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태진 (문단 편집) === 방언 연구 및 민족 교육 ===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한 정태진은 이때부터 [[방언]]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방언에 [[한국어]] 고유의 정체성이 있다고 여겼고, 이것을 보전하는 것이 우리 말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기고, 방언을 수집하고 우리말의 역사에 관한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수업시간 때마다 여학생들에게 “너희들끼리는 [[한국어|조선말]]만을 써야 한다. 너희들이 아름다운 조선말을 안 쓰면, 얼마 아니 가서 조선말과 민족은 이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게 된다.”라고 해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가령 그는 [[한민족]]의 국난 극복 역사를 열거하면서 [[왜군]] 장군을 껴안고 [[대동강]]에 뛰어든 [[평양]] [[기생]] [[계월향]] 등 한국 여인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일화들을 소개하며 여학생들도 독립정신을 가지고 진취적으로 살아야 함을 역설했고, [[마의태자]]를 소개하면서 "옛날 [[신라]] 때의 마의태자는 그 아버지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한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일생을 조국 부흥에 바쳤으니, 너희들도 한국이 유구한 역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마의태자처럼 조국을 생각하는 정신을 가져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일제는 [[1937년]] 3월 모든 관공서에서 [[일본어]] 사용을 강요했고 [[1938년]] 3월 <조선교육령>을 개정, 반포하여 [[1939년]]부터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 교과를 폐지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다. 정태진은 이로 인해 조선어 교육을 더이상 하지 못하고 수신(修身), 대수(代數) 같은 과목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에 반감을 품은 그는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전임위원으로 있던 정인승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영생여고보를 사직한 후 조선어학회에 가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