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한론 (문단 편집) == 평가 == 일본이 정한론을 행동으로 옮길 때 내세운 명분으로는, 왕정 복고 이후 메이지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받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조선 정부가 자신들과 수교를 거부한 데 대한 분노가 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덴노가 권력을 되찾은 뒤 보내온 외교 문서에 덴노라고 찍혀 있었는데 당시 조선은 역대 막부의 [[쇼군]]들을 일본 국왕으로 보고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공식 서한이 이전 형식과 다르게 불손하다는 사유로 메이지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장의 골자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일본 내부에서 일어난 정변과 이웃 나라인 조선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조선이 일본과 통상 관계를 맺고 안 맺고는 조선이 결정해야했다고 본다. 정변이 일어나 외교 형식 등이 바뀌었다면 이를 알리고 합의하는 것은 근대식 조약에도 적용되는 외교 관례인데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강압적인 입장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정한론은 그 시기와 방법에는 차이가 있지만 일본의 주요 요인들이 모두 동감한 주장이었으며, 이 이론의 실천을 위해 억지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서 조선을 강제 개항한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된다. 이로서 조선은 멸망의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셈이 되었다. 일본은 조선에 관심을 가진 [[청나라]]와 [[청일전쟁]]을, [[러시아 제국]]과 [[러일전쟁]]을 벌여 승리해 걸림돌을 없앤 후, [[경술국치]]를 일으켜서 조선을 병합한다. 이와 같은 팽창주의는 점점 확대되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이런 대외적 행보는 미국과의 마찰을 일으키며, 일본 제국주의 몰락의 시발점인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 이렇게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으로 정한론이 여러 국가 요인에서 계속하여 주장되고 이를 실천하려고 한 것은 막부 말기에는 서양 세력이 침공하기 전에 일본을 키우겠다는 이야기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당시 일본은 서구의 불평등 조약으로 인한 자국의 손실을 조선과 청나라 등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유리한 조약과 관계를 맺어 벌충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였다. 일본은 청나라와 국교를 맺을때에도 대등하게 맺기 보다는 일본에 최혜국 대우를 요구 하는 등 자국에 유리한 불평등한 조약을 맺고자 하기도 하였다. [[운요호 사건]]은 조선이 철저하게 서구식 외교 관계를 거부하자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일본 내부 사정 때문이다. 즉 당대 [[제국주의]]를 충실하게 실천한 것. 메이지 6년에 일어난 정변에서 정한론은 겉으로 내세운 주장일 뿐 실은 [[조슈 번]] 출신과 비 조슈 번 출신들이 벌인 권력 다툼이라는 시각도 있다. 때문에 평소 스승인 요시다 쇼인의 제자로서 정한론을 주장한 기도가 정한에 반대하고, 정한론에 부정적이었던 사이고가 정한에 찬성하는 괴이한 사태가 일어난 것. 결국 메이지 6년에 일어난 정변에서 조슈 번 출신들이 승리를 거두었고 그들은 위에 설명했듯이 정한론에 따라 조선을 침략하지 아니하였다. 근본적으로 한국측에서 '정한'이란 글자만 보고 에도 막부 말기-메이지 초기의 정한론의 사상적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성향이 있는데, 막상 실제 일제의 조선 침략과 병탄은 정한론자들이 주장한 것과 반대의 구상으로 이루어졌다. 정한론자들이 원한 건 이토나 하야시 곤스케 같은 메이지 관료 일각이 주장한 수조권, 외교권 등을 하나씩 뺏어오다가 마침내 국권을 강탈하는 장기적인 침투방식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처럼 일본군 수십만이 쳐들어가서 땅을 뺏고 실업자가 된 하급 사무라이들한테 주는 대규모 공개적 침략이었다. 애초에 정한론자들 주장의 핵심은 메이지 유신 이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일본 내부의 사회적 불만과 불안을 외부 침략으로 해소하자는 내수용 메세지지, 조선 그 자체가 핵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 참살에서부터 남한 대토벌까지 특히 당한 우리 한국인들 입장에선 일제의 침략이 뭐가 '평화로운 방법'이었냐 싶겠지만 실제로 조선 식민화 과정에서 일본이 조선 반도에서 직접적으로 벌인 군사 작전들의 스케일은 무슨 일본 내부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겠다니 이런 소리는 코웃음 나올만큼 소규모의 제한적 작전들이었다. 조선 식민화 이후로도 식민지 조선은 일본 사회의 모순의 해결은 개뿔 당장 수탈도 똑바로 못해서 일제가 조선 경영하면서 진짜 돈 벌고 수익 올린건 극히 일부의 지주, 사업체였지, 일본 나라 전체로나 조선 정착 일본인들 개인으로 보나 전자한테 조선 식민지 경영은 내내 적자 나오는 밑지는 장사였고, 후자는 대부분 쪽박만 차고 조선인들 멸시하면서 생기는 얄량한 차별의식 말곤 크게 성공한 경우도 거의 없었다. 결국 이러다보니 일제가 조선에서 제대로 쥐어짤 수 있는 이득이란 경제적인 면은 없고[* 이걸 일찌감치 간파하고 그냥 식민지 싹 다 독립시켜서 우호 관계 수립하고 (한국이야 불가능하겠지만) 이를 기반으로 무역 국가로서 성공하자고 주장한 게 [[이시바시 단잔]]. 하지만 다이쇼 데모크라시에서조차 씨알도 안 먹혔고 먼 훗날 일제 패망 후 총리로 취임하지만 이번에는 미국의 일본 길들이기에 반발하다 한 번, 자민당 체제에서 중국과의 무역 재개를 추진하다 또 한 번 밀려났다. 두 번째 사임은 지병이었다고 하지만... 정작 그의 주치의는 사임 직전 '원인 불명의 갑작스러운 병세 악화'가 있었다고 회고했으니...], 일제의 조선 통치는 당장 총독부 위치부터 [[조선신궁]]엔 조선관련 신화를 통합하려는 시도도 안하는 등 유독 정신적, 문화적 모멸감을 주는데 치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제의 조선 침략 과정을 주도한건 정한론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사이고 같은 정한론자들 뜯어말리면서 영국, 프랑스, 미국 눈치 보느라 바빴던 조슈번 출신 메이지 관료들이었고, 이들이 청일전쟁, 러일전쟁, 삼국간섭 같은 험란한 외교적 장벽을 뚫고 드디어 조선을 마음대로 요리할 위치에 도달한 1900년대 초반쯤 되면 막부말, 토막혁명 시절의 정한론자들은 이미 사이고는 죽고 정계에서 나가리된지 오래였다. '정한'자체는 이루어졌어도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비전이나 의견은 하나도 반영 안되고 오히려 철저히 정치적으로 쩌리가 된 토막혁명 시기, 메이지 정권 초기의 정한론자들은 결국 그 과격성이 더 자극받아서 대륙낭인 같은 다이쇼-쇼와시기 일본 제국주의, 관외 극우의 첨병이 되거나[* 미야자키 토텐, 그리고 우치다 료헤이의 겐요사] 이 시기 일본 특유의 좌우파를 초월한 지사 문화를 타서 그 와중 오히려 정신차린 소수는 메이지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일찍 통찰하고 나중엔 (당시 기준으로) 극좌 운동권 등 야권세력까지 흘러가는 경우도 있었다.[* 나카에 조민, 그리고 그의 제자이자 일본 공산주의 겸 아나키즘의 시조 고토쿠 슈스이] 이렇게 1880-1900년대 정한론세력의 정치적 좌절을 이해하지 못하고선 훗날 왜 겉보기에 일본은 조선과 대만도 집어먹고, 1차대전에서도 승전국 꼽사리에 끼고, 만주까지 처들어가면서 안그래도 알아서 잘 팽창주의적 폭주의 길을 걷고 있는데 일본 내부의 관외 극우세력은 이것도 부족해서 자국 민간 정치인들더러 유약하다면서 암살, 테러하며 결국 나라 전체를 폭주하게 만들었는지 이해가 불가능해진다. 이렇기 때문에 19세기 말의 일본 내부의 정한론 세력을 일본의 팽창주의 전반과 동치하는 건 잘못된 사실 관계인 것이다. [각주] [[분류:에도 시대]][[분류:메이지 시대]][[분류:제국주의]][[분류:조일관계]][[분류:한일관계]][[분류:혐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