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논란 (문단 편집) == 융중대를 제때 수정하지 못했나? == 여명협 교수의 제갈량 평전에서는 융중대가 당시 급변하는 상황에 맞추어 수정/보완을 거치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지적하였다. 익양대치로 손오와의 갈등이 표면상에 올라온 상황에서 형주에 더 힘을 싣는 방향으로 전략을 보완하여 유비에게 헌책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평전에서 [[제갈근]]이 익양대치 전에 촉에 사신으로 왔을때 제갈량, 제갈근이 이에 대한 논의나 (유비에게) 얘기를 분명 했을거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당시 유비군은 익주 문제로 매우 바쁜 상황이었고, 익주 평정 이후에는 한중의 일로 인력과 재정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형주 공방전 #s-4|익양대치]] 당시 관우에게 군사를 지원하였으며 또한 상용을 점령하고 유봉과 맹달을 주둔시켜 유사시 지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중보다 형주를 우선해야 했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한중평정은 융중대에 꼭 필요한 것이었으므로 옳지 않은 지적이다. 한중은 유비군에게는 가장 중요한 대 위나라 방어거점이었고, 한중이 평정되지 않아 익양 대치 때에 급히 오와 협정을 맺고 한중으로 달려간 것과는 달리, 한중을 점령한 이후에는 이릉 대전의 궤멸적인 패배 이후에도 촉은 위의 위협에서부터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따라서 한중과 익주평정에 총력을 기울여야 했던 사정상 제갈량의 탓을 할 수는 없다. 또한 관우의 인사에 관해서는 형주를 수비하는 임무로 관우 이상의 인재는 유비군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관우를 대신해서 다른 상장을 배치하기엔 충성심, 군대를 통솔하는 능력, 수군을 잘 다루는 능력으로 관우만한 사람이 없었다. 외교의 부분에서 관우가 실수한 점이 없지 않으나[* 제갈량의 외교정책은 동화손권, 즉 항상 동오와 친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확고부동한 2인자 관우가 죽고 관우의 복수를 위해 출정했던 유비가 [[이릉대전]]으로 실패하자 제갈량은 촉한의 전권을 가지게 되었고 동오와의 관계 개선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실제로 관우는 형주 방어를 잘 해냈고, 관우가 형주를 잃게 된 것은 손유동맹의 공적인 위를 공략하고 있을 때 촉오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오나라의 도독 [[노숙(삼국지)|노숙]]이 217년에 죽은 이후, 여몽과 손권이 노골적으로 형주 나머지 부분을 차지하려고 눈에 불을 켜는 상황에서 오에서 뒤통수를 친 것과, 유봉과 맹달이 사사로운 갈등으로 관우를 구원하지 못하는 등의 예상하기 어려웠던 변수의 개입이 있었던 것 때문이지, 용인의 실책이라고는 볼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