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각/생애 (문단 편집) === 258년: 복권되다 === 이러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제갈각이지만 다행히도 훗날 황제 [[손휴]]가 [[손침]]을 제거하면서 복권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부하 장약을 시켜 손준이 이끌던 어림군 지휘권을 빼앗아 분노한 손준이 등윤과 모의하고 손량을 설득해 제거한 것으로 서술되었다. 정사에서 등윤은 제갈각과 친해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후에 손침에게 살해당했다. 술에 독이 들었을까 두려워 집에서 궁으로 술을 가져오게 했다는 서술은 정사와 연의 전부 같다.] 손휴는 제갈각, 등윤과 여거를 복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갈각(諸葛恪)·[[등윤]](滕胤)·[[여거]](呂據)는 죄가 없는데도 손준(峻)과 손침(綝) 형제에게 잔혹하게 살해되었으니 가슴이 아프다. 신속히 이들을 모두 이장시키고 각각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제갈각 등의 일에 연루되어 먼 곳으로 유배된 자들은 일체 불러 돌아오도록 하라." 그러나 『강표전』의 내용을 보면 [[손휴]] 또한 제갈각에 대해 껄끄럽게 생각했음이 확연하다. 제갈각이 복권된 이후, 조정의 신하들중에서 제갈각을 위해 공훈을 기리는 비석을 세워야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박사 성충은 제갈각을 위해 비석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반대했다. 이에 손휴는 말했다. >“한여름에 군대를 출동시키고 병사들을 손상시켜 척촌(尺寸)의 공도 없으므로 그에게 재능이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어린 군주를 보필하는 임무를 받고 어린아이의 손에 죽었으니 지혜롭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성충의 의견이 옳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군사를 출동시켜서 사졸들을 다치게 하고도 한 치의 공로도 세우지 못하니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탁고의 책임을 받고도 무뢰배 녀석의 손에 죽었으니, 지혜가 있다고 할 수 없다."[* 이 버전은 『자치통감』에서 서술된 발언으로 세세한 부분에서 위의 번역본과 차이가 좀 있다.] 결국 [[성충(삼국지)|성충]]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제갈각을 위한 비석이 세워지는 일은 없었다. [[분류:손오의 인물]][[분류:인물별/생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