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7보병사단 (문단 편집) == 역사 ==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20개 사단 증편 계획에 따라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병력들이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인근에 산재해 명령을 기다리던 중, 동년 [[9월 18일]] 사단 창설일에 맞춰 [[독립기갑연대|기갑연대]](현: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 3대대 11중대장 안도현 [[대위]]와 일행 [[장교]]들이 이끄는 2개 중대가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명월리까지 도보로 이동해 [[파운딩(Warhammer 40,000)|별도의 부대 창설을 한 게]] 해당 사단의 시초이다. 전군 유일의 행동실천형 명칭을 가진 부대이다. 타 부대 사람들이 27사단에 대해 '한국전쟁 때 한 번도 못 이겨서' 또는 '북한군에게 [[군기]]를 빼앗겨서' 이름을 이기자라 지었다고 놀리는 경우가 있는데 창설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사실이 아니다. 27사단은 [[6.25 전쟁]]이 끝나고 창설된 사단으로, 개전 초기 비참하게 밀려난 [[제7보병사단]]이나 [[금성 전투]] 때 깃발을 빼앗긴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의 이야기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사단명에 대한 또 하나의 낭설은 초대 [[사단장]]의 부인 이름이 '이기자' 여사님이 아니냐는 것이다. 당시 위의 이름이 매우 흔한 이름으로, 여성 이름 끝자에 '코(子)'가 붙는 것은 일본 여성들에게서 흔했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국 여성들의 경우에도 최소 1960년대까지 이러한 경향이 많이 보였다. 하지만 '사단장 부인 이름설'(?)을 크게 의식한 탓인지, 27사단 부대사에서는 초대 사단장 이름을 표기할 때 반드시 사단장 이름 옆에 괄호를 치고 부인 이름도 함께 싣는다. 다른 사단들을 찾아본 바에 따르면 거의 유일하게 이기자 부대만이 초대 사단장과 사모님의 이름과 함께 표기한다고. [[베트남 전쟁]] 당시 79[[연대(군대)|연대]] 1[[대대]]가 군사 원조단인 [[비둘기]] 부대 예하 제101경비대대로 참전하였다. 한국군사원조단 이후 건설지원단, 비둘기 부대 순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예하에 127공병대대가 있었는데 이를 경비하기 위한 부대가 제101경비대대였다.[* 군사원조단 산하에는 제1이동외과병원도 있었지만 지역도 다르고 별도로 움직였다.] 군사원조단은 사이공 인근 순환고속도로 건설등 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했기 때문에, 한국군 지원 목적의 제100 군수사령부와는 별개의 부대이다. 제101경비대대는 79연대 1대대를 모체로 하여 편성 후(장교 34명, 사병 728명) 1965년 3월 16일 사이공 북서쪽 22km 지점인 '지안'에 지휘소를 설치 했고, 이후 추가 파병 요청에 의해 6월 27일, 제27사단에서 다시 1개 중대를 편성(장교 6명, 사병 161명)하여 제101경비대대 제5중대로 증편했다. 이들은 2개 중대는 주둔지 경계, 수색작전 및 예비부대였고 2개 중대는 [[중대전술기지]] 또는 이동식 중대전술기지 형태로 움직였는데 주로 127공병대대 예하 1개 공병중대와 편조되어 건설현장 외곽경비를 담당하였다. 공병대가 사이공 외곽에 원형으로 도로(16번 동부 환상도로. 일명 따이한 고속도로)를 건설하다 보니 일정 시일마다 계속 이동하였는데 이에 따라 경비대 중대전술기지도 이동해야 했다.[* 반면 제100 군수사령부는 경비대대가 따로 없어 제103공병대대의 2개 중대는 도로 경비, 1개 중대는 탄약고 경계를 담당하였고, 추가로 병력을 빼서 지원나온 미 헬기장 경계까지 담당해야 했다.] 경우에 따라 1개 소대가 소대전술기지로 운용되기도 하였고, 1개 소대는 철수한 해병대 공병분대 대신 사이공의 대사관과 관저, 주월사이공 방송국 경비를 담당했다. 작전 지역인 지안과 라이티에우의 북베트남군 165A 연대와 지방게릴라는 도합 510명 가량으로 상호 교전으로 총 전사 48명(장교 1명)과 전상 76명(장교 5명)이라는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27사단 일부 병력이 먼저 파병되어 있는 관계로 남[[베트남]]과 [[미군]] 측에서 추가파병을 요구하자 주월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은 처음에는 27사단을 논의했지만, 한국전 참전 경력이 있는 부대를 파병해야 한다는 정부내 방침에 의해 [[제9보병사단|제9보병사단 (백마부대)]]가 2차 파병부대로 결정이 된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도 참전하였으며 78연대의 김대영 상병이 9월 25일에 강릉 교전현장에서 전사하였다. [[파일:2사-17사_해체.jpg]] 2019년 9월 [[국방개혁 2.0]]을 이 사단도 피해갈 수 없었다. 육군본부 관계자가 [[제6보병사단]]은 포천으로 이전시키고, [[제20기계화보병사단]]과 함께 해체를 기정사실화 하는 발언을 했는데, 이에 화천 주민들은 [[https://news.v.daum.net/v/20190906173129911|"마을도 해체하란 말이냐!" 는 현수막을 걸고 한 목소리를 내며 서명 운동을 벌이면서도 여타 전방지역 실무단과 함께 회의를 갖기도 했다.]] 물론 대다수 네티즌들은 [[자업자득|군인들에게 바가지 씌우던 사람들이 뭔 말이 많냐는 반응이다.]] [[국방개혁]]으로 인해 2020년 12월 1일부로 예하 연대들이 [[여단]]으로 승격되었다. 제27보병사단은 2022년 11월 30일 해체가 확정되었으며, 해체 후 예하부대들은 대부분 [[제15보병사단]]으로, 일부는 [[제7보병사단]], [[제2공병여단]], [[제2포병여단]] 등 [[제2군단]] 예하부대로 나뉘어 소속이 변경된다.해체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전평시 임무가 해제된 2022년 9월, 제27보병사단이 해체가 아닌 [[제66보병사단]]과의 통합개편이 추진되기도 했지만 비용 문제, 여러 제한사항 등으로 인해 국방부에서 승인되지 않아 66사단과의 통폐합 계획은 '''취소'''되었다. 대신 KBS 기사에 따르면 27사단의 주둔지로 [[동원사단]]인 66사단이 이동한다고 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이것도 무산된 모양이다.[[https://news.kbs.co.kr/mobile/news/view.do?ncd=561433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