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5보병사단 (문단 편집) == 역사 == [[1948년]] 4월 29일 경기도 수색에서 제3, 4, 9연대를 기반으로 제5여단으로 창설되었다. 최초 지휘관은 김상겸 대령.[* [[러시아 제국군]]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 [[적백내전]]에 참전하였고 [[폴란드군]]에서 복무하다 전역했으며 이후 독일 [[동프로이센]]에서 농장을 운영하다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유럽을 탈출, 조선으로 귀국했다...고 알려져 건군기에 특별임관했으나, 실은 군사 경력이 전혀 없는 것으로 밝혀져 파면되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1279857|#]] ] 창설 후 여단 주둔지가 전라남도 광주로 변경 되었고, 1949년 5월 12일, 제5보병사단으로 승격되었다. 이때 제15, 20연대가 사단으로 배속되었다. 초대 사단장은 송호성 준장. 이후 1949년 7월에는 백선엽 대령이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사단은 제15연대를 전주에, 제20연대를 광주에 주둔시켜 [[빨치산]] 토벌을 주 임무로 하며 부대 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하였다. 그 후 한국전쟁 발발 전 [[제주 4.3 사건]],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사건]] 진압에 동원되었다. 이후 1950년 6월 25일에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육군본부의 소환으로 서울 용산에 올라와 북한군 남하 지연작전에 참여 하였다. 이 시점에는 백선엽이 1사단으로 옮겨가고 [[이응준]] 준장이 사단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근데 이때는 말이 지연전이지, [[축차투입|닥치는 대로 투입하라는]] [[채병덕]]의 삽질로 말미암아 예하 부대들이 사단장조차 모르는 사이 사상당했고,[*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은 전쟁 발발 소식을 듣자 5사단 예하 연대들까지 전부 쪼개서 온 전선에 축차투입 하는 바람에 사단장조차 자기 부대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파악 못했다.] 이 와중에 2개 대대로 부대 건제를 유지했던 [[제15보병연대|15연대]]는 1개 대대만 남은 1사단 13연대 재건을 위해 해채되고,[* 다만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우리가 다수인데 왜 13연대입니까"는 장병들과 이를 수렴한 연대장의 건의로 단대호가 환원되었다.] 20연대 역시 창동 - 미아리 축선 방어전을 위해 한강 이북에 투입되었다가 전멸하여 '''지휘 가능한 [[연대(군대)|연대]]들이 사실상 없어졌다.''' 그래도 남은 병력들을 긁어모아 7월 1일부터 시흥전투지구사령부 예하부대로서 지연전을 전개하며 철수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나마 있던 병력들까지 분산되어 17일에는 기어이 사단이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후 1950년 10월 8일 [[대구광역시|대구]]에 주둔 중이던 제27연대, 마산에 주둔 중인 제35연대, 부산에 주둔 중인 제36연대를 근간으로 대구에서 제5보병사단을 재창설하였고, 이 연대들이 지금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서 혹 특정한 이유로 인해 사단 및 예하부대를 방문하게 될 경우 부대 내부에 사단 역사를 써놓은 벽이 있을텐데, 보면 이 10월 8일을 사단 창설일로 적은 곳도 있다.] 다시 재창설된 5사단은 이후 수많은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그 중 36연대가 미 2사단 예속으로 치른 [[피의 능선 전투]][* 피의 능선 전투란 종군기자들이 신문에 Bloody Ridge라는 이름으로 보도하면서부터 생겨난 이름으로,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983고지·940고지·773고지에서 벌어진 전투를 일컫는 것이다. 이 고지를 탈환하기 위하여 미군 제2보병사단과 배속된 국군 5사단 36연대가 북한군 12, 24사단과 쟁탈전을 벌였고, 여기에 국군 7사단 대전차대대가 가세하는 난전 끝에 한미 양군 1개 연대 규모와, 북한군 1개 사단 규모의 사상자를 내고 한미 연합군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 전투는 6.25 전쟁 사상 단일전투에서 최대의 성과를 올린 전투로서, 당시 이 승전보를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5사단에 천하무적 사단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와 [[가칠봉 전투]][* 1951년 6월 23일 휴전회담이 제기된 이후 처음으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확보할 목적으로, 미 제19군단장이 양구 북방의 가칠봉 일대에 5사단을 투입하여 고지를 점령하게 한 작전이었다. 당시 북한군은 27사단과 12사단의 2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반격에 나섰으나, 40여 일의 치열한 격전 끝에 결국 5사단의 승리로 전투가 끝났다.]가 유명하다. 이후 5사단은 1952년 10월에 강원도 351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강원도 전선을 북방으로 밀어 올렸고, 이 전선은 지금 강원도에 그어진 휴전선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강원도 화천에 주둔했던 5사단은 [[1953년]] 3월 신편된 [[제15보병사단]]과 임무교대 후 후방인 남원에서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 투입되다 다시 전방으로 올라가 7월 [[금성 전투]]의 핵심 전투인 [[백암산 전투]]를 치른다. 이후 1954년에 강원도 철원, 1960년 경기도 포천, 1971년 경기도 양평으로 주둔지가 변경 되다가, 1977년 당시 전방을 담당하던 [[제20기계화보병사단|제20보병사단]]에서 대대장 월북사건이 터지며 서울 근처로 재배치되는 바람에 20사단과 임무를 교대하여 1978년 4월 1일 현재의 주둔지인 경기도 연천에 이르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육군 사단 특성화 계획에 따라 3개의 특화사단을 지정했는데, 이 중 제5사단이[* 나머지 두 사단은 [[제2보병사단|2사단]]과 [[제11기계화보병사단|11사단]]으로서, 2사단은 산악사단으로, 11사단은 상륙사단으로 전환됐었다.] 1968년 1월 23일부로 [[공수부대|공수사단]]으로 전환됐던 과거가 있다.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에서 공수 위탁교육을 받고 자체 공수교육대도 보유했지만 1년여 만에 다시 일반보병사단으로 회귀하였다. 2020년 [[국방개혁]]으로 인해 12월 1일부로 예하 연대들이 [[여단]]으로 변경되었다. 장기적으로는 사단 재배치에 따라 5사단이 최전방을 담당하게 될 예정이다.[* 2010년대 초 국방개혁에 따라 8사단은 기계화보병사단으로 전환되었는데, 이후 국방개혁 2.0에 따라서 수도, 20, 26사단에서 부대를 예속 받고 본래 가지고 있던 여단을 해체, 양주에 주둔하는 기동사단으로 바뀌었다. 6사단이 기존 8사단을 대신할 예비사단으로 선정되어 기존 8사단이 주둔하던 포천으로 내려가며 빈 자리는 3사단과 5사단을 재배정해서 대체한다. 5사단 서측의 28사단도 2025년 해체되는 만큼 3사단과 5사단의 작전구역이 상당히 넓어질 것이다. 기존에 2개 대대만 존재하던 GOP대대의 숫자가 늘어날 것이 명백한 상황. 사실상 35여단 산하 신병교육대는 사단직할로 재편되면서, 35여단 산하 대대도 GOP대대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