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크선 (문단 편집) == 성능 == 정크선의 항해 성능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정화(명나라)|정화]]의 원양 항해로, 해당 항목의 내용처럼 정화함대가 아프리카까지 갔었다는 것은 이미 정설이다. 또한 1847~1848년 정크선인 기영(耆英)호는 미국 뉴욕과 영국까지 [[http://cafe.naver.com/historygall/19613|세계일주에 성공]]하여 정크선의 원양 항해능력을 확실히 입증하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09px-Illustrated_London_News_-_1_April_1848.jpg|width=500]] 영국에 도착한 기영호를 다룬 당시 기사. 이러한 정크선의 항해능력은 기술적인 선진성에 기반을 둔 것으로, 유선형의 선체와 배를 지지하고 내수성을 키워주는 수밀격벽 구조, 가로활대를 넣어 역풍항해도 가능하게 만든 돛과 발달된 선미 고정식 수직타에 기인한 것이다. 수밀격벽 구조는 당송 시대부터 완전히 대중화되며(김재근의 설을 따름), 사고시 배에 물이 들어오는 것을 어느 정도 제한하는 한편 선체를 지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서양의 경우 용골과 늑골을 사용해 배를 지지했으며 18세기 말에 들어서야 수밀격벽이 채택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중국 원나라의 무역선인 신안 무역선에서는 배 밑바닥 용골 위에 수안(水眼)이라는 개폐 가능한 배수통로가 설치된 것도 선박 인양 결과 확인되었다. 중국의 선미 수직타는 2세기부터 등장하며, 서양은 12세기 코그선에 초보적인 수준의 선미 고정타가 등장하기 전에는 선미 양쪽에 노에 가까운 큰 키 두 개를 걸쳐놓는 측타(side rudder) 방식을 사용하였다. [[한선]]들도 썼던 중국의 가로활대 돛은 원래 [[인도네시아]] 군도 지역의 토착 조선업자들이 기원전에 개발한 것으로, 활대를 넣어 조종이 쉽고 역풍항해가 가능하며, 똑같이 역풍항해가 가능한 아랍식 삼각돛(라틴세일)이 순풍시에는 일반 사각돛보다 효율이 떨어지는 것과 달리 순풍시에도 효율이 좋다. 그러나 돛 자체가 무겁다보니 약한 바람이 불면 성능이 낮아지며, 때문에 동양에서도 일반 사각돛이 같이 사용되었다. 즉 능파성이나 항행성 등에서는 충분히 효율적이었다. 또한 수십개의 돛들을 하나하나 조정해야 하는 유럽식에 비해 돛이 극도로 적어 소수 인력으로 운용할 수 있고, 다루는 난이도도 낮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94px-Junk_sail_components.jpg|width=400]] 중국 돛(junk rig)의 구조를 나타낸 그림. 그러나 전통 정크선은 의외로 싸움배로서의 성능은 여러 가지로 못 미더웠다. 물론 엄청난 위용의 고대/중세의 대형 누각선들이나 인력식 차륜선은 확실히 대단했지만 원양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비단 중국 누각선뿐 만 아니라 서양 [[전열함]]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대항해시대 당시 각국의 실질적인 주력 싸움배는 죄다 [[프리깃]]함이었다. 인력 차륜선의 경우 사람의 힘으로 차륜을 움직이다보니 거친 바다에서는 안정성이 떨어지는데다 풍랑을 견뎌내야 했기 때문에 인건비가 많이 들었고, 이는 노와 돛에 비해 그다지 나을 게 없었다. 서양에서는 이미 '''고대 로마 시대부터''' 말이나 소로 수차를 돌리는 마력선이 개발되었고, 같은 원리의 배가 미국에서도 쓰인 적이 있지만, 기술적 한계는 여전해서 강에서나 좀 쓰이는 정도였다. 사실 항해성, 운용비 등을 맞추지 못하고 닥치고 덩치를 키우면 보기에 좋지 상시적으로 굴리기에 어려운 건 동서고금 공통이다. 또 원양에서도 활동하기 좋은 싸움배들은 비슷한 시기 한국이나 일본의 싸움배에 비해 특별히 좋다고는 볼 수 없었다. [[삼국사기]]에도 고구려나 신라 수군이 중국 수군에 그렇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일찍부터 강력한 화포로 무장한 고려 수군 및 [[조선 수군]], 날렵한 선체를 사용한 고속함을 운영한 일본 수군, 포르투갈 [[카락]]선들도 애먹이던 종(Djong)을 민수용이건 군용이건 기본으로 굴려대던[* 당시 포르투갈 출신 약사인 토메 피레스의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의 중국인들은 종으로 구성된 인도네시아 국가들의 해군을 상대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들이 [[광저우]]에 직접 정박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도 그럴 것이 종은 정크선 하나의 '''20배는 될 정도로 큰데다''' 함포로 무장하고 있어서, 수틀리면 한 척과 그 안에 승선한 병력만으로도 '''광저우 항구를 쑥밭 만드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다른 포르투갈인인 페르난두 피레스 드 안드라데의 기록도 이들 함선들이 만만찮음을 보여준다. 그는 드막 술탄국의 파티 우누스가 이끄는 함대가 1513년에 믈라카를 포위공격했을 때 종군했는데, 그들을 포위한 드막 함대는 30척의 종을 주력으로 약 100척이 몰려왔다고 한다. 이들 종들은 크기에서 포르투갈 [[카락]]선에 거의 밀리지 않는 300~600톤 크기였고, 그 중에서도 사령관 파티 우누스의 [[기함]]은 카락선의 '''거의 네다섯 배는 되는 사이즈였다고.''' 심지어 이들은 역청과 석회, 기름을 섞은 라피스란 도료를 피복재로 발라 놨기 때문에 포르투갈 함대가 쏜 대포 몇 방을 맞아도 끄덕도 안 했다. 그중에는 [[흘수선]]에 맞은 포탄도 있었는데, 전혀 피해를 주지 못했다. 나중에 보니 [[복합장갑]]처럼 세 겹의 외피를 갖추고 그 사이마다 크루세이도 금화 지름만한 두께로 라피스를 발라 놔서, 가장 강한 포탄도 외벽 두 겹을 벗겨내는 정도였을 뿐이지 관통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다만 이들은 주로 지역 봉쇄에 투입된 [[전열함]]같은 존재들이었기에, 이후 포르투갈은 화력을 강화하고 기동성을 살려 종을 상대했다. 이 성능에 감명받은 포르투갈 해군 제독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는 60명의 자바 목수를 고용해서 인도로 보내 선박을 수리하려고도 시도했다. 다만 이 계획은 고용된 목수들이 선상 반란을 일으켜 도망치는 바람에 이뤄지지 못했다.] 인도네시아 군도 세력들, '''3~4급[* 함포 16문 ~ 60문(...)] [[전열함]] 수준의 싸움배인 대효선(大效船)을 뽑아내던''' 베트남 수군에 비하면 동시대 중국 원양수군의 실적은 그야말로 초라한 수준이었으며, 이후 청대에도 딱히 괄목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대항해시대]] 찍던 유럽하고는 뭐 비교불가고... 화포 시대에 들어 선박들은 기존의 항해성 외에 새로운 능력을 요구받았는데, 첫째로 화포를 쏴야 하며 둘째로 포탄을 맞아야 했다. 설계단계부터 이를 고려하지 않으면 대포를 쏘니 배가 뒤집히고, 포탄 몇 발 맞으니 박살나고 등 참사가 벌어지는데, 유럽선과 맞선 비유럽선들이 자주 보인 모습이다. 정크선도 그중 하나로, 선체 자체가 본격적인 함포전을 대비하지못한 놈이었다. 오랫동안 북방 민족들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한몫했던 송나라 수군을 보자면 원나라 때 그대로 흡수되어 원 수군으로 편입되었으나 일본 정벌 때 태풍에 휘말려 거의 전부 박살났다(다만 칸이 들들 볶아대서 급하게 찍어냈음은 고려해야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고려배를 탄 쪽은 반 이상 생환했다. 또 송나라의 베트남 침공 당시에 발렸다(...) 아니, 그 전에 고려 침공 때 고려의 피난민들이 모여있던 섬 지역을 공략하려다 [[삼별초]]에게 걸려 깨지고, 심지어는 피난민들이 섬과 자신들의 배에 간이 투석기를 설치하고 '좋아 한번 붙자!'식으로 나오니 쫄아서 싸움 한번 안해보고 튀기까지 했다.(...)(정진술 저, '한국해양사 고대편', [[투석기]]항목 참조.) [[파일:external/1.bp.blogspot.com/yuanship.jpg]] 오스프리에서 고증한 원 수군. 훨씬 열악한 수준의 베트남 수군에게 발리고 있다.(...) 다만 저 그림에서 베트남 전함의 고증이 잘못되었는데, [[목선 선체의 제작방식]] 문서에 나오듯 베트남의 소형선은 '투엔 난'이라 불리는 바구니 모양이고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중인 베트남 목선도 외형이 전혀 다르다.[* 위 그림은 같은 책의 캄보디아 등 다른 동남아 국가의 소형선 그림을 돌려썼다.] 이 전투는 [[바익당 강 전투]]를 묘사한 것으로, 베트남군이 조차가 큰 강 하구 바닥에 말뚝을 박아 원 함대를 고정표적으로 만들어버린 상황이다. 그리고 자신들은 말뚝에 안 걸릴 정도로 작은 소형 보트를 타고 나와 멍청히 서 있는 원나라 함대를 격파한 것. 자세히 보면 물 위쪽으로 무언가가 삐죽삐죽 튀어나와있다. [[파일:external/www.segye.com/20100120001058_0.jpg]] [[왜구]]와 명 '''정규''' 수군의 대결을 그린 왜구도권(倭寇圖券). 왼쪽이 명군. --구분이 안간다!-- [[파일:external/www.hxlsw.com/75709040.jpg|width=500]] [[임진왜란]]당시 명군이 사용한 전투용 사선. 괜히 [[진린]]이 [[판옥선]]을 받고 싱글벙글한 게 아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Destroying_Chinese_war_junks%2C_by_E._Duncan_%281843%29.jpg|width=500]] [[아편전쟁]] 당시 터져가는 [[http://en.wikipedia.org/wiki/First_Opium_War|청나라 전투선들.]] 당시 영국의 무장 상선과의 전투 후 남은 중국 배가 29척 중 달랑 3척이었는데, 영국 배가 물러갔다고 '''승전보'''로 기록되었다고. 흠좀무. 당시 영국 기록을 보면 '석회가루를 뿌렸다' 라는데, 생석회 가루가 안구나 땀흘린 피부에 닿으면 고열을 내니 유효한 전술이긴 했다... 사거리 수백m짜리 함포전 시대란 걸 빼면. 전술교리 자체가 수십미터 거리에서 활 쏘다가 붙어서 칼질하던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전투함으로서의 발전상은 고대 및 중세의 경우 강이나 연근해에서는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으나 원양에서는 처참했고 근세로 가면 많이 뒤떨어졌다는 평가가 타당할 것이다. 물론 이는 중국이 해양 문화보다는 대륙 문화 중심인 것도 있었고, 민간 무역상/해적/화교들의 활동은 상당했다. 특히 중국의 유명한 여해적으로 치 카이([[정일수]])가 있다. 본래 매춘부였으나 유명한 해적두목 칭위와 결혼한 이후 칭위가 중국 조정에 의해 독살되자 당황하는 부하들을 모아 복수를 외치며 중국 역사상 최대의 해적세력이 되었다. 치카이는 5만이 넘는 부하들과 1,000여 척이 넘는 배를 몰고 다니며 남중국해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불패를 자랑했으며, 결국 치 카이 때문에 남중국해에서 정상적인 무역이 불가능해지자 영국/포르투갈/중국이 3국 연합함대를 구성해야 했을 정도였다. 이에 치 카이는 중국에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하는 대신 그동안 확보한 재물을 그대로 가진 채로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고 평화롭게 해산하였고, 이후 30년 간 남은 재산과 도박장 운영으로 편안하게 살다 편하게 죽었다. 다만 이 때 해적들이나 무역상들이 사용된 배도 본문에 나오는 일반적인 근세의 복선/광선/조선이었으며, 특별히 발전하거나 개량된 건 아니었다. 또한 정크선은 만드는 방법이 상당히 복잡하였다. 정크선은 배를 만들 때 쇠[[못(도구)|못]]과 [[갤리선]]과 비슷한 촉이음 방식으로 선체에 하나하나 작은 홈을 파 여기어 촉을 꽂아서 선체부품을 잇는 식으로 만들어 배를 만드는 데 공력이 많이 소모되었으며([[목선 선체의 제작방식]] 문서 참조), 여기에 비교적 얇은 선체 위에 바다벌레의 침입을 막는 나무판을 얇게 덧붙이는 갑선(甲船)식으로 만들어 충격에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조선시대 중국의 배를 도입하려다 포기한 이유가 바로 이 내구력 문제였다. [[조운선]] 문서 참조. 또한 내부구조를 유지하는 격벽 역시 수밀성을 부여한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기술적 한계상 수밀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정크선의 수밀격벽이 정말 제대로 된 수밀능력을 가졌을지에 대해 부정적인 주장도 있다. 상식적으로도 당시 선박은 동서를 막론하고 나무를 짜맞추어 배를 만든 뒤 나무 사이에 생기는 미세한 틈에다 [[타르]]를 칠하거나 기름에 반죽인 [[석회]](유회)나 기름먹인 나무껍질/천/[[솜]] 등을 끼워넣어 물을 막는 식으로 만들었기에 그 한계는 안 봐도 뻔하다. 또 격벽을 설치하는 재료인 [[나무]]와 제작/설치시간을 너무 많이 먹었다. 때문에 원 간섭기 원나라는 일본 침공 당시 실패원인 중 하나로 중국의 배가 내구력이 약하다는 접을 꼽으면서 고려에서 배를 만들면 승산이 있다고 보았을 정도. 당시 중국에서 배를 급조한 것도 한 이유로 보지만, 같은 조건에서 만들어진 고려 [[한선]]의 생존률과 중국 정크선의 생존률 차이, 그리고 원 수군으로 송나라 수군뿐만 아니라 용병으로 고용된 중국 해적들도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어렵다. [[분류:선박]][[분류:범선]][[분류:화폐의 도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