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3보병사단 (문단 편집) == 전쟁 범죄 == 제1공화국 당시 3사단의 학살은 주로 [[부산광역시]]와 [[대구광역시]]를 비롯한 [[경상도]] 일대에서 벌어졌다. 경상도 지역은 끝까지 대한민국 정부가 사수했던 지역이었으므로 여타 지역과 달리 정부에 의한 학살이 9월까지 꾸준히 벌어졌다. 특히 원래 빨치산 토벌전을 위해 창설되었던 [[제23보병여단]](당시 연대)의 [[김종원]] 23연대장은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살해했던 것으로 악명높았다.[* 김종원은 심지어 휘하 장병들에게도 가혹행위를 일삼아 연대장직에서 해임되었으나, 낙동강 방어전 와중 이승만에 의해 경남지구 계엄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는 관할 지역 내의 3사단 헌병, 경찰 등의 치안전력 지휘권을 [[김창룡(군인)|김창룡]]이 이끌던 경남 CIC에 종속시켜 경상도 일대에서 벌어진 대학살극을 훨씬 악화시켰다.] 여타 3사단 장병들 역시 우익 정치깡패 집단인 [[서북청년단]] 출신자들이 다수 복무했기에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지나치게 잔혹하게 대응하는 경우가 여럿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 '''한국전쟁 발발 이전 경산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 1948년 5월부터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대략 2년간 오늘날의 [[경산시]] 일대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 [[여순사건]] 당시 반란을 일으킨 국군 좌익분자들과 북한의 남파간첩들이 경상도 산악지역들에 잠입하자 국군과 경찰이 동원되어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제3보병여단의 제6연대와 6연대가 개편을 거친 [[제22보병여단|22연대]]가 국군 정보국의 호림부대 및 [[경산경찰서]]와 함께 가담했다.[* 당시 6연대와 22연대는 18연대로부터 일부 인원을 보충받은 상태였다.] 이 중 학살에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호림부대였다.[* [[서북청년단]] 출신자들로 구성된 특무부대로,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령이었던 양양 일대에 잠입해 파괴공작을 벌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투적 반공성향으로 인해 [[빨치산]] 토벌전에도 자주 동원되었는데 그때마다 빨치산뿐만 아니라 민간인들 역시 부역자로 몰아 여럿 살해했다. 1949년부터는 정보국에서 3사단으로 전속되었고, 얼마 후 해체되어 3사단 수색중대와 23연대 각 중대로 분속된다.[[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476|#]][[http://dalseong.grandculture.net/dalseong/toc/GC40800466|#]]] 희생자들은 대부분 농민이었다. 확인된 희생자들은 10명이지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최소 72명 이상이 살해되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이외에도 인접한 영천 일대에서도 학살이 벌어졌다.[* 출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9년 상반기 보고서, 1기 정리위원회 종합보고서 3권] * '''[[보도연맹 학살사건]]''' 3사단 역시 한국전쟁 개전 초기 후퇴 과정에서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깊게 관여된 부대이다. * '''경북 영덕군''' 1950년 7월 8일 [[영덕군]] 일대에서 벌어졌던 보도연맹원 학살은 [[영덕경찰서]]와 함께 [[제23보병여단|23연대]]가 주도했다. 23연대는 영해면과 창수면 주민 80명을 살해했고 영덕경찰 강구지서는 지역 주민 30명을 학살했다. 영덕경찰 본청은 뫼골에서 약 160명을 살해했다.[[http://www.grandculture.net/yeongdeok/toc/GC08500379|#]] * '''경북 울진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단원인 신기철의 저서 《전쟁범죄》에 따르면 23연대는 7월 [[울진군]] 일대에서도 울진경찰서와 함께 매화 전시골에서 6명을 학살했다. * '''경북 포항시'''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포항시]]에서 벌어진 보도연맹원 학살에는 3사단 외에도 [[대한민국 해군]] 포항경비사령부, [[포항북부경찰서|포항경찰]], 그리고 [[대한청년단]]이 관여되어 있다. 3사단과 한청, 포항경찰은 포항의료원 및 고디굴, 오늘날 [[과메기]] 덕장이 있는 구룡포에서 직접 희생자들을 총살하였다. 해군은 경찰의 협조를 얻어 포항 앞바다에 주민들을 끌고 나가 총살한 후 돌을 매달아 [[수장]]했다. 특히 해군의 학살은 당시 해군참모총장 [[손원일]]의 직접적인 명령이 있었다. 희생자들의 정확한 숫자는 불명확하며 수장된 이들이 200명, 육지에서의 총살로 살해된 이들은 도합 약 290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신기철, "전쟁범죄" 151p] *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 *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사건|대구형무소 학살 사건]]''' 1950년 7월 3일부터 9일, 동년 7월 27일부터 31일까지 약 2차례에 걸쳐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학살로, [[보도연맹 학살 사건]] 및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사건]]의 일부이기도 하다. 학살이 벌어진 장소는 경산 코발트광산 외에도 대구 본리동, 칠곡군 신동재, 달성군 가창골 등이다. 3사단 [[제22보병여단|22연대]] 헌병대가 우익 민병대인 [[대한청년단]]의 조력을 받아 주도했으며 희생자는 최소 1,500명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처, 신기철, "전쟁범죄", 105p] * '''김천형무소 학살 사건''' 1950년 7월 김천형무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학살. 역시 [[보도연맹 학살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약 600명의 미성년 소년범과 좌익사범이 3사단 [[제22보병여단|22연대]] 헌병대와 김천지구 [[국군기무사령부|CIC]], [[김천경찰서]],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미군]]에 의해 구성면과 대항면에서 집단 총살당했다. 나머지 300명은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어 그곳에서 살해당했다.[* 출처, 신기철, "전쟁범죄", 103p]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