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치범수용소/북한/형성 (문단 편집) == 1960년대 == '''둘째''', 중앙당 집중지도사업(1958년 말∼1960년 말). 경찰·검찰의 간부, 당 중앙학교 학생 전원, 각 도 간부학교 학생 전원 등을 조사원으로 임명하고 전 주민을 [[핵심계층]]·[[동요계층]]·[[적대계층]]으로 분류한 다음 적대분자를 강제수용소에 구금했다. [[적대계층]]으로 분류돼 숙청대상이 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① 월남자 가족 및 한국전쟁 때 치안대원으로 일한 자와 그 가족 약 2백만 명, ② 종교인, 지주, 기업가, 상인 약 10만 명, ③종파분자로 숙청 당한 자와 그 가족 약 10만 명, ④ 남로당계 잔당과 그 가 족 약 40만 명, ⑤ 귀환 북한군 포로와 그 가족 약 40만 명, ⑥ 일제강점기에 관직을 지낸 자와 그 가족 약 5만 명, ⑦실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거나 출소한 자와 그 가족 약 10만 명. 총계 3백20만 명.[* 김일성의 유언(たま出版, 1997) 263∼270 ] 적대분자의 적발은 가혹할 정도로 철저하게 수행함으로써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게 [[김일성]]의 방침이었다고 한다. [[안명철]]이 기억하고 있는 [[김일성]]의 교시는 다음과 같다. '''"독초는 적시에 제거하고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 '''"지난 시기에 우리 인민의 피와 땀을 빨아 살이 찐 착취분자와 종파분자는 무자비하게 숙청해야 하고, 다시는 고개를 들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앞뒤의 사정으로 보아 [[김일성]]의 교시는 아마 이 시기에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셋째''', 대규모 강제수용소 건설 개시(원주민 강제이주). [[요덕 제15호 관리소]]의 경우는 1959년에서 1964년까지 진행됐다. '''넷째''', 주민재등록사업(1966년∼1970년). 유일사상체제로의 이행에 즈음하여 출신성분을 중심으로 사상을 조사한 사업으로, 널리 알려진 51개 성분의 분류가 이 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 정권은 1966년 4월 주민의 사상을 조사하기 위해 주민재등록이라는 것을 실시했다. 이어서 1967년 5월 [[도서정리사업]]이 실시되면서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유일사상체계가 [[조선로동당]]의 공식노선이 됐다. [[8월 종파사건]]에서도 살아남은 [[갑산파 숙청 사건|갑산파와 남아있던 반(反)김일성 세력들이 숙청되었는데,]] 이들 반대파를 산 속에 위치한 강제수용소에 가두어 버렸고 그때가 바로 1967년 하반기에서 1968년에 걸친 시기였던 것이다. 소위 '''"김일성 교시"'''에 관해서는 전 경비대원 [[안명철]]씨가 상세히 밝힌 바 있다.[* 월간조선(1995. 5.)] 그 대표적인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종파분자와 계급의 원수는 그가 누구이건 3대에 걸쳐서 씨를 없애야 한다. 관리소 안에서 계급의 원수들이 폭동을 번번이 일으킨다면 군대를 배치해서 다시는 폭동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1968년 교시)"''' 위 내용을 볼 때에 그 해에 수용소 내에서 폭동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1968년 이후로 시간이 흐르면서, 각 강제수용소에 경비대가 배치돼 오늘날의 [[정치범수용소]] 형태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실학사상가, [[이순신]]장군 등에 대한 [[김일성]]의 비판(1968년). 1967년 5월 유일사상체계가 제기된 때를 맞추어 [[김일성]]은 지식인 비판을 개시했다. 특히 1968년 3월 14일에는 <학생을 사회주의·공산주의건설의 믿음직한 후비대로 육성하자>라는 제목의 연설 가운데서 17세기와 19세기 사이에 활약한 조선왕조의 실학사상가들에 대한 과대평가를 경계했을 뿐 아니라 [[이순신]]장군까지도 비판했다.[* 이종석 저, 현대 북한의 이해(역사비평사(歷史批評社, 199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