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업적 (문단 편집) == [[화폐]] 정비 == [[광무제]]가 도입한 오수전은 [[동탁]]의 난정으로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나 가치를 잃어버리고, 이후 군벌시대에서 화폐를 국가에서 주조하는 것이 아닌 개인이 주조한 화폐가 난립하게 되면서 수많은 군벌들이 더더욱 화폐를 막장으로 만든 덕분에 상품경제가 과거의 물물교환으로 퇴보하고야 만다. 이런 때 제갈량은 화폐를 국가 단위에서 주조하여 유통시킴으로써 크기와 가치를 일정화하여 경제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화폐를 안정적으로 생산해낼 수 있었던 것은 한대에 화폐 생산을 하는 동의 주요 생산지가 남만에 있었고, 바로 제갈량이 그 남중을 안정화시켰기 때문에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가장 어려운 점은 관리자가 강력한 통화 통제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각 지역의 인구, 물산, 시장 활성화 상황, 무역 유통 상황 등에 대한 통찰력과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러고 나서야 각 방면의 요소를 종합하여 화폐 발행량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다. 고액권 화폐의 발행부수는 엄격히 통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국가가 제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직백오수전 뒤에 위(爲)라는 글자를 새겨넣어 써서 이 돈이 국가적으로 그 유통능력을 보장하는 액면가액임을 보여주었다. 촉한은 일단 [[유파(삼국지)#s-1|유파]]의 화폐 발행으로 전시통화를 운용했고, 제갈량은 남중 정벌 후 남중의 구리광산에서 얻은 구리로 일정한 품질의 통화를 발행해 오수전 체제를 재건했다. 크기와 가치가 일정하고 공급도 안정적이어서 형주와 서북 일대에서도 신용되는 통화였다. 이는, 촉한을 중심으로 오와 옹양주가 촉한의 경제권과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도 화폐를 발행했지만, 화폐를 발행하는 것과 그 화폐가 생명력을 얻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이 당시 촉한의 상업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교빙(交聘)과 호시(互市) 형태의 무역이다. 제갈량은 말과 비단을 손오와의 교빙 예물로 보냈고, 위는 촉한에서 비단을 사들였다. 교빙이든 호시든 각국의 화폐 가치가 달라 물물교환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촉한의 경내에서 이루어진 화폐를 이용한 무역이다. 익주 평정후 직백전(直百錢)을 주조해 물가를 안정시키고 수개월만에 국고를 충실케 했는데 전시의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화폐의 작용을 잘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이후 촉한에선 기존 [[오수전]]을 잇는 화폐가 계속해서 주조되었다. 이는 남정으로 양한 때부터 [[구리(원소)|구리]]를 공급하던 현재의 [[윈난성]] 지역을 차지한 이후 더 원활해졌다. 촉한 화폐의 유통, 교환 경제의 활성화는 중원을 오래 능가했다. 성도는 수도가 되었고 상업도 상당히 번창했다. [[좌사]]의 '촉도부(蜀都赋)'는 성도 상업의 발달로 점포가 즐비하고, 각종 진기한 상품들이 모두 시시각각으로 늘어져 있고, 시장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사천땅은 서쪽으로는 차마 고원을 통하여 티벳과 인도, 그리고 중동으로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당대에 남만이라고 불렸던 운남성과 베트남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좋은 [[차]][* 제갈공명이 입촉 후 운남성의 차를 갖고 [[보이차]]를 만들어 보급하였단 전설이 내려오고 실제로 차의 재배가 촉한 지역의 주요 산업이었다.] 와 농지로 유명하다. 남중 정벌 이후 금, 은, 단, 칠, 밭갈이 소 등이 공품으로 들어와 촉한의 군비에도 다소 공급되었고 국가를 부유하게 했다. 그리고 운남성의 무릉에서는 석유와 가스가 발견되어 등갑옷을 만들 때나 쇠를 주조할 때 연료로 쓰여왔다. 제갈량은 남중을 정벌한 후, 남중의 한층 더 개발 및 그 내륙과의 연계를 촉진하였다. 내항도독들은 농업 생산을 중시하고, 주둔지를 개간하여 치적(政绩)을 쌓았으므로 남중인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앞서 언급했지만, 제갈량은 이러한 특산품들의 이 점을 이용하여 강한 무기와 갑옷을 만들었다. 이러한 점을 봤을 때, 촉한의 경제력과 정치적 안정성, 그리고 국방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더하여 새로 주조된 촉한의 화폐는 위나라의 서북 지역, 오나라의 남부 지역에도 통용되어 촉한의 경제권과 연결될 정도로 신뢰성이 높았다고 한다.[* 경제적인 문제로는 촉의 역량이 의심될 여지는 없어보인다. 촉이 발행한 화폐가 옹양주와 형주, 교주 일대까지 통용되었다고 하는데, 화폐가 그렇게 널리 통용되려면 화폐의 주조와 유통에 작용하는 정부의 힘을 무시할 수가 없다. 특히 후한말 인플레의 주된 요인이 돈을 만드는 데 쓰이는 구리의 공급 불안 탓이었다고 하는데, 촉은 남중을 정벌한 뒤부터 위에서 말한 화폐를 주조했다([[미야자키 이치사다]]). 서진의 실정으로 수나라의 등장 때까지 화폐경제가 다시 망하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