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업적 (문단 편집) === [[팔진도]] 정리 === 지세가 험하고 말이 귀한 촉한은 위와 달리 기병을 마련하기 어려워서 대부분이 보병이었는데, 보병이 기병보다 많이 불리한 것은 전장의 상식. 따라서 촉한은 [[팔랑크스]]처럼 대(對) 기마 부대에 특화된 군 진영을 갖추거나, 보병이 기병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전략전술이 필요했다. 제갈량은 [[춘추전국시대]]부터 내려오는 [[팔진도]]를 개량해서 정립했는데, 현대까지 내려오는 가장 유명한 팔진도다.《[[삼국지연의]]》에서는 [[도가]]적인 함정 같은 것으로 묘사했지만 이건 후대 사람들이 착각한 것이고, 원래는 군의 포진법과 운용법을 말한다. 당대 [[지중해]] 문명의 [[팔랑크스]]나 [[레기온]] 같은 군 포진과 후대 [[원앙진]] 같은 운용법을 함께 다루었다고 보면 된다. 제갈량은 그 팔진을 잘 이용하고 그것이 특기였다. 오늘날까지 제갈량 팔진도는 제갈량 고유의 전술로 지칭되기에 이른다. 참고로 제갈량이 팔진을 만들고 잘 썼다는 근거는《제갈량전》에서 "병법을 미루어 넓히고 팔진도(八陳圖)를 만드니 모두 그 요체를 얻을 수 있었다."는 기록,《옥해》에도 "그가 팔진법으로 군사를 조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서진의 진남장군 [[유홍(서진)|유홍]]이 건위(犍爲)[* 익주 건위군] 사람 이흥을 시켜 쓰게 한 글에서는 "제갈량이 개량한 팔진도가 '''[[손무|손자]], [[오기|오자]]의 병법에도 없는 것'''이라 극찬하며 제갈량이 독창적으로 팔진도를 만들었다."고 했으며,《수경주》에는 "제갈량이 팔진으로 군사를 이끌었다."고 쓰여 있고,《원화군현지》,《원반구역지》등에도 "제갈량이 팔진을 잘 썼다."는 내용이 있다. 이 전투 진영은 당대 중국에서 최적화된 진영으로 촉한의 군대 통제 및 운용은 팔진도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실제로 제갈량이 정립한 군사 제도는 매우 우수해서 [[사마소]]가 [[촉한]]을 멸망시킨 뒤 가장 먼저 제갈량의 군사 제도를 배워오게 했다고 하며, 서진의 명장 [[마륭]]도 팔진도를 활용해서 강력한 [[선비족]] 수장인 [[독발수기능]]을 대파하고 사로잡아 목을 베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이 전법은 마차를 대(對) 기병 방책으로 앞세우고 뒤에서 노병이 적을 쏜다던가, 노병과 궁병을 잘 배치하고 보병으로 적을 끌어들여 십자포화 형식으로 사격한다던가 하는, 기본적이면서도 효과있는 기본 대형이나 상황의 전술이라는 의견이 있다. 《[[송사]]》지(志)에 따르면 [[당나라]]의 명장 [[이정(당나라)|이정]]은 이 팔진법을 개량해서 최강의 대(對) 기병 진법인 육화진을 개발하게 된다. [[남송]]의 무신 [[악비]]가 등장하기 전까지 실전에서 활용되었을 정도로 중국에서 애용되었으며 과장은 있겠지만 한참 뒤인 송대에 이르기까지 제갈량이 개량한 팔진법이 전래되었다고 한다. 당 [[태종(당)|태종 이세민]]도 신하들과 군사를 논하며 제갈량의 이름을 거론했다고 한다. 진형 구축에서도 효능이 좋아서 속전속결 전문가였던 [[사마의]]는 제갈량의 진형을 보고 '''"천하의 기재로다!"'''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전문 무관인 사마의가 이렇게 말할 정도로 제갈량의 군사적 식견은 높았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