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태진 (문단 편집) === [[조선어학회 사건]] === 조선어학회에 가입한 정태진은 [[1941년]] 5월부터 [[한글]] 사전 편찬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당시 조선어학회는 사전 편찬을 위한 선행 사업으로 어휘의 수집, [[한글 맞춤법 통일안]], [[표준어]] 개정, [[외래어 표기법]] 제정 등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또한 한글 연구성과의 보급과 한글 교습을 통한 민족의식의 앙양을 위해 회원들을 파견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수시로 한글 강습회를 개최했고, [[1932년]] 5월부터 기관지로 <한글>을 창간, 발행했다. 이러한 조선어학회에 가입하여 전임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조선어학회 사무실에서 사전 원고를 기술하면서 어휘를 뽑아 주석을 달고 이를 카드로 정리하는 한편 회원들이 써 보낸 원고를 정리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1942년 9월 5일,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의 증인 소환 명령을 받은 그는 경찰서에 출두했다. 경찰은 그를 증인이 아닌 피의자로 다루며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들의 집단체’라는 자백을 받아내려고 숱한 추궁과 고문을 했다. 그렇게 20여 일간 고문을 받은 그는 결국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단에서 여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한 사실과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들의 집단체라는 사실을 시인했다. 이후 일제는 1942년 10월 1일부터 조선어학회 주요 인사들을 대거 체포하고 사전 편찬 원고와 수십만 장의 자료 카드를 압수했으며 뒤이어 조선어학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정태진은 홍원경찰서에 갇혀 있을 때 부친상을 당했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은 옥중시를 남겼다. >망국의 한도 서럽다하거늘 아버지 또한 돌아가시니(國破父亡事事非) >망망한 하늘 아래 어디로 가자는 말인고?(天涯無際我何歸) >한 조작 외로운 혼이 죽지 않고 남아 있어,(一片孤魂今猶在) >밤마다 꿈에 들어 남쪽으로 날아가네.(夢裡向南夜夜飛) 이후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아들 정해동이 징병 1기로 [[일본군]]에 끌려가게 되어 아버지를 면회했다. 정태진은 아들에게 "사람은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정도를 걸어야 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945년 1월 16일, 정태진은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상고를 포기하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7월 1일에 출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