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논란 (문단 편집) === 제갈량은 권신으로서 올바르지 못한가? === 제갈량에 대해 그가 권신이라고 주장하는 글에서는 그가 칭고(稱孤)를 했다고 하여 참람된 발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후한말-삼국시대의 호칭 문화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것으로 [[조조]], [[원소(삼국지)|원소]], [[원술]], [[유비]], [[손책]], [[손권]], [[사마의]], [[사마소]] 등의 제후급 직책을 받은 인물들은 자신을 칭할때 고(孤)의 명칭을 썼다. 심지어 일개 태수인 [[화흠]]도 스스로를 '고'라고 칭했다.(우번전) >[[우번]]: 가만이 듣자하니 명부(상대를 높이는 말)와 더불어 왕부군(회계태수였던 왕랑을 뜻함)은 중주에서 이름 나 있어서 나라 안에서 으뜸으로 여겼으며, (저는) 비록 동쪽 변방에 있지만 항상 우러러보았습니다. >화흠: 나(孤)는 왕회계에 비할바가 못 되오. >우번: 살펴보지 않았지만 예장의 정병들이, 회계와 비교하여 어떠합니까? >화흠: 비교할 바가 못 되오. 이 문장은 우번이 예장태수로 있던 화흠을 투항시키기 위해서 나온 문답 중 일부로 즉 나(孤, 화흠)이 왕회계(회계태수 왕랑)보다 못하다는 용례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독립군벌도 아니고, 조정에서 임명되어 내려온 태수조차도 고(孤)를 쓴다는 것이다. >유우: 경이 어찌 감히 이 같은 말을 꺼내시오! 충효의 도(道)를 다 이루지도 못했소. (더구나) 나(孤)는 나라의 은혜를 받은 몸으로 천하가 요란하여 아직 목숨을 다해 나라의 수치를 제거하지도 못했으니 여러 주군(州郡)의 열의지사(烈義之士)들이 서쪽에서 육력(勠力,협력)해 어린 주인을 도와 영접하기를 바라오. 그런데 도리어 망령되이 역모를 꾸미고 충신(忠臣)을 더럽히려 하오! [[유우(삼국지)|유우]]조차도 자신을 칭하는데 고(孤)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고(孤)가 참칭의 증거라는데 한실의 충신인 유우나 조정의 명을 받은 일개군의 태수조차도 자신을 밑의 사람에게 자칭할때 고(孤)를 쓰는것이다. 동한 말년에서는, '고'라고 쓰는 것이 상당히 널리 쓰였다는 얘기다. 실제로 제갈량이 고(孤)를 쓴 건 정사 본전에는 없고 초주전 촉기 주석과 계한보신찬에 붙은 익부기부잡기 주석에만 달려 있는데 둘 다 모두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쓴 것으로 문제는 없다. 그는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은 일관되게 신(臣)이라 하고 있고, 사사로운 서신은 '오(吾)'라고 하고 있고, 교의 경우에는 '오' 혹은 '량(亮)'이라고 했다. 애시당초 제갈량과 관련된 모든 기록에서 고라는 자칭은 두번 밖에 쓰지도 않았다. 거기다가 원래 고(孤)는 제후급 인사들의 자칭인데[* 노필이 말하길, 고(孤)는 황제 전용이 아니다. 두예가 이르길, 고(孤)는 춘추시대의 제후가 쓰는 겸칭이다.] 제갈량은 당시 승상(상국)에 익주목이었다. 그러므로 더 논할 필요가 없는 썩은 떡밥이다.[* 이미 진시황때부터 황제는 1인칭으로 고(孤)가 아니라 짐(朕)을 사용했다.] 아예 제갈량은 칭고를 한 적이 없다는 얘기도 있다. 우선 첫번째로 나오는 것이 익부기구잡기로 대개 삼국시기 진술(陳術)이 쓴 책으로 여겨진다. 삼국지 이선전을 살펴보면 진술은 익부기구전(益部耆舊傳)과 지(志)를 지었는데 이중에서 지(志)가 잡지(雜志)부분, 즉 익부기구잡기(益部耆舊雜記)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한중]]군 사람 진술의 자는 신백으로 또한 박학하고 견문이 많았는데 석문(釋問) 7편과 익부기구전 및 지를 지었다. 관위는 세 군의 태수를 역임했다. >---- >촉서 [[이선(삼국지)|이선]]전 >익부는 후한 건무년간 이래로 촉군 사람 정백읍, 태위 조언신, 한중군 사람 진신백, 축원령, 광한군 사람 왕문표 등은 모두 박학하고 견문이 많아 파군과 촉군의 기구전(耆舊傳)을 지었는데 진수는 (서술한) 역년(歷年)이(經) 길지 않다 여기고 이에 파군과 한중군을 합하여 익부기구전 10편을 지었다. >---- >화양국지 후현지(後賢志) 이 여러 기구전들은 진수의 익부기구전이 나오면서 점차 사라졌다. 익부기구잡기에 나오는 제갈량의 유언과 후계자 선정 이야기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연상되는 이야기가 있다. [[사기(역사책)|사기]] [[한고조|고조]]본기와 [[한서]] 고제기를 보면 임종을 맞이하는 한고조에게 [[고황후 여씨]]가 어떤 이를 상국으로 임명해야 하는지 묻는 대화가 나온다. >폐하께서 백년을 사신 뒤에 [[소하|소상국]]이 죽으면 누구로 하여금 이를 대신하게 해야 합니까? > >[[조참]]이 괜찮을거요 > >그 다음은요? > >[[왕릉(전한)|왕릉]]이 괜찮소. 그러나 왕릉은 우직하니 [[진평]]이 보조한다면 괜찮을 것이오. 진평은 지모가 있지만 홀로 감당해내기 어려울 게요. [[주발]]은 침착하고 꾸밈이 적소. 유씨를 안정시킬 사람은 주발일 것이니 태위를 맡기시오. > >여후가 다시 그 다음을 묻자 (고조가 대답했다) > >이후는 그대가 알 바 아니오. 이렇게 한고조의 유언은 마무리 된다. 익부기구잡기의 얘기도 비슷하다. 제갈량의 병이 위독한 것을 알고 국가의 중대사 자문하기 위해 제갈량에게 파견한 사람이 며칠을 이야기하면서도 후계자를 묻지 않았으며, 떠난 지 며칠이 지나서야 질문이 생각나서 급히 말을 달려 돌아온다. 와병 중이던 제갈량은 스스로를 고(孤)라고 칭하며 마치 [[이복]]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질문하기도 전에 대답을 던진다. 다시 후계자를 묻자 [[비의]]를 거론하고 그 이후에 대해서는 알 바 없다는 듯이 침묵한다. 익부기구잡기 스스로가 증언하듯이 '치밀하고(精識) 과감하면서도 날카로웠으며(果銳) 정무(政務)를 처리하는데 민첩'했던 이복은 여기서 허둥대며 코믹하기까지 한 역할로서 곧 임종을 맞이할 제갈량이 미래를 꿰뚫듯 대답하는 모습과 대비된다. 사실 이쯤에서 이 이야기를 쓴 작자는 '오(吾)'보다는 '고(孤)'정도는 써주어야 더욱 위엄이 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 마지막 장면은 한고조의 유언과 오버 랩 되면서 끝이 난다. 익부기구전잡기에 나오는 제갈량과 이복의 대화는 사기 고조본기, 한서 고제기와 비슷한 내러티브 구조로 이러한 까닭에 호삼성(胡三省)[* 호삼성의 경우 한고조의 경우와 다르고 단지 비의를 이을 대상이 없던 것 뿐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의 자치통감 주석과 원나라 때 이름난 학자인 [[학경]](郝經)이 쓴 속후한서에는 이 대목에서 모두 한고조의 유언을 거론하고 있다. 일부에서 한고조의 유언이 [[한문제]] 즉위 즈음에 나왔으리라 여기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아마도 익부기구잡기의 이 후계자 선정 이야기는 제갈량이 지목한 [[장완]]이 정권을 잡고 비의가 연이어 집권한 이후, 혹은 이들 사후에 고조본기를 본떠 민간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다시 삼국지와 화양국지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은밀히 후주에게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만약 불행하게 되면 뒷일은 마땅히 장완에게 맡기소서" 하였다. >---- >촉서 [[장완]]전 >제갈량이 살아있을 때, 양의는 성품이 조급하고 편협하였으므로 장완에게 (뒤를 잇게 할) 뜻이 있음을 (후주에게) 은밀히 말하였다. >---- >촉서 [[양의]]전 >당초, 제갈량이 은밀히 후주에게 표문을 올리기를 "양의의 성품이 조급하고 편협하니 만약 신이 불행하게 되면 장완으로 신을 대신하게 하소서" 하였다. >---- >[[화양국지]] 유후주지 이렇듯 장완전과 양의전을 살펴보면 제갈량이 은밀히 표문을 올렸다고 했으니 굳이 익부기구잡기의 내용에서 신뢰할만한 부분을 가려내라 한다면 '후주가 이복을 보내 제갈량에게 자문을 하게 했고 며칠간의 자문 끝에 제갈량의 밀지를 후주에게 전달한 사람은 이복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정도밖에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삼국지 비의전에는 이러한 제갈량으로부터의 사전에 예비된 계승 분위기가 보이지 않을뿐더러 비교적 이른 시기의 기록들을 접했을 [[상거]] 역시 진수의 서술을 정리하는 선에서 끝낸 것을 보면 후계자 임명과 관련한 이복의 에피소드를 신뢰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화양국지 말미의 익양녕삼주선한이래사녀목록(益梁寧三州先漢以來士女目錄)을 살펴보면 "과감하고 예리한(果銳) 전감군(前監軍) 장군사마(將軍司馬) 이복(李福) 자는 손덕(孫德)"이라 쓰고 '(이복에 대해서는) 제갈고사(諸葛故事)와 촉서(蜀書)에 보인다' 주석했는데 상거는 여기에서도 익부기구잡기를 거론하지 않았다. 제갈고사는 현재 예문류취 권60에 1조가 남아있는데 고사란 지금의 훈령, 조례 또는 판례와 비슷한 의미이다. 또 이번엔 그 다음 기록인 촉기의 기록을 보자. >초주가 제갈량을 처음 만났을 때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초주를 보고) 비웃었다. (초주가) 나간 후에 유사(有司)가 비웃은 사람들의 죄를 묻고자 하였다. 제갈량이 말하기를 "고(孤)도 (웃음을) 참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야 (어찌 참을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 >촉기(蜀記) 손성의 촉기에는 제갈량의 1인칭 대명사가 모두 '오(吾)'로 되어 있으므로 삼국지 초주전 배주에 인용된 이 촉기는 [[왕은]]의 촉기로 추측할수 있다. 예문류취 권19, [[태평어람]] 권391, 책부원구 권835, 사문류취 권21에도 거의 같은 문장이 실려 있다. 초주는 사후 서진시기인 후세에 당시 익주자사가 초상화를 그려 기릴 정도로 학자로서 존경을 받았지만 [[양희]]전에도 나오듯이 이미 당대부터 시류에 맞는 재능이 없다고 하여 그를 중시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초주의 항복론을 받아들여 항복한 유선을 비판한 [[왕숭]]과 초주를 대놓고 경멸한 손착과 [[손성]]의 평어에서 보이듯 한편으로는 경멸을 받았다. 그의 제자였던 [[진수(역사가)|진수]] 역시 [[장화(삼국지)|장화]]의 비호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모함과 실패를 여러 번 맛보았고. 제갈량은 익부기구잡기에서 '고(孤)'를 통해 신격화된 이미지로, 촉기에서는 볼품없는 초주와 극한으로 대조되는 '고(孤)'로서 등장한다. 아마도 고(孤)라는 인신(人臣)의 극한호칭이야말로 대비를 위한 장치가 아닐까? [[왕은]]의 촉기 외에 다른 사서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이유 또한 같지 않을까? 제갈량이 예언한대로 비의가 죽고 난 뒤 점차 쇠망해갈 촉한과 제갈량을 등장시켜 후에 항복을 권하고 살아남을 초주를 비웃는 모습은 모두 그 시대의 인식이 투영된 일면이 아닐런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사료에서 칭신을 제외하고 제갈량이 스스로를 가리키는 용어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 대내적으로는 '吾'를 기본으로 '亮'이라는 이름을 병용한다. * 대외적으로는 '亮'을 기본으로 '僕'이라는 겸양사를 병용한다. 제갈량의 기록에 있어서 1차 사료에 해당하는 [[제갈량집]](서간문 포함)을 살펴보면 '吾'와 '亮', 오나라의 대신인 보즐과 육손에게 쓴 서간에서 '僕' 등이 나타나는데 유비의 사망을 기점으로 전후 그 어느 곳에도 '孤'를 쓴 흔적이 없다. 태평어람 권249에 남아있는 승상부 연속(掾屬)들에게 내린 교령과 이를 바탕으로 쓴 동화전(董和傳)조차 자신의 이름인 '亮'을 써서 자신을 낮추었다. 이렇듯 진수가 서술한 문장에도 모두 공통적으로 '吾'와 '亮'이라는 자칭이 나타난다. 즉 제갈량의 칭고를 했다는 기록은 의외로 그 기반이 부실한 것을 알 수 있고 대내외적으로 공식적인 표현이 나오는 1차 사료를 종합하고 또 진수와 상거의 자료들을 종합하면 이 자료들에서 제갈량은 '고(孤)'라고 칭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갈량은 고라는 자칭을 썼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할 수 있다. 사실 위에서 내세운 가설이 틀렸고 익부기구잡기와 촉기가 옳은 기록을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한나라는 고사(故事)라는 형식을 통해 법제의 구멍을 보완하여 빠진 정령을 반복 시행했고 촉한 역시 제갈량의 고사가 존재할 정도로 또 다른 기준점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서에서 '고(孤)'의 사용은 당시 그러한 제갈량의 지위와 인기도를 보여줌과 동시에, 촉한이라는 국가를 신분, 출신 지역 관계 없이 하나로 묶은 그의 존재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원전을 쓴 진술과 [[왕은]]부터 시작해서 그것을 인용한 후대의 [[배송지]], [[사마광]], [[학경]], 그리고 그외 제갈량의 말과 문장을 인용한 수많은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제갈량이 '고(孤)'를 충분히 쓸만한 자격이 되고 그것을 사서에 나타낼때 문제가 없었다고 판단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제갈량이라는 거물의 크기는 그 정도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십석(十錫) 드립도 그렇다. 당장 이엄과의 편지도 왕위에 오르고 [[구석]]을 권하는 말에 이엄을 꾸짖고 한실부흥을 하면 모두가 큰 상을 받고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십명(十命), 열개라도 받을수 있을것이라 거절하는 편지인데 그걸 가지고 제갈량이 십석 드립을 쳤다느니 하는 것이다. 제갈량은 이렇게 말했다. >나(吾)[* 실제로 원문에서 '吾'라고 쓰고 있다.]와 족하는 서로 안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서로 더는 이해하지 못하단 말이오! 족하는 신하의 길을 고집할 필요 없이 나라의 영광을 위해 마땅히 아무것도 하지않는 것은 안된다고 나한테 가르치려 들고 있소. 나(吾)는 본래 동쪽의 낮은 선비로, 선제께서 틀리게 쓰셔서 이미 신하로서 극에 달한 지위에 있고 많은 녹(백억)을 받고 있음에도 지금 적을 토벌하는데 효력이 없어 자신을 알아주심에 보답하지 못했는데 제, 진(주나라를 도운 제후인 옛 제나라, 진나라)과 같이 귀하고 큰 자리에 앉는 것은 의가 아니오. 만약 위를 토벌하여 조예를 처단해 황제께서 옛 도읍으로 돌아가시면, 더불어 여러분(諸子) 모두가 높아지고(與諸子並升), 비록 십명(十命)이라도 받을 수 있는데(雖十命可受), 하물며 아홉이랴(況於九邪)! 이는 북벌이 성공하면 참여한 제군 모두가 높아진다고 역설함과 동시에 십명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고로, 큰 공로로 받는 상에 대한 비유인 것이니 이엄에게 분명히 한실부흥의 의지를 보이고 왕위에 대한 거절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제갈량의 논지는 이미 시작할때 다 나왔다. 어디서 함부로 칭왕이나 구석이란 단어를 꺼내고 있느냐는 꾸짖음인 것이다. 십명을 논하는것도 논공행상에 있어 자신만이 대상이 아니라 하고 있고 다른 신하 제군 모두가 귀하고 현달한 자리에 더불어 높아지고 십명(큰상)을 받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구석에 대한 무시 내지는 멸시에 가까운 것이다. 십명은 제갈량이 가정한 상상 속의 개념으로서 신하로서의 최고 영예를 상징한다. 한실을 부흥하면 비록 극상의 영예라도 받을 수 있는데 하물며 구석 따위야! 즉, 신하로서 최대의 영예까지는 받겠으나 구석같이 천자의 권력을 찬탈하는 상징은 받지 않겠다는 의지천명이다. 애당초 제갈량은 주군인 유비에게 [[역성혁명|왕이 아니라 황제가 되어도 좋다고]] 유명까지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탁고대신으로서 고굉지력[* 股肱之力, 고굉지력은 다리와 팔, 즉 사지 온 몸의 힘을 뜻하는 말로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어떤 일을 함에 가진 힘을 남김없이 다한다는 의미의 전심전력(全心全力)과 같이 온 몸을 다 바쳐 헌신한다는 의미로 쓸 수 있다.]을 다한 사람이다. 그걸 눈앞에서 보고 유비로부터 '내가 이 사람에게 이런 권한을 부여한 것을 기억해라'는 메시지를 받은 사람인 이엄이 그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인 제갈량더러 구석과 왕을 받으라고 논하는것은 교묘한 말로 제갈량을 시험하는 음험한 의도이다. 심지어 저 답이엄서(答李嚴書)는 진수의 [[제갈량집]]을 인용한 주석에서 나온것으로, 아마도 이엄이 4차 북벌 이후 제갈량에게 누명을 씌울때 공개된 편지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지만, 결국 촉한의 중신들은 두 탁고대신 가운데 제갈량의 편에 섰고 이후에도 그의 충성에 대해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참고로 십명(十命)은 제갈량이 말할 당시에는 없는 것에 대한 비유였지만 지금은 공훈이 탁월, 뛰어나다는 것을 비유하여 최고의 상을 의미한다. 임금이 권신에게 하사한 아홉 가지 기물을 구석이라고 하고, 구석 외에 하나의 물건를 더하는 것. 십명을 칭하는 것은 임금이 신하들에게 주는 최고의 상이자 특수한 영예이다. 살피건데, 고대에 십명의 제도는 전혀 없었으니, 이는 곧 가정된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https://www.zdic.net/hans/%E5%8D%81%E5%91%BD|한전(漢典)의 설명]]도 있다. 실제로 제갈량 이전이나 이후에도 찬탈하려는 권신들은 구석을 받았으면 받았지 십명을 운운하진 않았다. 즉 이것 역시 썩은 떡밥이라고 할 것이다. 제갈량이 남중 정벌 이후 [[부월]], [[호분]] 60인, 고취(취주악대) 1부, 곡개(曲蓋, 대가 굽은 일산) 하나, 우보(羽葆, 새깃으로 장식된 일산)을 받았다고 구석의 일부를 받았네, 황제의 권한을 넘어서 찬탈을 하네 운운하는 작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가 받았던 것은 부월, 호분 등 구석의 일부 일 뿐이고, 그나마도 부월은 원래부터 원정을 나가는 장군에게도 주어지는 물건이었다. 향후 있을 북벌을 위해선 필연적인 권리였던 것이다. 거기다가 제갈량이 받은 호분은 60인으로 원래 구석을 받은 자들이 3백인을 하사 받았다는 걸 생각하면 1/5밖에 안 돼서 그나마도 한계가 명확한 것이었다. 이것은 황제가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서 주는 물건들, 그러니 하사품의 역할을 한 것이다. 또 제갈량은 찬탈자들이 받는 검리상전(劍履上殿),[* 칼을 차고 전상에 올라갈 수 있다. 원래는 당연히 무기 소지 자체가 안 된다.] 입조불추(入朝不趨),[* 황제의 어전에 입조할 때 종종걸음으로 걷지 않아도 된다.] 알찬불명(謁讚不名)[* 입조 때 환관이 관직과 이름을 말하지 않고도 입조할 수 있다.]을 받지 않았다. 반면 조위에선 탁고지신으로 [[조진]], [[조상(삼국지)|조상]], [[사마의]]가 이 권리를 하사받았는데 사마의야 뭐 그렇다 치고(...)[* 사마의조차도 [[고평릉 사변]] 이전에 받은 것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받은 게 아니다.] 조진, 조상[* 조상의 경우 고평릉 사변 당시 본인의 태도도 그렇고 누명을 쓴 것이라는 설이 대세.]이 황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얘기는 없다. 하물며 그런 권리가 없던 제갈량은...즉 이것 역시 푹 썩은 떡밥이라고 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