이흥이 주장한 절반 수준의 복구도 해주지 않았다. 당시 군량 등의 문제가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충신이 요구했던 것은 군사를 1000~2000명만이라도 늘려달라는 것이었지, '''이괄의 난 이전 수준의 복구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현실적인 외교 활동으로 정력적인 모습을 보인 인물들은 윤휘, 이경전, 이민성, 황중윤 같은 당색이 약한 실무 관료들과 정충신 같이 변방에서 직접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는 무장들이었다. 그는 최전방의 무관이면서도 상당한 지식인이었으며, 외교와 첩보에도 밝았기 때문에, 광해군 시절에는 명 - 청 세력의 동향을 조정에 알리는데 공헌했다. 광해군의 밀명을 받고 홍타이지를 '견제'하는 임무를 받은 사람도 정충신이었다.[* 광해군 13년 8월 28일.] 조선에 대해 강경한 입장인 홍타이지를 조선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바꿈과 동시에 은근히 후금의 권력 다툼에서 홍타이지를 견제하도록 유도해볼 것과 후금 내의 정보를 긁어오라는 명을 받았고 정충신은 그것을 수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