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논란 (문단 편집) == [[권신]] 제갈량? == >장무 3년(223년) 봄, [[유비|선주]]는 영안(永安)에서 병이 깊어지자 [[청두|성도]]에 있던 [[제갈량]]을 불러 뒷일을 부탁했다. > >제갈량에게 말했다. > >“[[승상]]의 재능은 [[조비]]의 열 배에 달하니, 필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제갈량의 북벌|대업]]을 [[천하통일|완성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유선(삼국지)|내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고, 만일 그 아이가 그만한 재능이 있지 않거든 '''[[역성혁명|승상께서 성도의 주인이 되도록 하시오.]]'''” >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 >'''“신이 감히 고굉지력(股肱之力-신하로서의 헌신)을 다하고 충정지절(忠貞之節-충정의 절개)에 힘쓸 것이니, 죽기로 계속할 것입니다.”''' > >선주는 또 후주에게 조칙을 내렸다. > >'''“너는 승상과 함께 일을 처리하고 승상을 이 아비처럼 섬겨라.”''' >------ >영안탁고 >'''생각하건대 그대(제갈량)의 체자(體資-천성,품성)는 문무(文武)를 갖추고 명예(明叡-총명하고 지혜로움), 독성(篤誠-독실하고 성실함)하여, 탁고(託孤)의 유조를 받아 몸소 짐을 보필하니, 끊어진 것을 잇고 쇠미한 자를 흥하게 하며 정난(靖亂-국난을 평정함)할 뜻이 있었다. 이에 육사(六師-육군.황제의 군대)를 정돈해 정벌하지 않은 해가 없었고, 신무(神武)를 혁혁하게 빛내고 위엄을 팔황(八荒-온 천하)에 떨쳐 계한(季漢-촉한)에 큰 공을 세웠으니 이윤, 주공의 큰 공훈과 나란하도다.''' > >'''어찌 하늘이 보우하지 않아 대사가 거의 이루어지려 하는데 병을 만나 죽게 되었는가! 짐은 상심하고 설워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구나.''' 무릇 덕을 존중해 공의 순서를 세우고 행적을 기록해 시호를 명하니, 이로써 장래에 빛나게 하고 책에 기재해 불후(不朽)하게 하려 한다. 지금 사지절(使持節) 좌중랑장(左中郎將) 두경(杜瓊)을 시켜 그대에게 승상(丞相) 무향후(武鄕侯)의 인수와 '''충무후(忠武侯)'''의 시호를 내리노라. 혼령이 있으면 이 총영(寵榮-영예)에 기뻐하리라.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 >[[유선(삼국지)|유선]] 제갈량이 [[권신]]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대표적으로 [[이문열]]과 김경한.] 이들은 제갈량이 [[관우]]와 [[유봉]]을 죽게 놔둘 정도로 소극적이었으며, 유비 사후 제갈량의 권력은 이미 2대 [[황제]]인 [[유선(삼국지)|후주 유선]]보다 높다고 주장하였다.[* [[위략]]에는 유선 벤허설을 인용하면서 유선이 아는 것이 없어 정치는 제갈량에게 맡기고 제사를 자기가 맡았다고는 하나, 위략의 유선 벤허설은 '''완전히 잘못된 기사이므로 신뢰도가 없다.'''] 허나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제갈량은 그 권력이 드높았던 신하임에는 틀림없으나 '''동서고금을 통틀어 [[충신]]의 대명사'''로 평가받은 인물이란 점이다. 당장 '''황제였던 선주(유비)와 후주(유선)가 제갈량을 가장 신뢰하였다.''' 유비는 아예 제갈량에게 자신의 나라와 아들 유선을 전적으로 맡겼고, 유선은 제갈량의 죽음에 크게 슬퍼했다. 심지어 [[이막|제갈량이 죽고 그를 모욕한 신하]]가 있자, 격노하여 즉시 잡아다 처형 시켰을 정도. 유선이 사서의 기록에서 이 정도로 감정적인 반응을 보인 경우는 거의 없다. 그만큼 제갈량은 군주인 유비와 유선에게 촉망받고 신뢰받는 조정의 일꾼이었다는 소리다. 이처럼 거대한 권력을 휘둘렀다는 것만으로 그를 폄하할 수는 없다. 단순히 신하된 몸으로 큰 권력과 권한을 가졌다는 논리면 [[조선]]의 [[성웅]] [[이순신]]도 역적이 된다. 또한, [[화용도]]의 전개는 [[삼국지연의]]에 나온 창작이고, 유봉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사실과 부합하나 관우를 죽게 내버려뒀다는 것은 [[고우영 삼국지]]에서 나온 창작이며[* 그런데 재밌는 것은, "제갈량이 관우를 죽게 내버려뒀다"는 의혹은 현대에만 있던 것이 아닌 모양이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조선)]] 38년 11월 3일(1605년) 기사를 보면 "전에 향시(鄕試)로 취사(取士)할 때 ‘제갈양불구관우(諸葛亮不救關羽, 제갈량이 관우를 구하지 않다) 로 논제(論題)를 냈는데, 그때 합격한 자는 ‘제갈양이 관우를 죽이고자 하였기 때문에 구제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궤변이 이와 같았으므로 내가 예조로 하여금 삭제하게 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쉽게 말해 선조가 향시로 "왜 제갈량이 관우를 구하지 않았는가?"라는 주제로 지방직 공무원 시험을 쳤는데 거기에 합격한 사람~~위빠~~의 답이 "제갈량이 관우를 죽게 내버려둔 거다"라고 하길래 ~~촉빠~~선조가 시험 합격을 취소시켰단 얘기다.], 이를 이문열 등이 사실인 것처럼 주장하고 왜곡했다. 실제로는 제갈량이 유비군의 인사정책에 개입할 때 관우의 성정에 부합하지 않으면 걱정하고 오히려 관우를 따로 챙겨야 한다고 할 정도로 한 수 접어주는 관계였다고 봐야 한다. 사적으로는 둘이 서신을 나누면서 제갈량이 아버지뻘인 관우에게 '수염아저씨'라는 별명으로 불렀고, 관우도 제갈량이 자기를 칭찬해주는 글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매우 좋아하는 등 친분이 있었다. 또 유봉의 처리는 유비와 제갈량이 서로 논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에 대한 평가일 뿐이다. 정작 정사에서는 제갈량이 권력욕을 가졌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각에서는 제갈량이 자신의 권력욕이나 출신으로 인한 형주파와 익주파의 파벌 싸움 때문에 [[이엄]]의 실각을 자행했다고 하는데, 이엄의 경우는 '''본인이 잘못을 확실하게 저질렀고''', 이에 많은 문무백관들이 공동으로 탄핵연명장을 올려 실각하게 된 것이라 제갈량이 권력욕 때문에 이엄을 실각시켰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제갈량과 이엄 둘 다 형주 출신이라 익주파와 형주파 대립도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서진]]의 시조인 [[사마염]]이 제갈량 같은 인재를 갈망했을 정도고 당시 사마염이 제갈량을 높이 평가했던 점을 보면 당대에는 권신이라는 인상이 거의 없고 충신의 면모가 짙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백여 년 뒤 [[동진]]의 재상 [[사안(동진)|사안]] 역시 어린 황제를 잘 보필하여 끝까지 충심을 다한 인물로 제갈량을 지목했다. 또한 [[관우]]와 [[장비]]가 죽고 나서 유비가 제갈량에게 내린 벼슬을 보면 놀라운 점이 많다. 황제가 된 뒤, 승상, 녹상서사[* 제갈량에게 후사를 맡기고 복수전을 감행한 것은 다각도로 살펴볼 필요는 있다. 출병 전에 제갈량을 녹상서사에 임명하는데 전권을 주었다 풀이됨으로 '네 말 쌩까고 갈테니까 내가 지면 네 맘대로 해라'라는 제갈량을 비롯한 출정 반대파에게 내리는 일종의 정치적 거래(딜)로 볼 수 있다는 추측도 있었으나나 이것도 유비와 제갈량 사이 정치적 알력다툼이 있었다는 전제 하에야 성립하는 것인데, 둘 사이 이런 신경전이 있었다고 볼 만한 근거 자체가 없다. 애초에 저 당시 제갈량은 유비에게 저런 정치적 딜을 통해 저 정도 벼슬을 받을 정도의 힘이 있는 자가 아니었다. 다른 오래된 수하들이나 권력자들을 제치고 제갈량이 절대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 자체가 '''바로 유비가 중용했기 때문'''인데, 제갈량이 정치적 거래로 저런 벼슬을 받았다고 보는 건 앞뒤 순서가 반대로 된 해석이다.], 가절에 임명하고 장비가 죽은 뒤에는 [[사례교위]]까지 겸임하고 유언으로는 [[상국]]의 지위를 내리기까지 한다. 권력을 장악한 신하는 예로부터 많았지만 창업자가 이토록 신하에게 권력을 몰아준 적은 드물고, 그 권력을 물려받은 자가 이를 사유화하지 않고 함부로 쓰지 않은 경우는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도 극히 드물다.''' 확실히 유비/유선 - 제갈량의 관계는 단순한 군신관계는 아니었다. 유비가 죽으면서 했다는 유언도 단순히 제갈량을 최후의 순간에 시험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유선이 정말로 모자라거든 황제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수 있는 명분, 또는 이렇게 많은 권한을 받은 제갈량이 [[토사구팽|역적으로 몰릴 공산]]을 미리 제거해놓았다는 평도 있다. 그런 제갈량 역시 충심을 다해 유선을 보필했다. 벼슬과 관련하여 덧붙이자면, 정사의 유비는 인사(人事)를 굉장히 잘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입촉 이후 (모두의 예상을 깨고) 자신의 왼팔격인 장비를 제쳐두고 위연을 한중을 방어하는 책임자로 발탁하는 한편, 그 역할을 자신의 직속 사령관 정도로 제한했다. 이로 인해 위연은 유비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바치게 되면서 장비를 파서태수 및 거기장군, 사례교위로 삼아 더 높은 권한을 주었다.[* 즉 바닥에서부터 성장해 능력을 입증받은 위연에게 가장 중요한 요직 중 하나를 맡기면서, 동시에 개국공신이자 형제나 다름없던 장비에게 훨씬 높은 관직과 대접을 하면서 섭섭하지 않게 한 균형 좋은 인사였다. 유비의 정치적 감각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전적으로 믿을 수 있고 군재까지 있는 관우는 형주 측 사령관으로 삼았고, 당시 상황이 개떡같고 외교적 한계 때문에 패배하긴 했지만 형주 쪽에서 관우는 분명 뛰어난 사령관이었다. 유비는 사람을 판단하는 이목이 비상한 인물이었고, 아들뻘 밖에 안되는 권신에게 놀아날만한 역량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렇게 벼슬을 퍼준 것은 제갈량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비가 사망할 당시 촉한의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제갈량의 인물이라기보단 유비의 인물이었다. 제갈량을 비롯한 [[촉한사영]]은 모두 유비가 발탁한 인물이었으며, 위연 역시 유비의 사병 출신으로서 단계를 착실히 밟아 높은 직위까지 오른 인물이고, 제갈량보다 훨씬 고참인 조운은 말 할 것도 없다. 오히려 제갈량은 유비가 세운 촉한 황실의 명분을 더욱 확고히 세워야 자신의 권한이 강해지는 구조였다. 이 점에서 (사실상 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한 황조를 말로만 추대하고 개무시할 수 있던 조조와 완전히 상황이 달랐던 것이다. 위나라의 인물들은 조조를 보고 모였지만, 촉한의 인물들은 제갈량이 아닌 유비를 보고 모인 사람들이기 때문.[* 위연 입장에서 유비는 부곡 (쉽게 말해 일반병사에 가깝다) 따위이던 자신을 한중 방어 책임자까지 올려준 은인이고, 조운 역시 유비를 그 어렵던 시기부터 계속 섬겨온 인물이다. 갑자기 제갈량이 제위를 찬탈한다고 이런 사람들이 그를 따를 리가 있을까?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제갈량을 따르는 이유 자체가 '선제가 절대적으로 신임하던 인물이니 우리도 따르자'에 가까우니, 제갈량은 유비의 아들인 유선에게 반기를 드는 순간 대부분 힘이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만약 제갈량이 딴 마음을 먹었다면 자기만의 세력과 충신들을 길러냈겠지만, 후술하는 대로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과 사이가 친하다고 중책을 주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개성포공|법도와 상벌이 공정하여]] 진수가 따로 언급하며 극찬했을 정도였다.''' 유비는 굉장히 명민한 군주였고, 자신의 존재가 갖는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설령 무지막지한 벼슬을 내려도 제갈량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제갈량 본인 역시 딴 마음 먹지 않고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기에 유비가 그를 경계하긴 커녕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저런 유언까지 남기면서 그를 챙겨준 것이다. 근본은 극과 극이지만 일부분만 본다면 제갈량은 [[조조]]와 유사한 점이 있다. 이를테면 관직으로 보거든 조조는 무평후(武平侯), 승상(丞相), 영기주목(領冀州牧)이고 제갈량은 무향후(武鄕侯)[* 다만 이것은 사후에 받은 것이다.], 승상(丞相), 영익주목(領益州牧)이었다. 촉한은 익주 하나의 주밖에 없었으므로 한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실질적인 권한은 제갈량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제갈량은 만고의 충신으로 평가받지만 조조는 역적으로 취급받았다.''' 조조는 <술지령(述志令)>를 내려서 자신은 황위를 찬탈할 마음이 없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반면 제갈량은 그의 생전은 물론이고 후세에도 그의 '충심'을 의심하는 이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그를 '''충신의 대명사로 여겨 황실에서 배향을 진행했을 정도였다.''' 제갈량 사후에 제갈량은 권신이라며 깐 [[이막]]조차 "미필회반반지심(未必懷反叛之心)"이라 하여 옛 권신들의 예를 들어 '그런 이들이 꼭 반심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이라고 제갈량의 반심이 없었음은 인정했다. 한황실에 충성하는 그 어떤 사람도 그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위로는 제왕부터 아래로 여염의 백성들까지 그를 충성의 전범으로 본 것이다. 제갈량이 권신이면서도 충신인 이유를 기술해보자. * 첫째, 제갈량은 일찍이 [[이엄]]이 [[구석]]을 받을 것을 권하자 자신의 뜻은 조위를 멸하고 한실을 부흥시키는데 있는데 어찌 이해하지 못하느냐면서 그를 책망한 적이 있었다. 이는 한실을 완전히 부흥하기 이전까지 일체의 개인적인 특별대우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의 천명으로 이엄의 입을 막을 뿐만 아니라, 제갈량에 대해 안심하지 못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여론을 잠재웠으며 황실의 권위를 존중하였다. * 둘째, 제갈량은 친족 세력을 기르지 않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세력도 기르지 않았다. [[왕망]]의 찬탈이건, [[조위]]의 찬탈이건, 아니면 이후 [[사마씨]]의 찬탈이건 간에, 찬위 이전에 이들 권신은 모두 죽어라 자신의 친족 세력을 길렀다. 조위를 보자면 조조가 권력을 장악한 시기에 조비, 조식, 조인, 조홍, 조진, 여기에 조씨 가문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하후씨]] 집안이 있다. 조씨의 친족 세력은 조야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와 반대로 제갈량의 친족 세력은 아주 약했다. 제갈량의 아들이 비교적 어렸던 원인을 제외하고도, 더욱 중요한 것은 제갈량이 적극적으로 이런 세력을 키운 적이 없다. 제갈량의 가족은 위, 촉, 오 삼국에서 모두 [[고관대작]]을 지냈으며 자제도 아주 많았다. 그러나 제갈량은 친족 세력을 불려 자신의 세력을 키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후사가 없자 형에게서 양자 한 명을 데리고 왔을뿐이며, 그 양자인 [[제갈교]]도 솔선수범하여 나랏일을 맡다가 요절하기까지 했다. 이렇듯 제갈량의 친족은 정치적으로 다른 권신 세력에 비하면 세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제갈첨이 후일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높은 자리까지 순조롭게 승진했지만 기본적인 권력은 모두 황제 유선이 가지고 있었으며, 황제 유선의 권력 앞에 제갈첨은 침묵할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제갈첨은 유선의 사위로 황제의 인척이기까지 했으므로 근본적으로는 황제 유선의 권한과 권위 하에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실력이 안 된다.[* 예컨데 [[조조]]의 본가는 아버지 [[조숭]]부터가 엄청난 재물을 가지고 있었고 [[조홍]]은 당대 최고의 부자로 유명했다. 사마씨도 [[사마염]]이 황제가 되자 온갖 방법으로 재물을 자신의 가문에 축적시켰다. 그 와중에 [[석숭]]과 [[왕개]]의 [[돈지랄]] 일화 같은, [[국가 막장·멸망 테크]]의 전조가 보이고 있었다.] 제갈량이 죽었을 때 집안에는 뽕나무 800그루와 메마른 전답 15경이 있었는데, 그 밖에 다른 재산이 없었다. 아예 자신의 가족이 충분한 경제력을 축적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한황실을 넘보지 않았던 그의 처신이라고 할 수 있다. * 셋째, 제갈량은 인재 선발 측면에서 황실에 충성했다. 황권을 농락하는 권신이라면 그 권력의 장애는 황제에게 직접 충성하는 사람들에게서 온다. 대신들이 황제에 충성할수록 이런 월권행위는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황권을 농락하려는 권신은 충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조조는 찬위를 위하여, "재주만 있으면 등용한다(유재시거)"는 원칙을 세웠다.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나의 정부는 충신보다는 능신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나중에 사마씨는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나중 사람들이 "진소정신(晋少貞臣, 진나라에는 곧은 신하가 적다)" 하는 말을 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제갈량이 사람을 쓰는 첫번째 기준은 한실에 충성하느냐였다. 제갈량이 발탁하고 중용한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한실에 충성심이 가득하다. 그는 "고기가 물을 잃으면 죽고, 사람이 충성을 잃으면 흉하게 된다. 훌륭한 장수는 그것을 지켜 뜻을 세우고 이름을 드러낸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귀하게 대우해도 오만하지 않고, 일을 맡겨두어도 마음대로 하지 않고, 도와주어도 감추려 하지 않고, 그만두게 하여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런 까닭에 훌륭한 장수의 움직임은 마치 오염되지 않은 백옥과 같다."고 했다. 예를 들어 [[강유]]는 촉한이 이미 멸망했는데도, 여전히 복국을 생각한다. 그는 위나라의 정촉군 총사인 [[종회]]가 할거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는 것을 보고 종회에게 위나라 장수를 모두 죽이도록 권하고 그 기회를 틈타 촉한을 부흥하려 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하고 성도의 난을 부르고 말았지만, [[자치통감]]의 음주자인 호삼성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강유의 마음은 시종 한나라를 위한 것이니 천 년 동안 붉게 빛나는구나." 제갈량에게 야심이 있었다면 그가 이렇게 한황실에 충성스러운 대신을 기용했겠는가? 그것이 자신의 적을 만드는 꼴이 아닌가? * 넷째, 제갈량은 부하, 후손을 교육할 때 명리(名利)에 담백하고, 원대한 이상을 가지라고 했다. 즉, 정충보국(精忠報國)을 이야기 하였다. 제갈량은 계속하여 예의(禮儀)와 충신(忠信)을 부하들에게 강조했다. 그리고 명확하게 '충'을 촉한의 군규(軍規)에 넣었다. 부하들에게 나라를 위하여 순국할 것을 요구했다. 외인들에게 그러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후손에게도 그렇게 요구했다. 제갈량은 자신의 외조카에게 이렇게 말할 바 있다. "모름지기 뜻은 높고 멀리 세워야 한다. 선현을 본받고 정욕을 끊어라." 숭고한 이상을 추구하기를 요구한다. 아들에게 남긴 <계자서(誡子書)>를 보면, "비담박무이명지(非淡泊無以明志), 비녕정무이치원(非寧靜無以致遠)". 즉 명리에 담백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원대한 이상추구를 견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제갈량 일생의 거울이기도 하다. 황제라는 자리는 제갈량이 다다를 수 있었던 최고점이었으나 바로 제갈량은 그 점에서 '담백'하였다. 그가 추구하였던 것은 원대한 이상이다. 조위를 격멸하고 한실을 부흥시켜 천하대치(天下大治)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촉한은 위로는 장상공경에서 아래로는 보통사병까지 대부분 충성심이 강했다. [[촉한멸망전|촉한이 멸망했을 때]], 촉군의 장사들은 [[비분강개]]하여 스스로 칼을 뽑아 목숨을 거두거나 분노를 이기지 못해 칼을 땅바닥에 내려친 자들이 많았다.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 [[손자]] [[제갈상]]은 더더욱 정충보국의 모범이다. [[등애]]의 병사들이 면죽성 아래로 밀려올 때, 등애는 제갈첨에게 투항을 권하는 서신을 보낸다. 만일 그가 투항하면, 다름아닌 제갈씨 가문의 고향인 낭야의 왕으로 추천해 주겠다는 것이다. 당시 제갈첨의 형세는 전략적으로 극히 불리했다. 정예군은 전방에 묶여 있었고, 제갈첨의 수중에는 군대도 많지 않았으니 투항하는 것도 선택지가 있었다. 그러나 제갈첨은 노하여 사신을 죽이고 등애와 전투를 벌여 순국한다. 다음으로 제갈상은 원래 도망가서 목숨을 건질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부자가 국가의 중한 은혜를 입었는데, 일찍이 [[황호]]를 참하지 못하여, 나라가 기울어 패했으니,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역시 위군에게 뛰어들어 싸우다 순국한다. 이것이야말로 나라에 충성을 다한 사람이 교육해낼 수 있는 자손들인 것이다. * 다섯째, 제갈량의 수하들은 아무도 그에게 찬탈하라고 권하지 않았다. 제갈량의 심복 중에서 아무도 제갈량에게 대우를 추가하도록 권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한 번 권한 것이 바로 몇 안 되는 적대적인 인사였던 이엄이었다. 반면 [[조조]]건, [[손권]]이건, 아니면 [[유비]]이건 간에 그의 수하들은 계속하여 자신의 주군에게 권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유일한 해석으로 제갈량의 수하들은 제갈량이 찬탈할 마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제갈량에게 찬탈할 마음이 있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주로 현대인들이다. 설마 그들이 [[장완]], [[비의]], [[동윤]], [[장예]], [[강유]], [[위연]], [[양의]] 등등 제갈량과 아침, 저녁으로 함께 했던 사람들보다 제갈량의 마음을 더욱 잘 안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 여섯째, 당시에는 확실히 제갈량의 권력독점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다만 아무도 제갈량이 야심을 가졌다고 직언하지는 않았다. 더더군다나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옛날 [[주공단|주공]]은 [[유언비어]]를 두려워했다고 하였다. 즉 주공이 집권하던 시절에도 유언비어는 많이 떠돌았다. 그러나 제갈량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유언비어가 나오지 않았다. 이막이 제갈량 사후 제갈량이 "신장강병(身杖强兵), 낭고호시(狼顧虎視)" 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제갈량의 [[권신]]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그도 "미필회반반지심(未必懷反叛之心)"이라고 인정한다. 제갈량이 집권하던 동안에 정변, 반란은 거의 없었으며, 더욱이 공개적으로 반제갈량의 기치를 내건 반란 역시 한 번도 없었다. 그에 반해 [[조조]]의 집권 시기와 [[사마씨]]의 찬탈 시기 이전 [[위(삼국시대)|조위]]의 속사정을 살펴보면, 중앙정부는 내부에서 정변이 계속되었고 지방에서도 여러번 반란이 일어났었다. 결국 윗문단과 똑같은 말이다. 후대인들이 당대 사람들보다 제갈량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 일곱째, 제갈량의 정치이념이다. 제갈량은 [[권신|허군실상]](虛君實相)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출사표]]에서도 군주인 유선의 정치참여를 독려하였다. 제갈량은 정치가로서 항상 이상을 추구했다. 그의 모든 거동은 한실부흥, 천하평정에 있었다. 그래서 오로지 이를 위해 당대 촉한의 인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났던 제갈량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던 것이며, 이는 선제인 유비부터가 붕어하기 직전 제갈량에게 [[상국|전권을 실어주면서]] 비롯된 일이다. 황제였던 유비와 유선 모두 제갈량을 믿고 권력을 맡겼다는 점에서 알 수 있고, 또한 그의 주변인들과 후대인들이 인정했듯이 제갈량은 오로지 그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출사표의 그 유명한 구절인 "국궁진력 사이후이(鞠躬盡力 死而後已)"를 위해서만 권력을 사용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