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7보병사단 (문단 편집) === 2010년대 === 이 부대의 가장 큰 흑역사로는 [[2010년]] [[흑금성]]에게 작계 5027을 유출시킨 33대 27사단장 육군소장 김인동 [[장군]]이 있다. 그때는 사단장 직을 마치고 1군 사령부 참모장을 하고 있었고 이 보직 자체가 요직인 만큼 [[군단장]] 진급이 유력했다고 한다. 김인동은 이적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징역 2년을 살았다. 물론 군 연금이고 뭐고 다 잘렸으니 인과응보에 가깝다. [[2011년]] 겨울경 병사 한 명이 활동복만 입고 [[탈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초기에는 수색대로만 이루어진 추격조가 편성되었으나, 날이 밝아오면서 시간이 지체되었기에 각 부대에서 병력들을 차출해 주변을 탐색했고, 결국 탈영병은 근처 농가에서 잡혔다. 2011년 초 혹한기 훈련도중 이등병 병사 한명이 총기를 소지한채 탈영하는 사건이 있었다. 훈련중이던 부대와 헌병들의 끈질긴 추적끝에 탈영 18시간만에 춘천에서 붙잡혔다. 2011년 6월 부대 전술 훈련 중에 부대원 최모 상병이 탈영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무기와 장구류는 놓고 갔었기에 무장탈영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더 웃긴 사건이 추가적으로 발생했는데, 이 부대와 함께 훈련 중이던 같은 27사단 대항군 부대에서도 똑같이 탈영병(이모 일병)이 발생한 것이다. 아마도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 탈영병을 잡기 위해 훈련으로 대치 중인 두 부대는 즉각 훈련을 중단하고 탈영병 수색에 전념했고, 결국 탈영병 체포에 성공했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0934552|기사]] 2012년 말 포병연대 어느 예하부대에서 병사 한 명이 포상에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포병대대 특성상 포상에서 자살하는 일이 빈번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연도와 장소를 유추해볼 때 27사단 X9포병대대 X포대에서 있었던 일인 거 같다. 그리고 그 포상에서 귀신 목격담과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들이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여담으로 당시 사단장이었던 이진원 예비역 육군 소장(육사 39기)은 포상때문에 또 다시 악몽을 재현하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7사단 포병연대장 시절 예하대대에서 실종 병사 포상 발견(다행히 멀쩡했다.) 사건으로 해프닝을 겪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자살이라는 대형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결국 중장 진급에 실패하고 고향 인근[* 이진원 장군의 고향은 공주이고, [[송영무]] 국방부 장관의 고등학교 후배이다.] 부대장을 지내고 2016년 11월에 예편했다. 2012년 한여름 27사단 2XX포병대대 X포대에서 포상에서 한 병사가 목을 매달아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 후 한 달간 포상을 폐쇄하게 되었고, 모든 장병들은 정신교육 집중기간 때처럼 막사에 짱박혀있었다. [[2012년]] 9월 사단급 전술훈련 마지막날 훈련을 마치고 복귀하던 수색대대 차량이 졸음운전으로 춘천-사창리 구간 국도변 가드레일을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 사고에서 병력수송을 하던 [[K-511]] 2-1/2톤 트럭이 가드레일을 뚫고 전신주를 충돌하였는데, 그 전신주가 그대로 차량 위를 덮쳐 뒤에 타고 있던 상병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탑승자들이 부상을 입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숨진 상병은 쓰러지는 전신주에 그대로 덮쳐져 화를 면하지 못한 안타까운 상황이였다. 그런데, 이 사고가 더 안타까운 이유는 사고 상황을 접수받고 출동한 정비대대 10톤 구난차량이 긴급한 상황에서 과속을 하다 운전부주의로 사고현장 5km를 앞두고 전도되어 구난차량을 운전하던 운전관은 경상을 입었고, 선탑임무를 실시하던 차량정비관은 중상을 입어 한 달 동안 의식을 찾지 못하다가 결국 사고 발생 40일 만에 사망하였다. 이로써 이 사고로 발생한 사망자는 총 2명이 되었다. 나머지 인원은 경상 및 중상이여서 잘 회복하고 전역하였다 이 사고에서 숨진 상병은 사후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고 1계급 [[추서]]되었다. 당시 상병의 부모님이 사단에 보낸 편지가 있는데 이 내용이 '국가를 위해 희생한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와 관련하여 본인들은 어떠한 수사요청도 하지 않고 다만 아들의 희생이 귀감이 될 수 있도록 기억해달라' 정도의 내용이었다. 이 내용은 곧장 귀감사례로 선정되어 [[국방일보]]에 게재되었고, 장례도 최고 예우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단본부 내부에 해당 상병을 기리는 건물이 있다. 그러나 구난차량에서 숨진 정비관은 선탑임무 부주의에 대한 유족의 이의제기로(당시 구난차량 전도사고는 1차적 접촉사고 후에 운전관/선탑자가 지속운행가능이라고 판단하여 운행하다가 이들이 발견하지 못한 뒷바퀴 이탈로 인해 벌어진 2차사고이다. 유족 측에서는 부대에서 강제로 지속운행 지시를 하였다고 주장한다) 1계급 추서되지 못하고 중사계급으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17년]] 9월 기준으로 숨진 상병의 유족은 매년 묘지를 방문할 때마다 숨진 정비관의 묘에도 헌화를 하고있다. 여담으로 정비대대 공원에는 숨진 정비관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당시 부대입구에 설치하려고 정비대대장이 건의하였으나 사단에서는 유족의 이의제기로 인하여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금지원은 커녕 설치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대대장이 자신의 사비로 설치하였다. 이 대대장은 이후에도 원주, 춘천에서 근무하며 상급부대 지시를 무시하고 부하를 위한 부대운영을 했다. [[2013년]] 가을쯤 다른 포대에서 한창 유행하던 살인진드기에 감염되어 병사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이 병사는 서울에 있다는 큰 의무대까지 실려갔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 중순 78연대 1대대의 유격훈련 마지막 날에 인접대대(3대대)의 부대원이 탈영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당초 예정된 복귀 행군을 취소하고 이들을 탈영병 추적에 동원하기 위해 급히 예정된 루트를 수정 급속코스로 복귀행군을 하였다, 다행히도 해당 탈영병은 새벽에 신병이 확보되어 유격으로 골골대는 상황에서 탈영병을 쫓는 대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 대학에서 컴퓨터공학과, 3사관학교에서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임관 후 첫 근무지로 2008년 7월부터 2009년 10월까지 1년 4개월 동안 27사단 정보통신대대에서 근무했던 [[육군 통신장교 석면 사망사고|유호철 대위의 사망 사건]]에 대해 논란중이다. 군에서 27사단 정보통신대대,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 등 3개 부대에서 7년간 정보통신 장교로 근무하면서 군 건축물 내에서 통신선로 보수 및 설치작업을 하며 지속적으로 석면에 노출되었던 유호철 대위는 2014년 8월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2015년 1월 의병제대 후, 국방부와 소송 중이던 같은 해 3월 26일 연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유호철 대위에게는 부인과 갓 태어난 아들이 있있고, 게다가 국가유공직 및 관련하여 당사자로서 소송 증에 판결을 일주일 앞두고 사망하여 소송종료 사유로 소송까지 중지되어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하였다. 2018년 4월에 청와대 웹사이트에 유 대위의 대한 청원이 올라왔으나 30일간 총 청원자수가 20만명을 넘지 못해 청와대의 답변을 듣지 못하였다.. [[http://www.f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591|기사]] [[http://19president.pa.go.kr/petitions/182648|청와대청원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