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논란 (문단 편집) == 기타 논란거리 == 제갈량이 유비를 부추겨 [[유장]]의 [[뒤통수]]를 치게 하였다는 비판이 있다. 그리고 이는 명백히 유비와 제갈량의 도덕적인 과오가 맞다. 그러나 이 상황은 유장의 부하들이던 장송, 법정, 맹달 등이 먼저 와서 유비에게 익주를 갖다 바치는 상황이었다. 또 도덕성을 매우 중시여기는 사가인 진수가 '유장이 영웅감이 아니라서 땅을 잃은 것이니 자연스러운 이치다' 정도로 평한 걸 보면 의외로 당대 사람들 사이에선 그리 큰 도덕적인 흠집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것 같다. 실제로 당대에 유비가 이것으로 비판받은 점은 없다. 이걸 보면 유장이 개인적인 인성은 좋았을 망정 난세의 군웅으로는 지극히 역량 미달이었다는 사실은 당대에도 널리 퍼진 평가였던 듯하다. 명색이 후한 최대의 주인 익주를 갖고 있었으면서 거기에 법정, 이엄, 황권, 장송, 맹달, 오의, 오반 등 인재풀 또한 충분히 뛰어났음에도 고작 한중군 하나 차지하고 있던, 오두미도 교주로서의 [[카리스마]]를 제외하면 별 다른 인재풀도 없던 [[장로(삼국지)|장로]] 세력한테 쩔쩔매다 유비군을 불러들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유비와 함께 멀쩡히 살아있던 [[헌제]]에게 시호를 올려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도덕적인 비판이 존재한다. 그런데 헌제가 [[조비]]에게 살해당했다는 유언비어는 꽤 퍼져 나간 듯하다. 당장 위나라 신하였던 [[소칙]]이나 [[조식(삼국지)|조식]]도 헌제가 선양 후에 해를 당한 줄 알고 소복을 입고 곡을 했다. 오나라 쪽에서도 헌제를 죽은 사람 취급하는 기록이 있었을 정도. 그러니까 알면서도 죽은 사람 취급했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에 지금처럼 실시간으로 소식이 전달되던 시기도 아니었는데 멀리 중원에서 정말로 헌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유비나 제갈량이 정확하게 확인할 방법이 없다. 시해됐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정말 시해됐다고 여겨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쨌든 헌제가 조비에게 살해당했다는 풍문 자체는 유비 세력에게 아주 좋은 명분이 될 수 있었다. 유비의 칭제를 막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의견도 있는데, 이는 지도자와 국가를 동일시하여 일어나는 현상이다. [[동진]]의 [[습착치]]나 정사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유협]]이 조비에게 선양함으로써 한의 사직이 끊겼는데, 이를 막을 수 있는 유비가 황제가 되는 것으로 한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은 최선이라고 보았다.[* 유비의 칭제와 손권이나 원술의 칭제가 다른 점은 당시 기준으로 촉한은 이미 멸망한 한나라를 잇는 '''한나라'''였기 때문이다. 조위의 입장에서 보면 한나라의 사직이 끊기고 위나라로 넘어오면서 정통성이 넘어온 것이지만, 위나라의 선양 자체를 찬탈로 보는 입장에서 이것은 말이 선양이지 사실상 쿠데타이고 한 황실이 능멸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 황실을 복원하는 것이 최선인데 이미 황제는 죽었(다고 알려져있)으니 황실의 피를 이은 유비가 즉위해 황실을 잇는 것이 최선이다. 즉 '지방정권이 칭제를 했다'는 점에서 저 셋은 비슷하지만, 명분 면에서는 넘사벽이다. 당시 유비가 한 황실의 핏줄이고 헌제가 시해됐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상황에서 유비의 칭제는 충분히 정당성이 있었다.] 유선이 제갈량 사후에 촉나라 백성들과 이민족들, 신하들이 길가나 들판 등지에서 사사로이 제갈량을 제사 지냈는데 이 때문에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을 짓다고 건의를 했지만 유선은 당장 짓지는 않고 그의 사후 30여년 뒤에 사당을 지었다. 이를 근거로 유선이 제갈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일부러 사당 건설을 몇년간 질질 끌었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있기는 하지만, 제갈량 사후 그를 욕하는 [[이막]]을 유선이 화를 내며 처단한 바도 있으니[* 그냥 처단이 아니라 아예 사형에 처해버렸다. 유선이 비록 무능한 군주로 통할지언정, 사람됨 자체는 딱히 모난 데 없이 유순한 위인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노발대발하며 죽여버릴 정도였으니...] 제갈량과 유선이 대립했다고 하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제갈량은 유선의 안정적인 후계 계승을 위해 [[유봉]]을 제거했고, 유선의 친어머니인 [[감부인]]을 소열황후로 높이고 유비와 같이 모셔야 한다고 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자신의 안전한 제위계승을 위한 사전작업을 도맡아 해준 사람인데 유선의 입장에선 이런걸 싫어할 이유가 없었을 터이다. 유선이 제갈량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사당을 통해 제갈량이 신격화되어 살아있는 자신의 권위를 흔드는 일이 달갑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정말 정말 기타 논란거리. * 제갈근과 제갈량의 관계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제갈현]]이 예장태수로 부임할때 같이 따라간 사람은 제갈량, [[제갈균]] 및 누이 2명이고 제갈근은 빠졌다. 무슨 일이 있을길래 제갈근은 혼자 강동에 멀리 피해서 계모를 모시고 살았을까? 그리고 제갈근이 동오에서 안정된 생활을 할때 왜 숙부 제갈현을 잃은 형제들을 부르지 않았을까? 나중에 제갈근과 제갈량은 서로 만나더라도 공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두 형제간의 관계는 생각보다 서먹했을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제갈량이 가장 많이 편지를 보낸 사람 중 한명이 형 제갈근이라는 점에서 또 그렇게 보긴 어려운 면도 있다. 사실 그냥 단순히 제갈근은 집안의 장남이고 제갈량보다 7살 연상이니까 성인으로서 스스로 자립을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강동으로 건너갔다고 볼 여지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장남은 자녀들 중 가장 먼저 독립하여 따로 나가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으니 제갈근도 그런 사례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형제나 자매가 단 한번도 서먹하지 않게 지내는 건 불가능하니 정말 잠시 서먹했어도 이상하지 않고, 나중에 강동에서 잠시 재회하고 이후 서신을 나누면서 서먹함을 풀었다고 여겨도 자연스럽다. * 제갈량은 [[친구]]들을 등용하지 않았다? 위나라에서는 [[순욱]]이 여러 인재를 피라미드 형식으로 영천호족 파벌을 형성하며 서로 추천했고 오나라에서도 [[장소(삼국지)|장소]], [[주유]], [[노숙(삼국지)|노숙]], [[제갈근]] 등이 서로 추천했다. [[유비]] 역시 호협을 사귀는 걸 좋아했고 촉한은 유비 개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그런데 제갈량은 달랐다. [[서서]], [[석도(삼국지)|석도]], [[맹건]], [[최주평]] 등은 위나라에서 관직을 지냈다.[* 단 이중 서서를 잡지 못한걸 제갈량 탓하는 것은 제갈량 입장에서 굉장히 억울하다. 연의에서야 서서의 후임으로 제갈량이 군사된 것이지만 실제 정사에서 보면 서서와 제갈량은 모든 촉빠들이 꿈꾸던 제갈량-서서 체제로 유비를 섬긴적이 있다. 아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제갈량이 등용된 자체가 서서의 추천으로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서가 유비와 제갈량을 떠나게 된 것은 효자로 알려진 서서 본인의 의지였으며 효를 중시했던 그 시절은 그 누구도 서서를 비난하지 않았다.][* 맹건에 경우 맹건은 예주 출신으로 그가 고향을 그리워하여 돌아가려고 하자 제갈량이 말렸지만 결국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동창생들 모두 고향 서주를 조조의 침략으로부터 빠져나와 형주로 이주하면서 자연스럽게 조조를 싫어하게 됐을 제갈량과 달리 다른 딱히 조조와 척을 진 적도 없고, 고향도 그대로 있었으니 멀리 타지에서 있기보다 고향 혹은 가까운 곳에서 안정적으로 지내기를 원했을 테니 맹건의 사례처럼 제갈량이 설득했을지언정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 지내는 것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서서나 방통은 제갈량과 잠시 일했지만 각자의 일로 인해 제갈량과 영원히 헤어지고 말았다.] 제갈량의 사람쓰는 원칙이 붕당을 형성하지 않았던 것일까? 위나라에서 순욱을 조금이라도 알면 조그마한 관직을 얻을수 있고 이건 오나라의 주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제갈량을 사사로이 알아도 관직을 얻을 수는 없었다. * 제갈량과 [[황부인]]의 관계? 제갈량은 [[황승언]][[황부인|의 딸]]과 결혼하면서 당시 형주 최대의 권문세가이자 자사 유표의 처가였던 채씨 집안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제갈씨|그의 두 누나]]도 각각 형주의 명문가 괴씨와 방씨 집안에 시집을 갔다. 이에 제갈량이 처가와 사돈댁 덕으로 권문세족에 빌붙으려 한 게 아니냐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상 제갈량은 인척관계를 이용해 부귀를 구한 적도 관직을 구한 적도 없었다. 그가 형주 명문가의 인척으로 편입되면서 형주의 여러 명사들과 교류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그뿐, 그는 포의의 농부로서 스스로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으며 은사나 선비들과 사귀었다. 제갈씨 집안이 형주의 여러 명문 호족들과 인척 관계를 맺었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위나라에 사관했고[* 괴씨, 채씨 집안 사람들은 상당수가 위나라로 갔다. 괴씨 집안은 제갈량의 큰누나가 시집간 가문. 그리고 제갈량의 작은누나와 결혼한 방산민도 위나라로 출사했다.][* 물론 촉한에 사관한 형주 호족도 많다. 촉서에 인용된 양양기를 보면 양양의 호족들 가운데 습씨, 마씨, 나씨, 곽씨, 양씨 일족 등이 촉한에 많이 출사했다. 방씨 집안에서는 방통 외에도 [[방희]]라는 인물이 촉한에 사관한 것이 확인된다. 일각에서는 양양 인근의 남양 출신인 [[황충]]이 제갈량의 처가인 황씨 집안 사람이라고 보기도 한다.] 방통은 원래 주유 밑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가 제갈량보다 늦게 유비에게 출사했다. 이러한 점을 보아 제갈량이 권문세가의 정치적 이익을 노리고 황부인과 결혼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다만 그 결혼을 통해 형주의 명사들과 학문적인 교류를 할 기회를 얻었으며, 황부인 본인도 현명하고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고 하니, 그 결혼을 통해 얻게 될 '지적이고 인간적인 교류의 기회'를 원했던 것이라고는 볼 수 있겠다. * 제갈량의 학문적인 바탕은 무엇이었을까? 양한시대에는 경학이 발전했고 고문에 대한 논쟁도 많았다. 제갈량은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떠돌이 신세였으므로 집안배경의 지원을 받지는 못했다. 유비는 처음에 대학자 노식에게 배웠고 서주에서도 진기, 정현 같은 학자들과 교류가 있었다. 조조는 어렸을때부터 독서를 즐겨했고 시서에 능했고 부도 짓는등 문학적 소양이 충분했다. 손권도 어렸을때부터 학문에 정진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숙부에게 의지하다가 그 숙부마저 일찍 죽는 등, 고문을 구해 원문을 공부하거나 금문을 구해 춘추필법을 사용해 가르침과 주석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형주에 가서는 상황이 좀 나아지지만 그래도 스스로 농사지어 먹고 사는 가난한 서생임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보면 유선을 가르칠때 제갈량은 [[한서]], [[한비자]], [[관자]] 및 [[육도]], [[예기]] 등 다양한 [[제자백가]] 서적들과 역사책을 제왕학으로서 가르칠 수 있었고 [[한서]]에 대해선 관련 서적을 쓴 적도 있다. 융증대를 얘기하거나 유기에서 계책을 말할때, 손권에게 가서 강노지말을 유세할때, 유비에게 왕을 칭하고 황제를 칭하며 존호를 받으라 권할때, 정의를 써 위나라의 대신들을 꾸짖고 오나라와의 동맹을 유지하자는 절맹호의를 쓸 때 등 제갈량은 대량의 역사전례를 인용하고 있다. 그가 아는 시대는 일찍이 [[춘추전국시대]]를 넘어섰고 견식이 넓고 여러 방면에 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갈량의 학문은 여러범위에 폭넓게 걸쳐 있던 것으로 보이며 여러 학파의 장점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제갈량은 어떻게 이런 학문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뒷편에는 제갈량의 선천적 재능 외에도 피나는 노력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앞서 언급한 황부인과의 결혼도 이런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제갈량의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 당시 형주가 "교육의 장소" 임을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스스로도 [[강하팔준]]의 일원일만큼 대학자였던 [[유표]]의 정책으로 형주에는 꽤나 많은 학자들이 모여살았고 그로 인해 대도시 양양과 멀지 않은 융중에서 살면서 그런 스승들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나 제갈량 상위 항목에 나와있는 제갈량의 인맥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인데, 제갈량의 큰 누이는 형주 최고 명문 호족 가문 중 하나인 괴씨 가문에 시집을 갔고, 둘째 누이는 형주에서 이름 나는 선비인 [[방덕공]]의 아들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본인도 위의 언급처럼 양양의 명사인 [[황승언]]의 딸이자 외가가 형주 최고 명문 호족 가문 중 하나인 채씨 가문인 황부인과 결혼했다. 그렇기에 제갈량이 공부에 대한 의욕만 있다면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은 형주에 와서는 충분히 조성되었을 것이다. 또한 스승인 사마휘 역시 뛰어난 선생으로 알려져 있었으니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은 잘 갖춰진 셈. 물론 이것은 제갈량이 형주 정착한 이후에 일어난 일임으로 그 전에는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천재였다가 형주에 거착하며 그 환경이 주어져 지식까지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많다. 다만 어떤 이유로 27세나 되는 늦은 나이까지 재야에서만 지냈는지는 의문이다. * 제갈량과 [[천명#s-1.2|천명]] 사상 초려대, 정의, 음부경주서(이쪽은 대부분 위서라고 보는 편이지만)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제갈량의 시각은 [[천명]]의 불변성과 비불변성을 따지기 보다는 오히려 천명, 즉 정치와 윤리도덕에 영향을 미치는 객관적인 법칙으로서의 하늘의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에 가깝다. 어째서 제갈량이 이런 형이상학적인 논의를 거부하고 현실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