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훈(농구선수) (문단 편집) === 고교-대학 시절 === '''한국농구의 미래''' '''실사판 [[윤대협]] & 성균관대의 농구버전 [[신진식|갈색폭격기]]''' 농구를 시작하기 전엔 야구선수로 [[장성호]]와 충암중에서 같이 뛰기도 했던 정훈은 개인사정으로 1년만에 야구를 포기하고 일반 학생으로 명지고에 진학했는데, 거기서 박성근 감독의 눈에 띄면서 우연히 농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명지고의 주요멤버로 2년선배 [[이정래(농구)|이정래]]-[[김기만(농구)|김기만]], 1년 선배 [[전형수]], 1년 후배 [[김동우(농구선수)|김동우]] 등이 있었다.] 농구를 늦게 시작했음에도 타고난 신체조건과 센스 덕분에 금새 팀의 주축 멤버이자 전국에 이름난 장신 유망주가 되었고, 명지고 2학년때인 1996년에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FIBA Asia U-18 대표팀에 뽑히기도 했다.[* 당시 대표팀의 주요 멤버로는 명지고선배 [[전형수]], 마산고 3학년 [[송영진(농구)|송영진]], 그리고 부산동아고 2학년 [[김주성(농구)|김주성]] 등이 있었다.] 고3이던 1997년초 박성근 감독이 갑작스레 낙생고로 이적하면서, 정훈은 박성근 감독을 따라 같은 학교의 이근석과 함께 낙생고로 전학을 가는데, 당시 중고농구연맹 규정상 전학생은 6개월간 공식대회에 출전할 수 없었고 이바람에 정훈은 1997년 상반기를 고스란히 날리게 된다. 7월 열린 종별선수권 대회부터 낙생고 소속으로 처음 출전하게된 정훈은 동기 [[이한권]], [[진경석]], 후배 전병석, 이근석 등과 함께 낙생고 돌풍을 이끌며 1997년 하반기만 뛰고도 전국대회 3관왕(종별선수권, 쌍용기,[* 정훈이 MVP에 올랐던 대회. 당시 스포츠신문에도 201cm의 장신 가드 정훈!!이라고 소개되었다;;;] 전국체전)에 오르는 엄청난 활약을 펼쳤고, 정훈을 비롯한 당시 낙생고 멤버들은 모두 농구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파일:image002.jpg]] 박성근 감독이 대학농구의 대표적 약체팀 [[성균관대학교]] 농구부의 새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최강 낙생고의 멤버들 중 정훈, [[이한권]], [[진경석]]은 박성근 감독을 따라 성균관대로 진학하는 파격적인 선택을 하였고, 팬들은 이들을 '''"낙생고 3인방"'''이라 불렀다. 1998년도 신입생 랭킹 1, 2, 3위라던 동아고 [[김주성(농구)|김주성]], 휘문고 [[김태완(농구)|김태완]], 낙생고 정훈이 모두 연고대행을 거부했다는 사실만으로 당시 농구계에 큰 뉴스거리가 되었다. [[1998 대학농구연맹전|1998 시즌]]이 개막하고, 고교최강팀의 주역 3인방이 의기투합해 대학 약체팀(성균관대)에 입학, 팀을 강호로 이끈다는 청춘만화 같은 스토리...가 펼쳐질것만 같았으나, 성인농구 무대는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정훈의 1학년 시절인 [[1998 대학농구연맹전|1998년의 대학농구]]는 [[서장훈]]과 [[현주엽]]의 졸업으로 연세대 vs. 고려대의 구도가 막 깨지면서 매 대회별로 총 5개팀(경희대, 고려대, 연세대, 중앙대, 한양대)이 우승트로피를 나눠가지면서 치고받는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고 있었고, 시즌 마지막 대회였던 [[1998 농구대잔치]]에서 신입생 [[김주성(농구)|김주성]]이 맹활약한 중앙대가 우승하며 최종 승자에 올랐다. 같은 신입생으로서 역시 엄청난 기대를 모았던 낙생고 3인방의 성균관대는 모든 대회에서 예선탈락하며 한계를 절감한 시즌이었다. 2학년때도 별반 다르지 않아, [[김주성(농구)|김주성]]-[[송영진(농구)|송영진]] 트윈타워의 중앙대가 MBC배와 1,2차연맹전, 농구대잔치까지 접수하며 [[1999 대학농구연맹전|시즌 4관왕]]에 오르는 동안 성균관대는 매대회 4강~6강 언저리만 맴돌 뿐이었다. 정훈은 팀의 에이스로서 3번부터 5번까지 전천후로 활약했지만, 중앙대와 달리 특출난 선배들이 없었던[* 4학년 가드 이흥배(180cm), 3학년 포워드 듀오 이현준(193cm)-임영훈(193cm) 정도가 활약했지만 A급이라 보기엔 부족했다.] 성균관대는 이제 겨우 2학년인 낙생고 3인방에 대한 의존도가 컸고, 결정적으로 감독들간의 역량차이로 인해 매번 결정적인 순간에 노련미 부족이 드러났다.[* 중앙대엔 노련한 가드 [[임재현(농구)|임재현]], [[황진원]] 백코트가 있었고, 연세대엔 장신가드 [[은희석]]과 명장 [[최희암]] 감독이, 고려대엔 [[전형수]]와 [[이규섭]]이 팀을 잘 리드했다. 심지어 주전 이름값이 훨씬 떨어지는 한양대에도 자주 깨졌는데, 당시 대표적인 폭력감독으로 유명했던 故 김춘수 감독이지만 나름 대학농구계에서 잔뼈가 굵은 명장이었다.] 정훈이 3학년이 되는 2000년도부터 성균관대는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면서 [[옥범준]]-김경범-진경석-정훈-이한권의 라인업은 MBC배와 대학연맹전에서 중앙대에 이어 연속 준우승을 차지하며 대학무대 2인자의 자리까지 올랐고, '''2000년 전국체전'''에서는 마침내 우승을 차지, '''성균관대 최초의 전국대회 우승''' 타이틀을 따낸다. 4학년때인 2001년, [[송영진(농구)|송영진]]의 졸업으로 중앙대 트윈타워의 한축이 무너지면서 성균관대는 마침내 '''2001 MBC배 우승'''을 차지!! 드디어 성균관대의 시대가 오는 것으로 보였....지만, 역시 4학년이 된 [[김주성(농구)|김주성]]은 더욱 업그레이드 된 상태였고, 2년전 4관왕, 1년전 3관왕을 차지했던 멤버 중 동기 [[박지현(농구)|박지현]] 하나만 남은 상황에서도 [[석명준]], 손준영 등과 함께 1,2차 연맹전을 연이어 제패하며 여전히 대학 최강팀임을 입증한 반면, 성균관대는 2차연맹전 예선전 고려대와의 경기 중 12인 엔트리에 빠졌던 [[임효성]]을 넣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며 대회 전체 몰수패를 당하는 등 부진을 겪는다. 낙생고 3인방이 마지막으로 출전한 [[2001-02 농구대잔치]]에서도 4강까지 오르지만, [[국군체육부대|상무]]와의 4강전에 무릎부상 중인 [[현주엽]] 한 명에 농락당하면서 패배, 대학 최강을 노렸던 3인방의 꿈은 아쉽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성균관대에서의 정훈은 아마농구팬들이 기대했던 장신"가드"는 결코 아니었지만, 팀내 최장신임에도 자연스러운 드리블에 백코트부터 센터까지 마크하는 전방위 수비, 그리고 화려한 드라이브인에 가끔씩 터트리는 [[슬램덩크(만화)|슬램덩크]]까지...[[윤대협]]을 연상케하는 플레이를 자주 보여주며 팬들을 열광케 했다. 당시 성균관대 박성근 감독은 유명한 3점슛 덕후였는데, 오죽했으면 골밑 돌파해서 마무리한 선수를 작전타임때 불러다 "거기서 오른쪽 비어있는 김경범(G, 181cm) 봐주면 바로 3점 찬스자네!!!"라고 일갈할 정도였다. 유연한 돌파력과 훌륭한 피딩능력을 가진 정훈은 박성근 식 농구에서 핵심적인 역할이었고[* 당시 성균관대의 공격 1옵션은 진경석의 3점슛이었다. 정훈이 득점에 나서는 건 진경석이 막히거나 부진한 경우였다.] 수비시엔 김주성을 마크하는 센터로, 공격시엔 하이포스트에서의 컨트롤타워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전천후 선수였다. 이러한 플레이는 2001 오사카 동아시안게임 예선전에서 당시 대학-상무선발팀이 왕즈즈-야오밍이 버틴 중국 성인대표팀을 격파하는데 유용하게 쓰이면서, 다시한번 아마농구팬들을 열광시켰다. [[파일:낙생고 및 성균관대 3인방.jpg|width=380]] 대학생활을 마치고 2002년 드래프트에서 정훈은 중앙대 [[김주성(농구)|김주성]]에 이어 2순위로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울산 모비스 피버스]]에 드래프트되었다.[* 드래프트 당시 감독은 [[박수교]]였는데, 시즌 종료후 성적부진으로 경질되면서 정작 루키시즌 감독은 [[최희암]]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