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풍운동 (문단 편집) === 제2단계: 정풍 개조 단계 === 1942년 2월 초, 마오쩌둥은 <정돈당적작풍(整頓黨的作風)>과 <당팔고를 반대함(反對黨八股)>[* 여기에서 팔고라는 단어의 유래는 명, 청 시대의 과거 시험 격식인 팔고문으로, 형식주의의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다.]이라는 문건을 발표했다. 이로서 옌안의 정풍운동은 소수의 고급 간부가 참가하던 것에서 나아가 전당 각급 지도 간부와 당원이 참여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학습내용도 정치노선을 주로 연구하던 것에서 더 나아가 보편적인 사상 방법, 사업 방법을 교육하고 점검하고 투쟁하며 단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마오쩌둥은 2월 1일에 발표한 <정돈당적작풍>에서 ‘종파주의에 기운 당의 기풍(당풍), 주관주의(학풍), 그리고 당원이나 작가들이 형식주의적이고 교조주의인 문장이나 보고문에 매몰되어 있는 현상(문풍)’을 바꾸자고 호소했다. 이는 당 내부 상층부에 싹트고 있던 관료주의에 대한 경계였다. 이후 마오쩌둥은 2월 8일에 <당팔고에 반대함>을 발표해 문인들을 비판했다. 그는 중국의 지식인이 여전히 신문화운동 시기의 가치를 금과옥조처럼 받들고 있어서 새로운 혁명적 현실에 부응하는 지식인의 자세를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마오쩌둥은 정풍운동의 방침과 취지에 대해서 당내 모순의 성질과 특징에 근거하여 당내 투쟁의 역사적 경험을 서술하고 "과거를 징계하여 앞으로 삼가게 하며, 병을 치료하여 사람을 구한다."는 원칙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비판과 자아비판을 통해 사상의 오류를 바로잡는 동시에 당내 구성원들을 단결시키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 지난날의 오류에 대해서는 사정을 두지 말고 반드시 적발하여 과학적인 태도로 나쁜 점을 분석하고 비판해야 한다. 둘째, 적발하고 비판하는 목적은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 것처럼 사람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다. 마오쩌둥이 규정한 정풍 방침은 당원들이 서로 비판과 자아비판을 전개함으로서 진리를 견지하고 잘못을 바로잡아 당의 단결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1942년 2월초부터 4월 초까지 많은 문건들이 발표되었고 활발한 토론과 검증, 비판이 병행했다. 중앙연구원 문예연구소 연구원 왕스웨이(王實味)는 <들백합화(野百合花)>를 발표해 옌안 사회의 불합리함과 어두운 면을 부과시켰다. 왕스웨이에게 있어서 예술은 예술, 그 중에서도 문학의 역할은 정치가 사회제도를 개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또한 예술의 독립성을 바탕으로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봉건적 악습을 비판하여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진정한 예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들백합화를 통해 항일체제 하에 대중과의 단결이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시기에 일부 고위 간부들의 관료주의적 태도가 당과 혁명에 해를 끼친다고 보고 이에 대한 시정을 촉구하였다. 또 샤오쥔(蕭軍)은 <동지적인 사랑과 인내(同志的愛與耐)>에서 동지의 총알이 동지의 가슴을 뚫는 것을 지적하였고, 아이칭(艾靑)은 <작가를 이해하고 작가를 존중하자(了解作家尊重作家)>를 발표해 창작의 자유가 없음을 호소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1942년 3~4월 중에 <해방일보>에 '우리들의 학습을 개조하자.', '학풍, 당풍, 문풍을 정돈하자.'는 등 말을 개재하며 '문예정풍'을 개시했다. 그리고 그해 5월에는 "옌안 문예좌담회'를 개최하고 노동자, 농민, 병사를 위해 프롤레타리아 입장에 서서 세계를 개조하는 문예활동을 해야 하고 노동자, 농민, 병사들에게 봉사하고 대중 속에 들어가서 인간을 개조하는 활동을 강조했다. 특히 그는 혁명을 위한 문예, 정치에 종속되는 문예를 요구했다. 그 결과 왕스웨이, 딩링, 아이칭 등은 절대평균주의적, 부르주아적, 또는 소부르주아적 반동 사상을 가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1942년 3월 20일, 당 중앙 정치국은 해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이 중앙 정치국 주석과 서기처 주석을 겸임했고, 총학습위원회 위원장 [[류사오치]], 부위원장 [[캉성]]과 [[펑전]]이 마오쩌둥을 보좌했다. 마오쩌둥은 이 회의를 통해 중앙정치국과 서기국에 대해 지도적 권위를 확보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경쟁세력을 두 그룹으로 분류했다. 한 그룹은 왕밍과 28명의 볼셰비키, 그리고 소련에 유학을 가 외국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 마오쩌둥은 그들을 '독단주의자'라고 불렀다. 또다른 그룹은 '경험주의자'라는 낙인이 붙었는데, 류보청, 쭤취안. 런비스 등이었다. 마오쩌둥은 이 그룹에 속한 이들이 서로를 비판하고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자아비판하도록 강요했다. 그들 모두는 자신의 실수에 대한 고백과 사과문을 작성했으며 자아비판한 사람들은 나중에 자신의 고백에 따라 박해를 받았다. 이후 마오쩌둥은 총연구위원회를 통해 교정 및 숙청 작업을 단행했다. 여기서 대활약한 인물이 바로 캉성이다. 그는 위원회를 주도해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사상 교정 및 정적 숙청을 차질없이 진행했고 마오쩌둥이 선거와 임기 제한에 제한을 두지 않고 독재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이리하여 마오쩌둥은 옌안 정권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