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충신 (문단 편집) == 기타 == * 전형적인 야전 참모 스타일로 국경 지대에서 첩보와 [[외교]] 방면으로 뛰어났다. [[광해군]] 시절 적극적으로 [[명나라]]와 [[청나라]]를 오가며 각 세력의 동향을 꿰뚫어서 보고했다. [[후금]](청)과는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본심으로는 방비해야 함을 환기시키고 장수들을 살피며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광해군 시절부터 그가 없으면 업무가 중단될 정도로 유능했으며 [[인조]] 시절에는 '그를 조금만 더 중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표하는 [[사관(역사)|사관]]들의 평가가 있다. * 결과적으로 정충신에게 주어진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당대의 [[지식인]]들이 내린 평가이다.[* 단, 정충신은 최명길과 함께 죽는 날까지 인조 [[정권]]에서 깊은 신뢰를 받지 못했다. [[서인]]들은 정충신에게 [[이괄]] 토벌의 공으로 1등 [[공신]]을 줘놓고도 심심하면 이괄과의 친분을 물고 늘어지며 그를 한직에 잡아놓았다.] 결과 만능주의가 판치는 현대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면도 있지만 평생 동안 전쟁터를 구르며 다방면으로 조국에 이바지했던 면모를 보면 그는 [[이순신]], [[김시민]]처럼 유명한 장수들과는 다른 개성을 지닌 '''충무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 일개 병사로 군 생활을 시작했음에도 [[권율]]이나 [[이항복]] 같은 [[위인]]들에게 [[사랑]]받는 제자가 되었으며 보편적으로 존경을 받은 대표적인 지장이자 덕장이었다. 특히 장년기에 떨친 명성을 보면 일반병에서 출세한 인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만큼 다양한 능력을 발휘했다. 몇 가지 저서를 남겼음은 물론이고 [[무술]]에도 능했으며 천문, [[지리]], 점술, [[의술]]에 대한 지식도 해박했다고 한다. * [[부원수]]의 직책을 가지고도 워낙 청렴하게 지내어 셋방살이를 전전한 기록이 있다. 이후 [[숙종(조선)|숙종]] 대에 이르러서[* 숙종 10년 3월 11일 정축 3번째 기사]는 가세가 몹시 기울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숙종, [[영조]], [[정조(조선)|정조]] 재위기에 이르러 정충신의 사당을 세우고 [[후손]]들을 [[승진]]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 [[광주광역시]] 구 도심의 주요 도로인 [[금남로]]는 정충신의 봉호 '금남군'에서 따온 것이다. * [[광해군]] 때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무관이면서 몰래 문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종사관으로 동행한 이경직이 남긴 기록인 <부상록>에 따르면 당시 에도 막부의 로주[* 에도 막부 최고위직 집정대신이다. 사신 기록에는 '집정'으로 표기.]였던 안도 시게노부[* 기록에는 '안등대마수'로 표기. '대마수'는 그의 관위인 츠시마노카미를 일컫는다.]가 갑자기 "사신 일행이 모두 문관이 맞느냐?"고 물어봐서 역관 최의길이 당황해 거짓으로 '문관이 맞다'고 답하자, 안도가 정충신을 가리키며 '''"저 이를 내가 전장에서 알았으니, 분명 무관이 맞을 것이오"'''라고 해 이경직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단 이 기록에는 몇 가지 어색한 점이 있는데, 안도는 선대부터 죽 도쿠가와의 가신이므로 조선에 파병된 적이 없고 <부상록>에서는 안도 시게노부의 출신에 대해서도 오류가 있다.[* 안도 시게노부가 1607년 사신이 파견됐을 때 로주를 지내던 '좌도수(사도노카미)'라는 자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이 때 로주로 있던 '사도노카미'는 도쿠가와 가의 원로 혼다 마사노부밖에 없다.] 정황상 안도는 다른 참전자에게 들었을 뿐인데, 의사소통 과정에서 안도 본인이 정충신을 본 적이 있다는 식으로 착오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 [[야사(역사)|야사]]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해지는데 스승이었던 이항복, 권율 등 걸물들의 탄생 설화도 존재하며 [[만주]]의 추장들에게 식견을 설파하는 장면도 나온다. 몇 가지 설화가 있는데 그 중에 2개만 소개한다. >하루는 정충신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항복의 사위가 장기를 두자고 졸라댄다. 이 사위는 장인이 원래 양반이 아니었던 정충신을 아끼는 걸 보고 질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기를 하면서 '''"그냥 하면 재미 없으니까 [[캐삭빵|3번 둬서 지는 사람이 목 날아가는 걸로 하자]]"'''는 내기를 걸었다. 정충신이 거절하면 졸장부라고 놀릴 의도였는데, [[역관광|정충신은 내기를 받아들였고, 장기에서 이겼다.]] 사위가 튀려고 하자 정충신이 잡아다 칼을 잡으며 말하길 '''"사나이가 말을 물려서는 안 되지만, 나는 이 집에 신세를 지고 있으니 목을 치진 않겠소"'''라며 [[꿩 대신 닭|목 대신 상투를 잘랐다.]] 사위가 이를 이항복에게 고자질하자, 이항복은 오히려 정충신을 불러다가 '''"목을 자르기로 했으면 잘라야지 왜 안 잘랐냐!"'''며(...) 호되게 호통을 쳤다. 그러면서 '''"저 녀석을 도원수 감이라고 생각해서 데려왔더니 부원수 감밖에 안 되는군"'''라며 실망했다고. 실제 정충신은 부원수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다.[* 이는 사실과 다른 야사인데, 정충신은 애초부터 출신 계급이 낮고 군인 생활을 해서 [[최명길(조선)|최명길]]과 장만 정도를 제외하면 서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이처럼 붕당적인 색채가 적은 점은 그 출신 태생과 함께 높은 지위에 올라가지 못한 족쇄로서 작용하고 말았다.] >사르후 전투에서 명과 조선군이 패하자 뒷수습을 위해 정충신이 사신 행렬에 끼여 후금으로 갔다. 후금 쪽 장수가 "조선은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고 묻자 정충신은 "대도(大盜)로 봅니다"라고 태연히 대답했다. 후금 장수가 우릴 도적떼로 보냐며 벌컥 화를 내자, 정충신은 '''"천하를 훔치려는 자들을 더러 대도라고 하지 뭐라고 하나?"'''고 하자 그제서야 기분이 좋았던지 후금 장수도 껄껄 웃었다. 정충신은 조선으로 돌아오면서 후금의 힘이 커지고 있으니 큰일이라며 한탄했는데, [[병자호란|이는 훗날 현실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