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업적 (문단 편집) === [[소금|염업]] 발전 === 다음으로 설명할 정책은 염업, 즉 [[소금]]에 관한 정책이다. 촉한이 바다에 면하지 않은 탓에 소금을 자체 생산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고금을 통틀어 오히려 [[소금]]의 생산은 해염(海鹽)보다도 오히려 내륙에서 생산되는 [[암염]](巖鹽)과 염정(鹽井)의 비중이 더 크다. 오히려 [[반도]]와 [[리아스식 해안]]이라는 지리적 특성과 암염이 나지 않아 해염 생산이 발달한 [[한반도]]가 매우 특이한 경우였다. 촉한은 염정을 통해 소금을 대량으로 생산했으며, 제갈량은 이러한 이점을 놓치지 않았다. 제갈량은 염정의 개발에 더욱 노력했다. 소금의 생산량을 늘려서 군대와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 동시에, 인근지역과의 물자교류를 확대했다. 재원이 확대되자 촉한정부는 재정부족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정염은 지하수에 녹아있는 소금을 끓여서 결정화시키는 것이다. 당시에 ‘집에 염천이 나는 우물이 있고, 임공(臨邛)의 염정에서는 ‘물 1곡에 소금 다섯말을 얻는다.'라고 할 정도였다. 유비와 제갈량은 익주를 점령하자마자 소금과 철을 전매케했고 당시 우연적이고 경험적으로 행해지던 정염 생산을 화정(火井, 천연 가스)를 이용하여 본격화시켰다. 고대에는 [[소금]]이 전략 물자였으므로,[* 한 왕조 시절에 이미 소금과 철을 국가에서 관리하고 전매케 하는 법이 있었으며, 연의에서나 정사 등애전에서나 촉한 정벌 이후 관련 계획에서 등애가 "익주에서 소금을 굽고 철을 벼리며 차근차근 준비해서 오를 쳐야 합니다"라는 진언을 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소금과 철은 중요한 물자였음을 알 수 있다.] 공명은 이를 국가적인 사업으로 발전시켜 생산량을 늘리고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면서 사람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었다. 염부교위(鹽府校尉) 혹은 사염교위(司鹽校尉)를 두고 그 아래 염부전조도위(鹽府典曹都尉)를 두어 염업을 국가가 관리하게 했다. 이로서 촉한은 국가 단위에서 소금과 철의 정제를 관리함으로써 질과 양을 성장시켰으며 소금 산업의 비약적인 향상을 통해 파촉 지역의 소금은 촉한이라는 국가가 사라진 뒤에도 큰 명성을 떨쳤다. 촉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갈량은 염부(鹽府)라는 전담 부서를 통해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관리했다. 유비가 [[왕련]]을 통해 신설하고 운영한 이 부서는 제갈량의 대에도 활발하게 운영됐으며 제갈량이 특히 중시한 기관이기도 했다. 임공현의 화정은 원래 불길이 약했지만, 제갈량이 그것을 살펴본 후 불길이 강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제갈량은 화정(火井)이라 불린 [[천연가스]](현대에 주력으로 사용되는 [[천연가스]] 맞다)를 통해 염정에서 소금을 추출하는 방법에 착안, 분출관의 구경을 조절하고 적절한 화력을 확인하는 등 구체적인 방법을 연구함으로써 소금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파촉 지역은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우물 소금은 파촉 지역의 가장 주요한 물산 중 하나이다. 동한말 이래, 우물 소금의 생산 관리는 한때 혼란스러웠고, 생산성은 저하되었다. 제갈량은 식염관매정책을 강화하여 염정의 양을 늘리는 한편 생산기술에 대한 개선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우물물은 우물을 파서 지하의 소금물을 길어서 만든다. 전통적인 소금 달임 방법은 이른바 가화로 달여 만들었는데, 제갈량은 우물에서 소금을 끓이는 기술을 대대적으로 개선하여 보급하였다. 화정은 가스정(天然气)으로 사료상 파촉지역이 중국에서 가장 먼저 발견되어 이용한 곳이다. 그때 동안 우물은 충분히 활용되지 못했는데, 제갈량은 화정을 개선해 우물의 소금 끓이는 효율이 높아졌으며, 집불에서 나는 소금의 배 이상을 생산했다. 송대의 시인 [[소동파]]는 ‘제갈염정’이라는 시를 짓고, 자신이 주를 달아 14개의 제갈염정(諸葛鹽井)이 산 아래에 있다고 했다. 염정의 이름에 제갈량의 이름이 붙은 것은 그가 염정사업에 얼마나 큰 관심을 보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좌사의 「촉도부(蜀都賦)」에는 집집마다 염정이 있다고 했을 정도로 수많은 염정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개인이 운영하는 염정은 대부분 호족들의 소유였으므로, 일반백성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예를 들어서 파군 임공현(臨江縣)은 소금의 산지로 가장 유명한 곳으로, 감도(監塗)와 광계(廣溪)에 염관을 두고 1개 군을 관장하게 했다. 제갈량은 소금이 백성들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단순히 가격을 올려서 염세의 수입을 늘일 수는 없었다. 그는 가격은 내리고 품질은 높여서 많은 매상을 올림으로써, 소득도 높이는 방안을 채택했다. 소금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세금 수입도 증가하는 일거양득의 현상. 예를 들어서 파군의 탕계(湯溪)에 있는 염정은 소금의 낱알 하나가 거의 1촌에 해당할 만큼 컸다. 이러한 우수한 품질의 소금은 먼 곳으로 운반을 하기기 쉬웠다. 우수한 품질의 소금이 나오기까지는 염부의 각급 관리들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여 기술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양질의 소금은 장강을 따라 오나라까지 수출되었다. 촉한의 제염공업은 성도 부근에만 소금생산노동자가 3만명에 이를 정도로 번창했다. 제갈량이 죽고 나서 30년이 지난 263년, 위나라의 장군 [[등애]](?~264)가 촉을 정벌한 후, 전쟁의 여파로 소금과 철의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자, 등애는 농우에서 데리고 온 군사 2만명과 촉병 2만명에게 소금을 굽게 하여 군수물자로 사용했다. 소금과 철을 생산하기 위해 양쪽을 나누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2만명이 소금생산에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사영공장의 인력과 파군과 남중에서 소금생산에 종사했던 인원을 포함하지 않았으므로, 적어도 4만 명 이상이 소금생산에 참여했을 것이다. 대대적으로 소금산업을 일으켜 국부의 근본으로 삼고자 했던 제갈량의 경제사상을 엿볼 수 있는 수치이다. 화정에서 소금을 굽는 방법에 대해서, 삼국시대로부터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던 남조시대 양나라 사람 유소는 임공현(臨邛縣)의 소금생산공장을 둘러보고, 이러한 기록을 남겼다. "화정의 불을 이용하여 염정에서 떠올린 물을 끓이면, 물 1곡에 4~5두의 소금을 얻는다. 그러나 다른 불로 끓이면 불과 2~3두의 소금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천연가스로 소금을 구우면 다른 불로 굽는 것보다 2배가 더 많이 생산되었다는 말이다. 그 원인은 대략 다음과 같다. * 화정과 염정은 가까이 있다. 그러므로 화정의 가스가 분출되면서 형성되는 열로 인하여 염정의 염도가 높아진다. 따라서 소금의 생산율이 높았을 것이다. * 집안에서 다른 불로 소금을 구울 때는 주변에 화정이 없으므로 염도가 낮은 물을 사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소금의 생산율이 낮았을 것이다. 화정을 이용하여 소금을 굽게 되면, 다른 불을 이용하는 것보다 시간, 공정, 땔감 등이 절약될 뿐만 아니라 생산효율도 높았다. 따라서 소금과 철로 재정을 튼튼히 하면서, 가격을 낮추고 품질을 올리기 위한 제갈량의 고민을 해결해준 것이 화정이었다. 후대의 고증에 따르면, 촉한시대에 공주(邛州) 일대에는 화정이 있는 곳에는 점포가 하나씩 있어서, 대나무 통에 가스를 담아서 운반했다고 한다. 또 다른 문헌에는 제갈량이 임공현(臨邛縣)에서 폭 5장, 깊이 2~3장인 화정을 보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현의 남쪽 1백리 떨어진 곳에서 옛날부터 대나무를 이용하여 불을 붙였다는 말을 듣고 그 불을 열로 이용하여 소금을 굽는 방법을 생각해냈다고 한다. 제갈량은 화정에 뚜껑을 덮고 그 위에서 염정의 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자료에는 간단히 기록되어 있으나 다음과 같은 3가지 사항은 분명하다. * 임공현에는 원래 규모가 분출구가 크고 깊이가 얕은 화정이 하나뿐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대나무를 이용하여 불을 붙였다. * 제갈량이 그것을 자세히 관찰한 후, 화력을 강하게 하기 위해 분출구를 작게 만들어 가스가 흩어지지 않도록 했다. 그 불을 열로 바꾸었다는 말은 이러한 의미일 것이다. * 화정의 입구에 쇠로 만든 소금 굽는 단지를 얹어서 소금을 구웠다. 우수한 품질의 소금을 저렴한 가격을 생산할 수가 있었다. 가격이 저렴했으므로 소비가 늘어났고, 수출을 통해 큰 이득을 올릴 수가 있었다. 촉한이 제염업으로 나라를 일으켰다는 옛사람의 평가가 이상할 리가 없다. 촉한은 위나 오에 비해 영토는 좁고 인구도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한은 강대국을 상대로 세력균형을 이루며, 때로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공세를 취하기도 했다. 그것은 제갈량이 화정을 이용하여 값싸고 품질 좋은 소금을 생산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국고를 부유하게 했던 탓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는 전략적 감각을 지닌 군사전문가이자 경제전문가이기도 했으며, 특히 중국의 염정사(鹽政史)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제갈량의 이러한 기술은 원시적인 형태의 천연가스 기술로, 역사적으로 천연가스가 주력으로 사용된 것이 근대 이후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고대에 이런 기술은 [[오버 테크놀로지]]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사천의 염정은 여전히 불의 우물에서 소금을 끓인다. 오늘날 사천에는 고대에 남아 있던 염정 유적이 여전히 많다. 제갈량이 촉을 다스리는 동안 촉의 소금 우물은 도처에 꽃을 피웠다. 소금은 촉한의 중요한 물산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소금세도 촉한의 경제 수입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고, 후세에 제갈량이 이룩한 촉한을 염입국으로 불렀다고 한다. [[서진]] 시기 <촉도부(蜀都賦)>에서는 집집마다 염정을 갖추고 있다 노래했으며, 진나라 사람 [[유홍]]이 이흥에게 쓰게한 《제제갈승상문(祭諸葛丞相文)》에서 제갈량의 네 가지 개발 업적을 들 때 [[팔진도]], [[목우유마]], [[노궁]], [[화정]]-염정을 제갈량의 사대발명이라고 말하며 염정을 거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