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태진(1876) (문단 편집) === 광복 후 경력 === [[8.15 광복]] 후, 정태진은 일제로부터 독립하긴 했지만 국론이 분열되고 서양의 강국의 이해 관계로 인해 남북이 분열되는 등 여전히 상황이 위태로운데 연소배들이 회를 만들어 예법을 쓸어버리고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인심을 동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평소 독서로 이름이 있는 이들도 이러한 시세를 쫓아 혹은 단체에 들어가고 혹은 돈을 납부하고 혹은 편지를 보내어 이름을 팔고 있으니 세태가 실로 문란해졌다고 보고, 이러한 현실에서 유림으로서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문을 닫고 스스로 어리석음을 지키는 것 뿐이라고 밝혔다. 정태진은 말년에 문경의 모곡에 은거했고, 1947년 5월에 친구 이성래, 김근부, 이양현 등과 함께 문경의 선유구곡을 유람하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시로 읊었다. >십년을 살다가 이렇게 한번 노니니 >선유동문 깊은 곳에 흥취 가득하다. >맑은 시내 구비구비 원두에서 흘러오고 >늙은 돌은 울툭불툭 푸른 빛이 떠돈다. >선인은 아득하니 숨은 자취 따라가며 >몇번이나 자리잡고 좋은 계책 얻었는가. >금단은 한 해가 다하도록 소식 없으니 >부끄러이 이 세상에서 백발을 탄식하네. 정태진은 때대로 나무 심기를 좋아했고, 채소밭을 가꾸었으며, 비록 산야에 궁핍하게 살았지만 오직 독서에 몰두하고 세상사와 인연을 끊었다. 그러다가 1959년 5월 21일에 노환으로 사망하니 향년 83세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정태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영주시 출신 인물]][[분류:나주 정씨(丁)]][[분류:1876년 출생]][[분류:1959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