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한론 (문단 편집) === [[기도 다카요시]] === [[1868년]]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뒤, 정부 고위직에 오른 기도는 메이지 신정부가 조선에 보낸 수교 요청이 거부당하자 '사절을 보내 그들의 무례를 묻고 그들이 만약 불복한다면 그 죄를 따져 한반도를 공격하여 세력을 신장하여야 한다'라는 주장을 하며 [[1870년]] 6월, 내각에 사절단 파견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측근이자 정한을 실행할 오무라 마스지로가 암살당하자 이 주장은 흐지부지되었다. 덧붙여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의 대표로 많이 인식되고 있으나, 실제 사이고가 정한론자였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이는 기도 다카요시 또한 마찬가지다. 외교관계 수립을 위해서 단신으로 조선을 방문하려던 사이고를 가로막은 게 기도 다카요시였기 때문이다. 기도 다카요시는1871년에는 서양 여러 나라를 순방, 내치(內治)의 긴급성을 통감하여 정한론(征韓論)에 반대. 입헌정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다만 초창기에는 스승인 [[요시다 쇼인]]의 영향을 받아 정한론을 주장하였다고 설명된다. 정한론자 문서의 내용과 정반대되는 내용. [[NHK 대하드라마]] [[야에의 벚꽃]]에서는 정한론 주창자로 [[사가현]]의 에토 신페이, [[도사]]의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들고, (일단은) 반대파로 [[사쓰마]]의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토모미]](공가), 그리고 [[조슈 번]]을 든다. 그리고 그 중간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중재역으로 있었다고 나온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당장은 외교 활동을 유지하고 단기, 급진 형태의 정한론을 반대했을 뿐 결국 다른 유신 인사와 마찬가지로 정한론 자체에는 찬성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