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30기계화보병사단 (문단 편집) == 역사 == [[1955년]] 2월 20일 [[경기도]] [[포천군]]에서 창설되었다. 이후 [[안양시]] 등지로 부대를 이동하다가 현 위치인 [[고양시]]에 정착했다. 초창기에는 2군(현 [[제2작전사령부]]) 예하 [[제6군관구사령부]] 예하 지역예비사단[* 구.향토예비사단]으로, 서울 강북 및 경기 일부지역을 담당하였다. 70~80년대에 서부전선을 전담하는 전방군단인 [[제1군단]]으로 예속전환되었으나 이후 제6군단의 기동군단 개편에 따라 제6군단으로 소속이 바뀌었으나, 이 계획이 무산되어 2000년에 환원되었다. 그 사이에 서울 강북지역에 대한 위수임무는 56사단, (구)57사단으로 넘어갔다. 1968년 [[1.21 사태]] 당시 예하 92연대 병력이 [[김신조]]를 체포하는 공을 세웠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반란군이 서울 진입을 시도할 때 유일하게 수경사 관할이 아닌 30사단 관할인 [[행주대교]][* 헌병대에서 파견 인원을 보내 관할했다. 현재 행주 검문소는 30사단 해체 및 축소로 인해 철수하고 타 부대로 이관한 모양이다.]로 진입하려 했는데 보안사의 공작으로 수도 방어를 포기하고 길을 열어줬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사단장은 박희모 소장이었는데 [[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 측의 회유 공작에 넘어가 [[제1공수특전여단|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라는 최초의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식 명령을 무시해버렸다. 이 공로로 이후 박희모는 짤리지 않고 중장까지 진급해 85년 예편했다. 12.12 반란을 다룬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의 묘사를 따르면 본래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이 박희모 사단장에게 연락을 취해 행주대교를 막고 노태우의 9사단을 저지하기 위해 구파발 라인을 저지해달라고 요청한 것을 보안사의 허화평, 허화수 대령이 도청하여 박희모 소장을 회유한다. 하지만 사단장이 행주대교에 연락한다는 건 까먹은건지 박희도가 이끄는 [[제1공수특전여단]] 병력이 행주대교를 건널 때 30사단 헌병대가 바리케이드를 순순히 열어주지 않다가 1여단 병력들에게 제압당한다.] 이후 예하 90연대를 고려대학교에 진주시켜 반란군의 예비부대로 동원했다.[* [[https://www.hankyung.com/article/1996031200161|한국경제 1996.03.12]]] 1991년 10월 1일 [[보병]]사단에서 [[기계화보병]]사단으로 개편되었으며, 예하 포병여단은 전방에 배치되어 있다. 국군 최초로 자주대공포 '비호'가 배치된 방공대대가 사단 직할로 소속되어 있다. 지금도 간부들 사이에선 꿈의 부대. 기계화부대+사단급 부대라 진급 TO도 많이 나고 사령부 후문에는 [[경의중앙선]] [[화전역]]이 있으며 [[일산신도시|일산]]과 [[화정동(고양시)|화정]]이 코앞이라 교통 환경이 기가 막히다. 부대에 따라서는 행군로가 도시 외곽의 [[아파트]] 단지나 상가를 지날 때도 있다. 덕분에 [[제17보병사단]]이 꿈의 17사단이라면 30사단은 환상의 30사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예비사단이라 훈련량이 많아 정작 당사자들은 훈련 때문에 [[환장]]한다고 환장의 30사단이라 불린다. 그도 그럴 것이 30사단은 북쪽에서 서울로 향하는 핵심 길목을 지키는 기계화보병사단 중 하나다. 만약 30기보사가 널널한 부대라면 서울 방어에는 치명적인 공백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쟁 초기 북한 전차 부대를 저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서울은 [[한국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함락당할 것이다.[* 수기사도 마찬가지다. 위치상으로 보면 30사단이 서울의 북서쪽, 수기사가 북동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둘 중 하나라도 방어에 실패하면 서울까지는 다이렉트로 뚫린다.] 따라서 이런 막중한 임무를 맡은 부대를, 단지 서울과의 접근성이 높다는 이유로 널널한 부대라고 생각하는 건 모순이다. ~~애초에 북한군 '''따위'''에게 밀릴 일도 없긴 하지만~~ 1980년대 이전에는 [[서울특별시]]를 담당했던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7032500209207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7-03-25&officeId=00020&pageNo=7&printNo=13980&publishType=00020|지역예비사단이었다.]] ~~지금은 지역방위사단과 거리가 먼 기계화보병사단일 뿐...~~ [[1.21사태]] 당시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부]]와 함께 소탕작전에 나선 것도 이 때문. 그리고 1980년대 이전에는 저러한 부대특성 때문에 서울, 수도권 출신 병사에게는 선망의 부대 중 하나였다고 한다. 지금도 가끔 30사단 출신이라 말하면 빽있냐고 물어보는 어르신이 이따금씩 있다.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5480910|참고]]. 사실 이 기계화보병사단이 서울에 너무 가까이 있는 것도 한때 서울지역 지역방위사단이었던 역사와 관련 있다. 지역예비사단(30보병사단) 시절이었던 [[5.16 군사정변]] 때 33사단(지금의 [[제17보병사단]]. 당시에는 33지역예비사단)과 함께 서울로 진입한 부대였는데, 쿠데타 성사 후 30사단과 33사단에서 각각 1개 대대씩 서울에 잔류하여 그것이 수방사 30단, 33단의 뿌리가 되었고, 1996년에 그 둘이 통합하여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이 되었다. 즉 17사단과 함께 수방사의 사실상 모체 중 하나다. 1991년 10월 1일,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 [[제20기계화보병사단]]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3번째로 기계화 보병사단으로 개편되었다. 지역방위보병사단[* 구.향토방위사단] → 상비보병사단 → 기계화보병사단으로 3번 개편된 유일한 사단이다. 개편 당시 잠시 기동군단으로 전환되었던 6군단 예하로 있었다가 2000년 편제개편에 따라 [[제28보병사단]]과 자리를 맞바꿔 1군단으로 복귀했다. [[국방개혁]]에 의해 제1군단에서 [[제7기동군단]]으로 예속 전환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잔류되었다. 그러나 [[국방개혁]]에 따라 [[제20기계화보병사단|(구)제20기계화보병사단]], [[제26기계화보병사단|(구)제26기계화보병사단]]과 함께 해체되게 되었다. 하지만 11사단에 흡수되는 20사단, 8사단에 흡수되는 26사단과는 달리 단대호를 유지했다. 그러니까 제30기계화보병사단에서 '''[[제30기갑여단]]'''으로 [[https://www.sedaily.com/NewsView/1S7E2H2O9E|감축되는 것.]] 제30기갑여단 본부는 舊 90여단 자리로 이전하며 현재 30사단 사령부 부지는 사단 해체 후 [[창릉신도시]] 개발지구에 편입되어 근린생활시설([[공원]])로 재개발될 예정이다. 2022년 5월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이 되면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합참 본부]]에게 본청을 내주게 되는 [[국방시설본부]]가 구 사령부 부지로 이전할 계획있다고 한다. 하지만 해당 지역이 창릉신도시 개발 지역이라서 확정될지는 미지수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