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업적 (문단 편집) === [[농업]] 발전 === 제갈량이 가장 중시한 정책 분야는 단연 농업이었다. 그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 그가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는 '''무농식곡(務農殖穀)'''[* 농사에 힘쓰며 곡식을 기른다.]과 '''이부민재(以阜民財)'''[* 백성들의 재물이 늘어나도록 한다.]라는 정책을 주장하였다. 그와 동시에 제갈량은 '''촉과(蜀科)'''라는 법률을 통해 엄정한 사회 기풍을 강조했고, '''촉 땅 [[호족|인사]]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스스로 방자''''하지 못 하게 해 '''강자가 약자를 침범하지 않았고'''' 이로써 백성들의 생활을 보호하였으며 호족 세력이 농민을 침탈하는 것을 막았다. 그는 농사 시기, 세금와 역을 적절하게 하여 농민이 농사일에 전념하도록 하였으며 수공업도 장려하였고 소수 상공인에게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을 억제하였다. 제갈량은 긴급한 상황에서도 '무농식곡(務農殖穀,)' 정책을 계속 집행하는 것과 동시에 '''폐관식민(閉關息民)'''[* 문을 닫고 백성들을 편히 쉬게 함.]이라는 방침을 제출했다. 폐관(閉關)이란 '''남중(南中)의 반란에 대한 방침'''을 가리킨 말로서, "국력이 약해졌기 때문에 잠시 적을 안심시키는 전략을 유지하면서, 병력을 파견하여 토벌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또 "동쪽의 [[손권]]과의 화친을 더욱 돈독히 하면서, 북쪽으로는 한중이 수비에 주력하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제갈량은 모두를 위무하면서 토벌하지 않고(皆撫而不討) 백성들이 편안하고 먹을 것이 충분하게 되면 그런 이후에 이를 사용하려 했던 것이다.(民安食足而後用之) [[공자]]는 정치의 근본요체를 식족(食足), 병족(兵足), 득신의(得信義)라고 정의했다. 첫째는 먹고 사는 문제요, 둘째는 안전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 결과 정치는 백성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제갈량은 이 정치의 요체를 알고서 이를 시행한 것이다. 식민(息民)이라는 말은 "백성들의 요역과 세금을 경감하고 농업을 장려하며,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다. 당연히 '''이를 통해 국력을 축적한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제갈량의 폐관식민이라는 아이디어는 전체적인 국면을 저울질한 다음 선택한 것이다. 당연히 그가 주장한 폐관은 잠정적인 임기응변이었다. 그는 적을 토벌할 기회를 찾기까지 적절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제시한 정책을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토벌 준비를 했다. 그러므로 출병일까지 사람들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 또, 제갈량은 4차 북벌 이후 '''권농강무(勸農講武)'''[* 농사를 권하고 무예를 강습함.]하고 [[목우유마]]를 만들고 군량미를 운반하여 야곡구에 쌓아놓고 야곡구에 있는 식량 창고인 저각(邸閣)을 수리하였다. 이후 백성들과 군사들을 휴식시켰는데[* 식민휴사(息民休士)], 이로써 3년 후에 사용하였다.(三年而用後之) 이는 제갈량이 남정할 때와 같으니 백성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갈량은 “양곡은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하면서 단 하루도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강조했다. 또 재야의 인사인 [[두미]]를 초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잠시 국경을 닫고 농업을 권장하며 백성들의 재물을 길러 자라게 하고 아울러 갑병을 다스리며 조비의 군대가 피로해질 때까지 기다린 연후에 토벌한다면, 병사들로 하여금 싸우지 않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수고롭지 않게 하고도 천하는 평정될 것입니다. 제갈량은 백성들이 풍족한 생활을 하고 국가는 튼튼한 재정수입이 확보되어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엄격한 군사훈련을 통한 강병을 길러 적을 격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준]]은 이렇게 말했다. >제갈량이 촉을 다스릴 때는 백성들이 항상 밭두렁을 일구어 창고에 식량이 가득했고, 무기를 예리하게 갈아 유사시에 대비를 했다. 조회를 할 때는 떠드는 사람이 없었고 길거리에는 술에 취한 사람이 없었다. 당시 익주에는 아직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의 잔재가 남아있었고, 제갈량은 이를 적극 활용했다. [[진나라]] 시대에 세워진 대규모 수리 시설인 [[도강언]](都江堰)을 보수했고, [[서한삼걸]] 중 하나로 [[서한]]의 전설적인 재상 [[소하]]가 설치한 산하언(山河堰) 또한 개축했으며 이를 전담할 부서까지 따로 설치했다. 양수경의 수경주소에 의하면 제갈량이 북벌할 때 이 언(도강언)에서 나는 곡식에 의지했다(諸葛亮北征, 以此堰農本)고 하는데, 제갈량이 기울인 노력을 보면 가히 그렇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익주에는 [[도강언]](都江堰)을 위시하여 양전언(楊塡堰), 오문언(五門堰) 등의 수리 시설이 홍수방지 및 농업용수 공급에 큰 소임을 해내고 있었다. 제갈량은 이런 수리 시설들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아 농업의 관개를 보장, 생산량을 늘리고 국가 재정을 튼튼히 했다. 촉땅은 강이 수량이 많고 들판이 비옥한 데다가 제갈량의 정성스런 관리로 농업 생산량이 매우 높아졌다. 도강언 관개구에 있는 면죽(지금의 덕양), 광한 일대의 논은 묘(亩)당 30곡(斛) 이상이라는 기록이 있다. 제갈량은 남중의 영창군 법보산(法寶山) 아래(오늘날의 운남성 보산시) 제갈언(諸葛堰)을 건설하기도 했다. 제갈량의 이런 조치는 훗날 역대 왕조가 답습한 것으로 [[도강언]]이 2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래서 도강언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리시설에 대해 이빙은 개척을, 제갈량은 이를 수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도강언을 지을때는 지금의 콘크리트는 없고 대나무를 자루로 하고 조약돌을 넣어 층층이 쌓아서 제방을 만들었다. 이런 건축자재가 큰 홍수를 만나면 제방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관리와 보수가 되지 않은 [[사회간접자본]]은 폐해를 부르는 경우도 생긴다. 더군다나 여러 해 동안의 전란으로 인해 도강언은 이미 오랫동안 수리를 하지 못했는데 제갈량은 1천 2백명의 수리공정 전담부대를 조직해서 2교대제로 도강언의 상태를 점검하게 하고 준설하게 했다. 또, 성도 서쪽에 9리 가량의 둑을 또 쌓았는데, 이는 성도의 홍수 방위와 저지대의 침수를 막아 도강언의 기능을 보다 강화하기 위한 시책이었다. 또 익주에 있을 때 제방을 쌓았는데 '제갈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제갈량의 이런 언관(堰官) 제도는 훗날 역대 왕조가 답습한 것으로 도강언이 2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이빙은 창조의 공이 있고, 제갈량은 유지의 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현 중국의 도강언에는 [[복룡]]관(伏龍觀)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원래 삼국시기 현지의 유지인 [[범장생]](范長生)을 위해 지은 것이었으나 후에 수리전문가인 이빙(李氷)의 암자로 고쳐지었다. 도강언의 유지 및 보수에 공이 있는 사람들이 동상으로 서 있는데, 제갈량 동상도 서 있다. 그 외 [[한나라]] 시대에 설치된 익주의 대소 제방들이 모두 제갈량의 손을 거쳐 수리되었는데, 이는 당연히 곡물 생산량의 폭발적인 증가로 되돌아왔다. 제갈량이 죽은 후, 장완, 비의가 잇따라 집권하고 제갈량의 기정 국책을 계속 집행하면서 내부 안정을 중시하고 섣불리 위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따라서 촉중의 농업생산은 이 시기에 지속적으로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촉한 말까지 농업도 근본적인 손상을 입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