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통성 (문단 편집) === 군주정 === 정통성은 국가기반이 되는 중요한 무형적 자산이므로, [[전제군주제]] 체제를 채택한 국가에서 [[후계자]] 선정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자신이 권력자가 될 자격이 있음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단어가 바로 [[천명]]이다. [[요순시대]]에 있었던 고사를 토대로 형식적인 모습이더라도 새 왕조의 [[창업군주]]들은 자신이 욕심으로 권력을 [[찬탈]]한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대의명분으로 일어나 이전 왕조로부터 [[선양]]받는다는 것이라는 명분을 보이기 위해 애썼다. 특히 이전 왕조가 몇백년간 정통성을 유지했다면 이후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였더라도 새 왕조나 권력자가 이를 무시한다면 [[민심]]을 얻기 힘들어지며, [[이왕삼각|형식적으로라도 이전 왕조를 존중해주고]] 정당하게 권력을 이어받았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려했다. 반대로 정통성 있는 황제의 권위를 넘보고 전횡을 일삼은 세력들은 일순간 권력이 정점에 달했더라도 본인 또는 후대에서 파탄을 면치 못했다. 대체로 동아시아 특히 한국과 중국은 [[적장자]] 계승이 1순위 원칙이었으므로 [[임금]]의 [[정실]]의 [[장남|첫째 아들]]은 태어날때부터 '[[원자(왕족)|원자]]'라는 칭호를 받고[* 정실이 아니더라도 받은 사례가 있긴 몇몇 있긴 하다. 대체적으로 정실에게서 자식을 못보겠다 싶거나, 정치적인 이유가 있어서 일찍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선의 [[경종(조선)|경종]]은 태어나고 한 해 후에, [[사도세자]]는 아예 태어난 당일에 원자 칭호를 받았다. 사도세자의 경우 태어난 당시 영조가 40대였고 [[정성왕후|왕비]]가 멀쩡히 살아있었는데 아들이 없던지라 전자에 속한다.] [[후계자]]가 되며 어느 정도 성장하면 임금의 정식 후계자이자 대리역할까지 소화할 수 있는 '[[세자]]' 칭호를 받게 된다. 세자는 엄밀히 말해 임금은 아니지만 임금이 [[행궁]]을 떠나거나 아플 경우 직접적으로 통치에 관여하며,[* 평시에도 나이가 어느 정도 차면 [[조정#s-3|조정]]에 출근하여 왕이 일처리를 하는 모습을 보고 배우게 했다. ~~현장실습?~~ 이는 세종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이후 세조가 세종-문종의 전례에 따라 예종을 조회에 참석시켰다.] 유사시엔 [[조정#s-3|조정]]을 절반으로 나눠 임금과 동등한 권력을 부여받는 경우가 있다. 따지자면 '원자'는 단순한 후계자 개념이고 '세자'는 임금의 대리인 개념으로 보는 것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평시엔 그냥 후계일 뿐이다. 이 후계자가 임금의 [[손자]]일 경우엔 '[[세손]]'이 되며[* 참고로 세자와 세손은 공존할 수 있는데 어차피 정통성이란 개념이 있으면 더 높으면 높을수록 좋은거라 세자가 있는데 그 세자에게서 장남이 태어나면 세손 자리에 앉혔다. 이후에 왕이 죽고 자기 아버지가 왕이 되면 세자가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런 단계를 밟은 왕으로는 [[단종(조선)|단종]], [[현종(조선)|현종]], [[숙종(조선)|숙종]]이 있다. 그중에서도 단종은 [[문종(조선)|세자]]의 [[적장자]]이자 [[세종(조선)|왕]]의 적장손으로 태어나 원손 → 세손 → 세자 → 왕의 단계를 거쳐 역대 왕들 중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정통성계의 끝판왕…이었지만 [[옥좌]]를 탐했던 [[수양대군|숙부]]에 의해 왕위를 내어주고만다.] 동생일 경우엔 '세제([[弟]])'가 된다. 대표적인 세손은 조선 [[정조(조선)|정조]], 대표적인 세제는 [[영조]]다.[* 참고로 태종은 세제가 아니라 세자이다. 형 [[정종(조선)|정종]]의 [[양자(가족)|양자]]로 들어와서 왕위에 물려받았기 때문.] 그 외에도 동아시아에서는 종법 질서라고 하여 같은 혈연이라고 해도 정통성에 따라 상하구분을 명확하게 지켰다. 어느 정도냐면 [[예송논쟁]]에서도 볼 수 있듯 정통성이 어디에 있는지 논쟁을 벌였을 정도다. 유럽에서 정통성은 [[서유럽]]과 [[지중해]] 세계[* [[남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를 지배했었던 [[로마 제국]]으로부터 시작된다. 비록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고 수많은 국가들이 난립하는 시기가 길었지만 [[로마 황제]]라는 칭호만으로도 유럽의 지배자라는 정통성을 가지기 충분했기에 유럽의 왕들은 이 칭호를 얻기 위해 애썼다. 특히 [[동로마 제국]]이 살아있었던 10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이 등장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후대로 갈수록 권위가 약해지지만 로마 황제의 칭호는 유일한 정통성 있는 황제 칭호였다. 정통성이 있다 여겨진 다른 황제의 칭호도 동로마에서 인정을 해주어 정통성이 인정되었기에 로마와 연관성이 없는 황제 칭호는 '자칭'으로 취급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강한 [[국력]]과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어 사실상 유럽에서 가장 강한, 패권을 쥐고 있는 국가였지만 유럽과 떨어진 [[섬나라]]였던 만큼 '로마 황제'를 칭할 수가 없었다. 인도를 식민지로 점령하고 나서야 [[무굴 제국]]의 뒤를 이은 인도의 지배자라는 명분하에 칭제를, 그것도 정확히는 '인도의 황제'라고 칭할 수 있었다. 사실 이 방법은 꼼수라고 할 수 있는데다 식민지인 인도가 본토인 영국보다 앞서있는 것 같은 형태라 영국 내부에서도 이럴 필요가 있냐는 말이 나왔고 다른 국가들도 좋게 보지 않았다.][* 서쪽에서 [[신성 로마 제국]]으로 황제 타이틀 쟁탈전을 벌이고 있을 적에도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당연히 인정받아 정통성 있는 로마 황제였다. 후대에 학술적 구분 등을 위해 비잔티움 제국이니 하는 명칭이 붙었지만 당대 사람들은 동로마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나 동로마 제국이라 부르지 않고 그냥 로마 제국으로 보고 그렇게 인식했다. 행정상의 이유로 [[공동황제]]를 세워 로마 제국의 동쪽과 서쪽을 나누어 통치한 것이기 때문에 정통성이니 격을 따질 것이 아니었다.] [[왕권신수설]]은 유럽의 정치 상황에서 타협적으로 등장한 이념이다. 대체로 왕의 권한을 강화하기도 했지만 이를 부정한 왕도 적지 않았다. 주로 [[파문]]된 왕이 그렇다. 유럽 [[봉건제도]]는 왕의 통치력이 왕 개인 영지에만 국한되어 있는 극도로 분권화된 체제이기 때문에 국가란 사실상 반독립적인 영주 귀족과 좀 큰 영주에 불과한 왕의 불안정한 계약관계에 불과했다. 이것을 제3의 권력인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힘입어 하느님과의 관계로 대체하고 왕의 통치권을 지방영주의 영지에까지 뻗는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 이는 대체로 기존의 봉건제보다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통치 이념으로 작용하지만, 한편으로는 세습과 통치의 정당성을 영주과 왕 사이의 계약, 하느님의 관계가 아닌 가톨릭교회에 넘겨버렸기 때문에 교회와 [[교황]]이 개입되기 쉬워졌다. 이런 맹점 때문에 고대의 왕으로서 왕권신수설 비슷한 것을 주장한 왕들은 자신이 신이나 신의 아들을 겸했지만, 중세 이후의 유럽의 왕들이 자신이 하느님이라거나 하느님의 아들(즉 재림 예수)라고 자처하면 가톨릭 교리상 자동파문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질 못했다. 따라서 왕의 권위의 근원을 교회가 부정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왕이 교회의 눈치를 보게 된다는 맹점이 존재했다. 또한 절대선으로 인식되는 하느님의 규범과 행동의 해석은 세속권력이 아닌 가톨릭교회와 교회에서 운영하는 신학대학 등에서 해석하였으므로, 왕이라 할지라도 폭정을 저지르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저항할 수 있다는 논지로 시민 [[저항권]]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