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9보병사단 (문단 편집) === 창설기 ([[6.25 전쟁]]) === [[6.25 전쟁]] 발발 뒤인 1950년 10월 25일, 28, 29, 30연대로 창설되었다. 다만 부대가 창설된 시점에 [[북한군]]은 38선 이북으로 밀려난 시점이고, 육본에서도 시작부터 뭘 기대하지 않았기에 초창기 9사단의 활동은 주로 충청-전라도 지역에 암약하는 [[빨치산]] 토벌에 집중되었다. 다만 이 신편 사단은 각 군에서 차출되거나 후송, 낙오병과 신병들을 모아 창설됐기에 서로간의 동질감도, 연대도, 사기도 낮아서 창설 초창기엔 붙었다 하면 늘 패주하기 급급했다. 그러다가 1951년 5월 7일 [[매봉·한석산 전투]]에서 [[제7보병사단|7사단]] [[제8보병여단|8연대]]와 임무교대한 30연대가 맹활약하는 등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이후 16일부터 시작된 [[현리 전투]]에서 [[제3보병사단]]과 함께 부대원 절반 이상이 전사, 실종되는 참패를 당하는 쓰라린 경험을 해야 했다.[* 당시 사단장 최석 준장이 계급장을 던져버리고 숨어버리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이 패전 자체가 한국에선 흑역사라 잘 안 알려져 있지만. 그나마 욕을 덜 먹는 게 당시 군단장이었던 유재흥 장군의 판단 미스 및 삽질 덕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1952년 [[강원도]] [[철원군]]의 395고지에서 2배가 넘는 중공군 제38군단과 12차례나 고지를 내주는 공방전을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며 명성을 떨쳤다. 이 당시 395고지는 온 산의 수목이 사라지고 고지가 1m나 낮아질 정도로 수많은 포격을 당했는데, 그 형상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것 같다고 하여 이 전투를 [[백마고지 전투]]라 부르게 되었고, 9사단 역시 백마부대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 후 실전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며[* 물론 사단 자체에 한한 것.]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부터 상승(常勝, 항상 승리) 칭호를 받았다. 참고로 초대 사단장은 장도영 준장이고 참모장은 박정희로, 장도영은 31일까지 단 6일간 재임했다.[* 장도영 [[소장(계급)|소장]]부터 6대 최석 준장까지 평균 재임기간이 2달이 채 안된다. 때문에 실질적인 부대의 운영은 참모장인 박정희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당시 인민군 10사단이 후방으로 침투하여 보급로 차단을 위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박정희의 보급관리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부임한 김종오 2대 사단장 역시 2주 남짓 재임했으나, 이것에 한이 맺혔는지 1952년 8대 사단장으로 재부임해 상술한 백마고지 전투로 본인과 사단의 명예를 드높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