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5보병사단 (문단 편집) == 전쟁범죄 == 5사단은 한국전쟁 개전 이전부터 존재했던 [[메이커 사단|가장 오래된 부대 중 하나]]로서 건국 초와 개전 초에 벌어진 여러 학살에 다수 연관되어 있다. 여순사건 진압작전이나 개전 이전의 빨치산 토벌전 당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은 물론이며, 국군 후퇴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과 북진 과정에서 벌어진 부역자 학살 모두에 연관되어 있다. 특히 5사단 [[대한민국 국군 군사경찰|헌병대]]는 개전 초 후퇴 도중 전라도 일대에서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재소자 학살]]에 적극 가담했다. 당시 사단장은 [[이응준]]. 5사단이 전쟁 초기 사단 해체 수준의 극심한 피해를 입는 와중에도 이러한 학살이 벌어졌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다만 전체적인 빈도로 보았을 때는 각 사단들보다는 국군 방첩대(CIC)와[* 방첩대, 특무부대, 또는 보안대라 불리는 CIC는 [[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확장에 직접 개입했다. 원래 국군 정보국 제2과였으나 상급기관인 정보국과는 거의 협조하지 않았고, 곧 독립했다. 이들은 한국전쟁 내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벌어진 수많은 학살을 기획하고 또 직접 실행했으며 이승만의 정적들에 대한 정치적 테러 역시 주도했다. 특히 미군으로부터 '폭군 [[네로]]'라고도 불렸던 방첩대 사령관 [[김창룡(군인)|김창룡]]은 이승만 대통령의 전폭적인 비호를 받았기에 참모총장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대한민국 국회]]의 의원들도 방첩대가 벌이는 불법적 학살을 보고받곤 경악하여 규탄 성명을 내거나 법 개정을 통해 이들을 저지하려 시도했으나 이승만의 비호로 이들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이들의 안하무인격인 행동은 당연히 다른 군인들의 불만을 불러왔다. 일부 군인들은 1956년에 김창룡을 암살해버렸다. 그리고 1960년 [[4.19 혁명]] 당시 군은 이승만 정권의 진압 명령을 무시하면서 시민들의 편에 선다. 출처: 김득중, "한국전쟁 전후 육군 방첩대(CIC)의 조직과 활동"] 각 지역의 [[대한민국 경찰]]이 학살에 가장 깊게 관여되어 있다. * '''[[여수·순천 10.19 사건]](함양군)''' 1948년 여순 14연대 반란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제3보병여단|3연대]] 병력이[* 당시에는 7사단 예속 전, 5여단 당시의 5사단 시절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일대에서 경찰과 함께 민간인 학살을 벌였다. 마천향토지에 따르면 진압군의 방화로 인해 파괴된 가옥만 251호였으며 수동면과 백전면에서 도합 70명이 살해되었다. 단 이 중에서도 땅벌마을에서 벌어진 학살은 좌익 반란군이 저질렀으며 국군과 한국 경찰이 주도한 것이 아니다.[[http://hamyang.grandculture.net/hamyang/toc/GC07201312|#]] * '''함양 민간인 학살 사건''' 제1공화국 시절인 1949년부터 이듬해 3월까지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 위의 여순반란 당시의 학살과는 별개의 사건이지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지역 경찰과 함께 5사단 [[제3보병여단|3연대]] 3대대가 가담하였다. 희생자 약 85명.[[http://www.grandculture.net/hamyang/toc/GC07200398|#]] *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 * '''인천소년형무소 학살 사건''' 1950년 6월 29일,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시흥지구전투사령부]]에 의해 벌어진 학살. 개전 초의 혼란을 틈타 재소자들이 탈출한다는 소식을 들은 시흥사는 5사단 [[제15보병여단|15연대]] 3대대 12중대를 보냈다. 이들은 재소자들과 일대의 주민들까지 합쳐 약 700 ~ 1,000명 가량을 학살했다.[* 출처: 신기철, "전쟁범죄", 94p] *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1차)''' 1950년 7월 4일 같은 달 17일까지 전주형무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학살로, 7사단 [[제3보병여단|3연대]] 헌병대와 5사단 [[제15보병여단|15연대]] 헌병대가 주도했다. 도합 약 1,600명이 살해당했다.[* 출처: 신기철, "전쟁범죄", 100p] 주의해야 할 점은 1차 학살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2차 학살]]은 국군의 퇴각 후 전주에 들어온 [[북한군]]이 일으켰다. * '''광주형무소 학살 사건''' 1950년 7월 7일부터 같은 달 23일까지 광주형무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학살로, 5사단 [[제20기갑여단|20연대]] 헌병대가 주도했다. 광주 일대의 [[보도연맹 학살사건]]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학살에 참여했던 헌병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5사단 사단법무부에서 명령이 하달되었다고 전해진다. 광산군 불갱이고개와 지산동 골짜기에서 재소자 1,000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외 지역 주민과 보도연맹원들까지 합하면 희생자 수는 최대 약 3,000명에 달한다고 추정된다.[* 출처: 신기철, "전쟁범죄", 101p, 136p] * '''군산형무소 학살 사건''' 1950년 7월 16일, 옥녀봉 화산 일대의 군산비행장에서 군산형무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학살로, 5사단이 주도했다. 희생자는 약 200명이다. [* 출처: 신기철, "전쟁범죄", 112p] * '''목포형무소 학살 사건''' 1950년 7월 23일 목포형무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학살로, [[전남도경]]이 주도했으나 5사단 역시 가담했다. 신안군 비금면 앞바다에서 벌어졌으며 희생자 약 1,400명이 전남도경의 경비선인 금강호에 실려 바다에 [[수장]]되었다. [* 출처: 신기철, "전쟁범죄", 112p, 102p] * '''[[보도연맹 학살 사건]](전라남도)''' 5사단은 한국전쟁 초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벌어진 보도연맹원 학살에도 개입되어 있으며, 이는 상술한 광주형무소 사건처럼 형무소 재소자 학살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광주 이외에는 나주시 일대에서 1950년 7월 15일에 벌어진 학살에 20연대 헌병대가 확실하게 개입되어 있다. 희생자는 약 70명이다. 학살에는 [[나주경찰서]]가 조력했으나, 유일하게 [[남평역]] [[파출소|파출소장]]이었던 송 모 씨만은 30명 가량의 주민들을 '''[[오스카 쉰들러|5사단 몰래 풀어주어]]''' 더 큰 희생자가 나오는 것을 막았다.[* 출처: 신기철, "전쟁범죄" 137p]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