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업적 (문단 편집) == [[한중]] 개발 == 군대를 상비하던 [[한중]] 땅은 백성들과 군대를 활용해 개간하고 경작하여 식량을 생산했다. 이는 군대에서 필요로 하는 양식을 보충하기 위한 용도로 한중의 둔전책을 썼다는 것이고, 민간에 영향을 적게 주려 했다는 노력이라고 하겠다. 건흥 10년인 232년 제갈량은 전쟁을 중단하고 군사들을 휴식하게 하면서 지금의 섬서성 면현인 황사(黃沙)에 둔전을 설치했다. 그 규모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지만, 제갈량이 북벌을 할 때 동원했던 총병력이 10여만명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경계에 필요한 병력을 제외하고 약 7~8만명이 둔전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한중의 경제회복은 농업에 치중되었기 때문에 역시 수리사업을 전개해야 했다. 한중의 수리사업은 [[서한]]의 전설적인 명재상 [[소하]]가 만든 산하언(山河堰)을 보수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포하(褒河)의 물을 끌어서 한수(漢水)와 면수(勉水) 사이에 있는 광활한 농토에 물을 대는 것이 이 수리사업의 목적이었다. 제갈량의 증축을 거친 '산하언(山河)' 등은 아직까지 한중 지역에서 관개 면적이 가장 큰 수리공사 시설이다. 중국의 수리학자인 이의정(1882~1938)의 고찰에 의하면, "산하언은 포성현의 밭 8천여 묘, 남정현의 밭 3만 6백여 묘, 취주현 7천여 묘, 총 4만 6천여 묘에 물을 공급했다" 한중시의 6대 명지(名池)는 지금도 이용되고 있다. 고고학 조사 통계에 따르면, (한중) 전 구역에 지금까지 이래 70여 곳의 고언이 남아 있으며, 일부 언로는 수리를 거쳐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또한 각 지역은 고대 개발의 수리자원 활용 경험을 계승하고 학습한 데 더해,수리시설을 끊임없이 증수하고 있다. 면현에만 10만 입방미터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댐 37개가 추가로 건설되었고, 관개토지는 지금까지 5만여 묘에 이른다. 두 번째는 지금의 섬서성 남정현에 유주언(流珠堰)을 쌓아 부근의 농토에 관개를 하기 위한 물을 저장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한중분지의 고대 농토 수리시설이 지금까지 발생한 실제 효용성과 꾸준한 활용, 제갈량과 함께 그해 한중에서 농사를 지으라고 권농할 때 농지를 개척하고 수리를 하고 생산을 발전시킨 것을 설명하였다. 그 외에도 제갈량이 보수했거나 쌓은 오문언(五門堰), 양전언(楊塡堰), 등이 있다. 당시 산하언을 비롯해 한중의 수리시절은 오래되어 못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 제갈량은 한중을 재건하면서 이 제방을 손질했다고 새로 쌓고 증축했다. 한중의 농업이 제자리를 찾은 것은 제갈량의 이러한 노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한중의 경제가 회복되자 인구도 늘어났다. 연희 7년인 244년에 이르면 남녀노소가 들판에 가득 차고 들판에 씨를 뿌렸으며, 새들은 둥지를 틀었고 논밭에는 온갖 곡식이 무성했다고 한다. 제갈량이 죽은 지 10년이 지난 당시에 한중의 풍요와 번영한 모습은 제갈량의 정책이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제갈량은 한중의 우수한 경제 조건을 십분 활용하였고, 그 지역에 알맞게 생산을 발전시키는 일련의 유력한 조치를 취하여, 북벌 군자금이 이로서 해결되었다. 이는 제갈량이 농사를 권하고 군둔경전을 시행한 효과가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지 인민이 잘살면 더 많은 인구를 불러와 땅 넓은 한중을 다시 발전시켜, 점차 사람이 많아지고, 식량이 많아지는 선순환에 도달해 백성들을 '안치하고, 즐겁게' 일하게 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