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태진 (문단 편집) === 해방 후 경력 === 1945년 [[8.15 해방]] 후, 정태진은 조선어학회를 재건하여 우리말 <큰사전> 편찬을 다시 시작했고, [[연세대학교]], [[중앙대학교]], [[홍익대학교]], [[동국대학교]], 국학대학교 등 여러 대학을 돌아다니며 국어를 강의했으며, 1948년 9월 조선어학회에서 6개월 과정으로 설립한 세종 중등국어교사 양성소에서 일하며 후진 양성에 몰두했다. 그는 [[한글]]을 애용하여 자주 문화를 꽃피우려는 염원에 불타 다음의 시를 지었다. >우리의 말은 자연의 꽃이요, >우리의 글은 문화의 꽃이다. >이 말 이 글이 빛나는 날에 >아름다운 꽃향기 >쓸쓸하던 이 강산에 >새 봄을 자랑하리. 정태진은 [[미군정청]]과 [[대한민국]]으로부터 고위관료직을 제의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조선어학회에서 '조선말큰사전' 편찬 업무에 집중했다. 1946년 6월에는 <[[한자]] 안쓰기 문제>를 발간하고, 10월에는 김원표와 <중등국어독본>을, 12월에는 시집인 <아름다운 강산>을 간행했다. 또한 1947년 4월에 <고어독본>을 발간했으며, 1948년에 김병제와 함께 <조선 고어 방언사전>을 펴냈다. 1948년 3월 20일, [[일본]]의 [[오사카]] 학무국이 재일 한인을 교육하는 모든 교육기관에 조선어로 교육을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내렸다. 이에 정태진은 4월 10일 <조선중앙일보>에 논설을 게재해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말과 글은 한 민족의 피요, 생명이요, 혼이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지나간 마흔 해]] 동안 저 잔인무도한 왜적이 우리의 귀중한 말과 글을 이 땅덩이 위에서 흔적까지 없애기 위하여 온갖 독살을 부려 온 것을 생각만 하여도 치가 떨리고 몸서리가 쳐진다. (중략) 동포여! 우리가 뭉치어 우리의 아름다운 말과 글을 피로써 지킬 때는 온 것이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혼을 영원히 지키어 우리의 만대 자손에게 깨끗하게 전하여 줄 우리의 보물을, 저 강도 왜적에게 다시금 백주에 빼앗기고 짓밟히게 하지 말자! 1949년 9월 25일, 정태진은 정인승, 정열모, [[방종현]] 등과 함께 한글학회 이사로 선임되었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까지 피난을 갔고, 1952년 5월 20일 [[서울]]로 올라와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에 몰두했다. 같은 해 10월 28일, 그는 <조선말 큰사전> 4권의 지형을 떠놓았다. 그 뒤 고향인 [[경기도]] [[파주시]]에 식량을 구하러 가다가 11월 2일 군용트럭이 전복되는 바람에 현장에서 즉사했다. 향년 50세. 그의 유해는 경기도 파주시 금촌읍 금릉리에 매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정태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언어학자]][[분류:파주시 출신 인물]][[분류:나주 정씨(丁)]][[분류:1903년 출생]][[분류:1952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대한민국의 교사]][[분류:자동차 사고로 죽은 인물]][[분류:경기고등학교 출신]][[분류:연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