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화(명나라) (문단 편집) == 생애 == 본래 [[성씨]]는 [[마(성씨)|마(馬)씨]]다. [[정(성씨)|정]]이라는 성씨는 [[정난의 변]] 이후 [[영락제]]에게서 하사받은 성이며, [[삼보]](三寶)라는 이름도 나중에 하사받은 이름이다. 삼보라는 것은 불교적 명칭이며, 이는 정화가 [[이슬람교]]를 믿었지만,[* 정화의 해외 원정 관련한 기록이 요약된 [[명사(역사책)|명사]]의 외국전의 메카와 메디나 관련 기록을 보면[[http://contents.nahf.or.kr/item/level.do?levelId=jo.k_0024_0332_0310_0100|#1]][[http://contents.nahf.or.kr/item/level.do?levelId=jo.k_0024_0332_0310_0110|#2]] 그가 무척 독실한 무슬림이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인도를 [[천축국]]이라고 높여 부른 것 비슷하게, 메카를 천방(天方), [[천당]](天堂)이라고 기록하였다.] 다른 종교에도 관용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난 [[몽골 제국]] [[다루가치]]에게서 이어진 [[후이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즉, 정화는 [[한족]]이 아니라 [[색목인]]이다. 성인 마(馬)는 [[무슬림]]에게 흔한 이름인 '[[무함마드(동음이의어)#s-2|무함마드]]'의 음차. 원나라가 중국을 통치하며 [[윈난성|윈난]]에 파견한 [[다루가치]] 사이이드 아잘 샴숫딘 우마르(Sayyid Ajjal Shams al-Din Omar)의 후손이자 스스로도 원나라의 지방 관리였던 마합지(馬哈只)의 아들이었는데, 아버지의 합지(哈只)라는 이름은 [[메카]] 성지순례를 마친 사람에게 붙는 칭호인 '[[하지#s-2|하지]]'의 음차이다. [[쿤밍]]에는 아버지가 어린 정화에게 넓디넓은 세계를 보여주는 동상이 있다. 1368년 [[원나라]]는 한족이 주체가 된 명나라의 공세에 수도 [[베이징]]을 내주고 막북으로 쫓겨났지만, 윈난성은 아직 [[쿠빌라이]]의 손자인 양왕(몽골명 [[바자르오르미]])이 영지로 다스리고 있었다. 주원장은 [[쓰촨성]]의 [[명하]]를 멸망시킨 후, 사자를 보내 계속 항복을 권고했으나, 양왕은 사자를 죽이는 등 투항을 완강히 거부했다.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 주원장은 1381년 운남방면에 [[부우덕]]이 지휘하는 30만 대군을 투입하여 정벌을 명했다. 양왕은 이에 맞서 10만명을 동원했으며, 양측 모두 상당수 병사들이 회족이었다. 양왕의 군대는 패배하고, 양왕은 자결했으며, 원나라 잔당 고관들과 그 가족들은 자결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명나라 조정은 포로로 잡힌 양왕의 가족들을 당시 [[고려]]로 귀양보냈고, 이들은 [[제주도]]에 정착하게 된다. 양왕 가족에 대한 처분은 관대했지만, 완강한 저항에 분노한 [[명나라군]]은 포로중 성인남자는 모두 처형하고, 미성년자는 거세해 노비로 명나라 [[공신]]이나 황족에게 분배되었다.[* 명나라는 [[소수민족]]의 반란에 이런식으로 처리했다. 명나라 [[정통제]] 시절 발생한 [[묘족]]의 반란에서도, 묘족 성인 남성은 처형하고, 사내아이들은 모조리 거세해버렸다. 훗날 청나라도 이를 따라하여 [[삼번의 난]]이나 [[야쿱 벡]]의 난에서 동일하게 주모자([[오삼계]], 야쿱 벡)의 자손들을 처리했다.] 정화의 아버지인 마합지는 자결 또는 전사했고, 정화는 거세되어 훗날 [[영락제]]가 되는 연왕(燕王) 주체(朱棣)에게 분배되었다. 정화는 거세된 자답지 않게 기골이 장대했으며 (키가 9척, 허리둘레가 5척이었다고 한다), 연왕에 대해 충성심을 보였기 때문에, 이를 알아본 연왕은 그를 장수로 삼았다. [[홍무제]] 주원장은 [[내시]]들을 경계하여 환관들을 교육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정화는 운좋게도 [[난징]]에서 멀어진 [[베이징]]에서 연왕과 함께 행동했기 때문에 문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명나라 내부사정 등으로 인해 이 당시 정화의 구체적 행적은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정화가 만약 홍무제 휘하에서 장수를 했다면 꽤 공을 세웠을 것이다. 연왕은 당시 명나라의 북방 방어를 맡고 있었으며, 막북에서 호시탐탐 [[중원]] 재탈환을 노리던 북원세력과 [[나하추]]를 여러번 격파했다. 명군의 압박을 받은 나하추는 결국 투항하고, 연왕의 세력권은 [[만주]]까지 확장되었다. 이로써 연왕은 명나라 최대군벌이 된다. 이렇게 세력을 키운 연왕은 [[정난의 변]]을 일으켜 [[건문제]]에 반란을 일으켰다. 정화는 연왕의 본거지인 연경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일설에 의하면 연왕의 반란을 진압하러 진군한 50만의 관군을 1399년 연경 근처 정촌패(鄭村貝)에서 8만의 병력으로 막아낸 전투를 그가 지휘했다고 한다. 4년간의 내전 끝에 연왕이 지휘한 반란군은 명나라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켰다. 연왕은 난징을 함락한 후, [[영락제]]로 즉위했고, 정화는 공신이 되었다. 이 공적으로 그가 대승을 거둔 정촌패에서 따온 정(鄭)씨 성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와 함께 [[불교]]식 이름인 [[삼보]](三寶 혹은 三保)라는 이름도 하사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