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화(명나라) (문단 편집) == 평가 == 정화는 단순 환관으로써 궁내에서 내시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장수 노릇을 하면서 영락제를 등극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이 공으로 명나라의 [[내시부]]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환관조직|내궁감의 최고우두머리인 태감]]으로 승진하였다. 사실 이 정화의 활약은 영락제의 환관 중용과 더불어 명나라의 멸망원인의 하나가 되는 환관 세력이 성장하게 되는 단초가 되는데, 홍무제는 문맹만 환관으로 고용하고, 중책을 맡는 것을 엄금했지만, 정화의 활약 때문에 영락제 이래 명나라 황제들은 환관들을 중용하게 될 정도였다. 이후 명나라 조정에서 환관은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물론 정화는 나중에 명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는 부패한 환관들과는 무관했다. 영락제가 즉위하기 전 그는 연왕부의 환관이자 장수로써 활약했고 영락제가 즉위한 1402년 직후인 1405년에 [[정화의 대원정]]의 첫 항해를 떠난 이래 그는 이후 30년간 각각 2-3년간에 걸친 7차의 원양항해로 궁중암투에 끼어들 시간도 없었고, 육지에 있던 시간도 대부분을 항해 준비에 보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해외로 나간 덕분에 궁중정치에 엮여 해를 당하지 않고 평가가 떨어질 일이 없어 명나라를 넘어 중국사의 위대한 [[모험가]]로 호평받을 수 있었으니 매우 이득이 된 셈이다. 정화는 후세의 환관들에게 [[사기(역사책)|사기]]를 쓴 [[사마천]]과 종이를 발명한 [[채륜]] 못지않은 환관의 대영웅으로 존경받았다.[* 사실 채륜과 달리 사마천은 [[궁형]]을 받아 고자가 되었을 뿐 궁에서 시종을 한 환관은 아니다.] 그런데 정화는 조정에서 정치세력이 되는 환관들의 패거리를 만들지도 않았는데도, 명나라때 [[십상시]] 못지않게 [[사대부]]들과 치고받으며 권력을 농단하던 환관들은 정화를 일종의 비조로 보아 떠받들었다. 위에서 지적되었듯이 반환관파 사대부들인 명나라 [[동림당]]은 환관들이 자신들의 비조로 추앙하던 정화를 영 좋지 않게 보았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