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7보병사단 (문단 편집) == 역사 == 1955년 3월 20일 [[강원도]] [[양구군]] 적리(훗날 21사단 구 63연대 자리)에서 육군본부 직할 [[제33보병사단|제33예비사단]]으로 창설되어 5월 7일 현 위치인 [[인천광역시]] [[부평구]]로 이전하였다. [* 인천권 지역에 대한 사실상의 지역방위사단 역할을 하는 17사단을 비롯하여 2작사 예하의 30번대의 지역방위사단들은 전방 지역에서 창설되었다가 후방의 담당 위수지역으로 부대가 옮겨진 경우가 많다. 사실은 30번대 사단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명에 따라 1955년 전후로 창설된 것들이다.] 현 위치로 이전함과 동시에 육군본부 직할에서 2군(현 2작사) 예하 [[제6군관구사령부]] 예하로 예속이 변경되었다. 이후 6관구사가 [[수도군단]]으로 개편되어 3군 예하로 편제되었다. 예하 99연대가 1975년에 [[제99보병여단]]으로 승격하였는데, 그 99여단이 지금의 [[제51보병사단]]의 전신이며, [[제52보병사단]]의 사실상 전신이기도 하다.[* 지금의 과림예비군훈련장(당시 17사단 모 연대 1대대로 추정)과 박달예비군훈련장(당시 17사단 모 연대 2대대로 추정)이 과거에는 17사단(33사단) 예하 부대 였다는 설도 있다. 또한 시흥시 무지내동과 안양시 박달동에 예하 부대가 있었고, 동작동 국립묘지와 관악산 등지에서도 훈련한 적 있다고 한다.] 아무튼 51사단 분리 신설 등으로 관할구역이 변경되기 전에는 인천권 뿐만 아니라 '''[[서울특별시]] 한강이남지역과 [[광명시]], [[안양시]], [[시흥군]], [[화성군]] 등지''' 또한 관할 위수지역으로 삼았고, 시흥군, 화성군 지역의 [[해안 경계]] 근무도 담당했다고 한다. 부대 개편 이전에는 해안경계섹터가 아산만까지 걸쳐있었다고 한다.[[http://cafe.daum.net/kvh/4Gqn/105?q=17%BB%E7%B4%DC+33%BB%E7%B4%DC|#]] 당시 부대마크는 숫자 33을 번개로 형상화한 것이다. 옛 수도권 지역 향토사단([[30사단]], [[33사단]])에서 각 1대대씩 차출하여 현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 [[제1경비단]]의 전신이 되는 수경사 직할부대로 개편된 것 고려하면, 17사단은 간접적으로는 현 [[수도방위사령부]]의 아버지라고 할 여지가 존재한다.[* 현 수방사는 6.25 전쟁 전후의 수도경비사령부, [[수도기계화보병사단|수도사단]]과는 계보가 이질적이며, [[제6군관구사령부]]의 피는 현 수도군단이 이어받고 있다.] 33사단에서 1개 대대 병력을 차출하여 수경사 33대대 → 수경사/수방사 33단으로 개편되었고, 1996년에는 33단이 30단을 사실상 흡수 통합하는 식으로 1경비단으로 개편되었으며, 수방사 [[제1경비단]]에는 17사단의 피가 흐른다고 볼 수 있다. 1975년에는 제63훈련단(현 55사단)이 창설되면서 한강 이남 수도권 지역에 대한 예비군훈련임무를 그쪽으로 인계하였다. 1976년에는 경기서부 지구에 대한 위수사령부 역할을 수도군단으로부터 인수받았는데, 그것이 사단 정문에 붙어있는 '경기서부지구 위수사령부'의 유래이다. 1980년 5.17 계엄령 당시에는 33사단 예하 101연대[* 당시에는 여의도도 연대의 관할 위수구역에 포함되었다.] 병력들이 여의도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에 출동하여 국회 개회를 저지한 흑역사가 있다. 1982년에 사단마크와 부대 번호만 지금처럼 변경되었고[* 간첩들이 33사단 경계를 뚫고 월북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제52보병사단|1984년 수방사 개편으로 관할구역이 조정되었으며]], 안양시 등 경기 남부권에 주둔하던 일부 예하부대가 인천권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같은 해에 이 부대의 예하였던 제99보병여단이 [[제51보병사단]]으로 승격되었다. 인천, 부천, 김포 지역 예비군 훈련과 인천 해안경계를 담당하던 [[제103보병여단(수도군단)]](1993년 17사단으로부터 분리[* 17사단의 상비사단으로의 전환을 완료하기 위해 인천권 향토방위임무를 103여단에 떠넘긴 것이다.])이 2007년 미추홀 제507보병여단[* 그러나 정작 여단 본부가 주둔하는 곳은 미추홀(원인천)이 아닌 [[부평|주부토]]다.]으로 17사단에 흡수(사실상 재편입)되었다.[* 103여단 연혁을 보면, 1983년 17사단 예하 171보병지단 창설 → 이듬해 507보병여단으로 승격 → 93년도 [[제103보병여단(수도군단)]]으로 새롭게 창설(17사단 해안경계대대인 102연대 2대대+101연대 2대대와 합쳐져서 창설 - 507여단장 대령에서 103여단 준장), 수도군단 예하 독립여단으로 임무 수행 → 103여단 해체 후 507여단으로 재창설, 17사단으로 배속전환순서다. 103연대가 103여단으로 바뀐 게 아니다. 103연대는 따로 있다고 한다.] 아무튼 17사단 예하 부대들이 파란만장한 개편을 거치면서 17사단을 떠나간 몇몇 부대들의 단대호들은 다른 지역방위사단들이 채갔다. [[대한민국 해군]] [[인천해역방어사령부]]와 함께 [[인천국제공항]] 경비를 담당하는 [[제3경비단]]도 이 사단의 예하에 있다. 공항 경비 외에도 인천 지역 방어 작전시 해군 인방사와 [[해병대 제2사단|제2해병사단]]과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다. 다만, 2해병사단은 유사시 17사단과 함께 육군 수도군단의 지휘를 받지만, 인방사는 해군[[제2함대(대한민국 해군)|제2함대사령부]]의 지휘하에 계속 남는다. [[제51보병사단|51사단]]의 아버지이며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 및 [[제1경비단]]의 [[제30기계화보병사단|또 다른]] 아버지.[[https://blog.naver.com/joo99416/220653885572|참고글]] 2020년 [[국방개혁]]으로 인해 12월 1일부로 예하 연대들이 [[여단]]으로 변경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