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보병사단 (문단 편집) == 역사 == [[미군정]]이 1946년 1월 15일 창립한 [[국방경비대]]는 동년 6월에 조선경비대로 명칭을 바꾸고서 1947년 12월 1일에 3개 여단을 창설하였는데 그중 '제1[[여단]]'(서울)이 1949년 5월 12일 '제1사단'으로 승격된 것이 제1보병사단의 시작이다. 초대 여단장은 중국 [[국부군]] 및 독립군 출신의 [[송호성]][* 김구가 [[장제스]]에 위탁 교육을 맡긴 조선 청년들 중 하나로 국부군에서 장교를 하고 이후 [[독립군(한국)|독립군]]에 편입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 아래 국군 창립군의 장교가 되고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였으나 이후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사건]] 진압 등에서의 책임을 물어 일본군 출신들(이응준, 채병덕 등)에 밀려 점차 요직에서 밀려났다. 그리하여 [[6.25 전쟁]] 발발 후 청년방위대 고문이었던 장흥 대령의 권유에도 피난을 가지 않다가 한강 철교를 건너지 못한 3명의 장교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에 북한에 납북되었고 대남방송을 하거나 북한에 투항한 [[국군포로]]부대인 해방사단을 지휘하기도 했으나 후에 반혁명분자로 몰려 북한 양덕의 수용소에서 죽었다. 위에 대남방송과 거꾸로 총을 돌린 것 때문에 초대 조선경비대사령관이었던 송호성은 대한민국 국군에서 사실상 병적이 말소되어 버렸다. 하지만 최근 송호성이 북한에 납북된뒤 한 대남방송 등은 자의로 한 것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어 논란이 있다.] [[준장]]이었다. 그러나 일본군 출신이 군을 장악함에 따라 [[김구]]와 가까웠던 송호성 준장이 밀려나고 1948년 2월 5일에는 [[일본육군사관학교|일본 육사]] 26기 [[이응준]] 대령이 제2대 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949년 1월 7일에 일본 육사 27기 출신의 [[김석원]][* 초대 1사단장. 김석원은 중일전쟁의 공로로 히로히토 천황에게서 공3급 훈장을 받은 일본 육사 27기 출신이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있는 인물이다. 1945년 8월 해방 당시에는 일본군 평양병사부에서 대좌로 근무하고 있었다. 말년에는 성남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대령이 3대 여단장으로 부임하였고 1949년 5월 12일에 여단이 사단으로 승격됨으로써 여단장 김석원 대령이 그대로 초대 [[사단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인 1949년 5월에는 11연대가 북한군과 개성에서 5.4 송악산 충돌([[육탄10용사]]) 국지전을 벌이게 된다. 이후 [[개성시|개성]]등을 포함하는 38선을 경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1949년 10월 1일에는 일본 육사 26기 [[유승렬]] 대령이 제4대 사단장을 맡았으며, 1950년 4월 22일에는 역시 [[만주군]] [[간도특설대]] 출신의 [[백선엽]] 대령이 제5대 사단장으로 취임하였다. [[6.25 전쟁]] 발발 이후에는 개성과 [[임진강]] 및 [[파주시|파주]]에서 방어전을 펼쳤고, 개성에서 방어전을 펼치다가 김포 및 파주로 분산 후퇴한 12연대를 제외하고 11연대 및 13연대, 증원된 5사단 15연대는 한강교 폭파이후 에는 한강을 도하하여 시흥지구방어사령부까지 후퇴하였다. 비록 한강도하철수 당시 변변한 도하장비가 없어 중화기는 모두 파기한채 시흥지구까지 철수하였지만, 이곳에서 분산된 12연대 및 타 연대병력까지 최대한 수습하고 중화기도 다시 보충받아, 사단 및 연대 건제를 유지한 채 지연전을 벌이며 [[낙동강]]까지 철수해 [[대구광역시|대구]]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여 낙동강 전선을 지켰다. [[인천 상륙작전]] 이후 10월 19일 [[평양 탈환작전]]에서 북한군들을 물리치고 [[평양시]]에 가장 먼저 입성하는 부대가 되었다. 이때 선봉에 섰던 미1군단에 소속된 부대 중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24보병사단, 1보병사단 간에 평양 선봉 입성을 위한 경쟁이 붙었다. 1보병사단에는 [[미군]] 전차부대가 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는데, 속도에 맞추기 위해 전차부대는 낮에는 이동하고 밤에는 휴식, 보병부대는 낮이나 밤이나 그냥 걸었다. 당시 미군 전차병들도 '우리는 미군이지만 지금은 1사단이다'라며 협동을 강조했고, 이후 1사단 연대들간 선봉 경쟁이 붙어 동평양(11/12연대)과 본평양(15연대) 전역을 점령한 부대가 되었다. 평양 입성 다음 날인 10월 20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 선봉 입성을 기념하여 '계속 전진하여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라'는 의미로 전진이라는 부대 명칭을 내린다. 참고로 [[제7보병사단|7사단]]도 부대 역사에 이승만 대통령의 밀명에 따라[* 이는 서울 선봉을 미 해병대에게 빼앗긴 트라우마가 있는데다 '''미군에 [[배속]]된''' 1사단이 미 1기병사단과 엎치락 뒤치락한다는 소리까지 들리자 미군과 협의 없이 국방장관에게 말한 결과이다.] 18일 오후 평양에 입성한 건 사실이지만 이것은 평양 점령이라기 보다는 평양 강행정찰에 가까운 성격이다. 실제 평양에 선봉 입성한 7사단의 부대는 8연대 9중대 하나뿐이고, 뒤따라 들어온 8연대와 3연대, 그리고 8연대를 얼떨결에 따라와 임시 배속되었던 1사단 15연대 1개 대대는 1사단의 [[전투지경선]]을 멋대로 침범해 정당성이 부족했고, 게다가 이 명령을 내린 이승만 대통령조차 1사단만 치켜세웠기에 정식 인정되지 않고 있다. 자세한 건 [[평양 탈환작전]] 참고. 이후 중공군의 개입 이후에도 사단 건제를 유지한 채 후퇴하였다가 다시 북진해서 개전 직후 방어하였던 임진강-파주 지역에 되돌아오게 된다. 이후 [[6.25 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후방 재편성 및 일부부대 전용을 제외하고는 해당진지를 고수한 채 휴전을 맞는다. 물론 그동안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밀려오는 중공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것은 다른 지역과 동일했다.[* 김만술 상사 지휘하의 국군 1개 [[소대]](11연대 6중대 2소대)가 중공군 1개 연대와 싸워서 이긴 베티고지 전투가 대표적인 예. 참고로 2소대는 24명이 전사하고 12명이 생환하였다.] [[6.25 전쟁]]에서는 개전 전에 편성된 사단이면서 줄곧 미군에 배속돼 풍부한 지원을 받으며 백선엽 장군 휘하에서 오랫동안 싸우되,[* 사실 한 부대를 계속 이끌어 나가면 예하 부대들 상황이 어떤지 잘 파악할 수 있으며, 예하 장병들도 큰 사고없이 잘 이끌어 나가면 신뢰감이 쌓이는 등 유리한 점도 있으나, 반대로 이 때문에 지휘관의 사병화가 되는 부작용 역시 있다.] 정전 때까지 사단 건제를 끝까지 유지한[* 일단 빛나는 전공의 6사단조차 [[사창리 전투]]에서 간부고 병사고 무질서하게 패주해 이 오욕을 씻기 위해 [[용문산 전투]]에서 분투했을 정도다.] 정예사단으로 평가받았으며, 미군이 항상 신뢰하는 유일한 국군 사단이었다. 당장 백선엽 사단장이 승진과 보직변경으로 물러날 때는 이미 타 사단의 사단장들은 다른 인물로 여러번 교체된 이후였다. [[자주국방네트워크]] [[신인균]] 대표는 2013년 7월 종편 [[채널A]]의 시사프로 쾌도난마에 출연하여 정전 60주년 기념특집으로 [[6.25 전쟁]]에서 가장 잘 싸운 5대 국군부대를 꼽았는데, 전진부대는 2위로 평가했다. (참고로 신인균의 뇌피셜일 뿐이다. 밀덕들은 신인균씨를 그닥 신뢰하지 않는다. 6사단을 제외하면 사실 모두 비슷비슷한 전과다. 그리고 1사단은 한국군수뇌부의 지원과 미군의 폭격, 포병지원을 아주 많이 받았다. 1사단은 백선엽장군의 PR덕에 유명해진 것도 있다. 6.25초기 방어에서 함께 고생한 6,8사단도 신녕/영천대첩으로 인천상륙작전의 발판을 마련했는데 이런 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백선엽장군의 홍보가 1사단이 유명해지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1위-육군 제6사단(청성부대. [[춘천 전투]], [[용문산 전투]] 등) * '''2위-육군 제1사단(전진부대. [[육탄10용사]], [[다부동 전투]] 등)''' * 3위-해병대(진동리 전투, 통영 상륙작전, [[인천 상륙작전]], [[도솔산 전투]] 등) * 4위-육군 제3사단(백골부대. 38선 첫 돌파, 원산 전투, [[현리 전투]][* 다만 이건 사단 전체가 와해돼 패주한 경우라 자랑거리가 아니다.] 등) * 5위-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 [[진천 전투]], [[안강-기계 전투]] 등) 참고로,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6.25 전쟁]] 초기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국군 부대로 육군의 6사단, 8사단, 1사단을 꼽았다. [[전두환]] 사단장이 재임하던 시기인 1978년에는 [[땅굴/북한#s-2.3.|제3땅굴]]을 발견하기도 했다. 도라산 바로 밑에 있기에 도라산역 관광코스로 끼어있기도 한다. 참고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작업반으로 위장한 특전사가 진입할 때 판문점을 둘러싸고 수색대대, 중대 병사들이 전투태세를 취한 채 수풀 안에 매복해있었다. 2020년 [[국방개혁]]으로 인해 12월 1일부로 예하 연대(11, 12, 15, 포병)들이 [[여단]]으로 변경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