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일화 (문단 편집) == 중국편 == * 소녀풍은 서쪽에서 부는, 비를 몰고 오는 바람이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청하(淸河)에 있을 때 큰 가뭄이 들었다. 사람들이 언제쯤 비가 올 것인가 묻자 공명은 "오늘 밤에 큰비가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녁이 되어도 구름 기운이 전혀 없자 모든 사람들이 공명을 바보라고 생각했으나 공명이 말하기를 "나무 위에 이미 소녀풍이 불고 나무 사이에 음조(陰鳥)들이 바람에 나부끼듯이 지저귀며 날개를 마구 치니, 그 효과가 이를 것이다." 하였는데, 잠시 뒤에 큰비가 쏟아졌다.[* 《初學記》] * 제갈량(諸葛亮)이 우장군(右將軍)이 되어 승상(丞相)의 일을 행할 때에 군사를 일으켜서 적을 공격하기를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제갈량이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군사의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뒤에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나의 잘못을 열심히 공격하기만 하면, 일이 성공할 수 있고 적은 죽을 수 있으며, 공을 세우는 것은 발돋움하고서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諸葛忠武書 卷8 法檢》] * 제갈량이 주필역(籌筆驛)에서 출사표(出師表)를 지었다는 고사가 있다. 사천성(四川省) 광원현(廣元縣) 북쪽에 있는데,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 일찍이 여기에서 출사(出師)의 계획을 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의례(儀禮)》 사상례(士喪禮)에 "상중(喪中)에는 부인이 실내에서 복머리를 한다." 하였고, 《촉지(蜀志)》에는 "건흥(建興) 12년 8월에 제갈공명이 54세로 전쟁터에서 죽자, 촉 나라 부인들이 애도하는 뜻으로 상중에 하던 복머리를 하였다."고 하였다. 제갈량(諸葛亮)이 죽자 촉나라 부녀들이 슬퍼하면서 상례 때 하는 북상투를 했다. 이는아무렇게나 막 끌어 올려 짠 상투. 함부로 끌어 올려 뭉쳐 놓은 여자의 머리를 뜻한다 * 《음부경》은 황제(黃帝)가 지었다 하는 병서(兵書)이다. 《[[수서]] 경적지(隋書 經籍志)》의 병가류(兵家類)에 "《태공음부금록(太公陰符鈐錄)》 1권과 《주서음부(周書陰符)》 9권이 있으며, 태공(太公), 범려(范蠡), 귀곡자(鬼谷子), 장량(張良), 제갈량(諸葛亮) 이전(李筌) 등 6가(家)의 주가 있는 것이 《태공음부》다." 하였다. 경문(經文)이 384언으로 된 한 권의 책이다. 이전이 여산노모(驪山老母)에게서 전수받았다고 하였으나 이전의 위작(僞作)으로 짐작된다.[* 《新唐書 卷59 藝文志》] * 진수가 찬술한 《삼국지(三國志)》에 [[제갈량집]] 목록 24편을 수록하면서 전체가 10만 4112자라고 했다. 목록을 보면 열한 번째에 〈귀화(貴和)〉라는 제목이 있는데, 이 말은 《[[논어]](論語)》에, "예(禮)의 쓰임은 온화(和)한 것이 귀함이 된다."에서 따온 것으로, [[주자]](朱子)는 화(和)를 "조용하여 급박하지 않다."로 풀이하였다. * [[태평어람]]에 따르면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으로 하여금 말릉(秣陵) 즉 건업(建業)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용과 범이 서려 있는 것과 같은 기운이 뻗쳐 나와 제왕의 터전임을 알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사실 이 일화는 강표전에 유비가 손권에게 말릉을 도읍으로 삼으라 권하자 손권이 이를 따라 도읍을 옮기고 건업으로 삼았다는 말과 같다.[* 《太平御覽 卷156 註》] 또 태평어람에 실린 오록에 따르면 석두성(石頭城)은 삼국 시대 오(吳)나라 수도 건업(建業)에 있던 성으로, 제갈량(諸葛亮)이 이곳 지세의 험준함을 보고 손권(孫權)에게 건의하여 석두성을 쌓게 하고 수도로 삼게 하였다. 제갈량은 주변의 종산(鍾山)과 석두산(石頭山)을 각각 용과 범에 비유하여 “종산은 용이 서린 듯, 석두산은 범이 웅크린 듯하니 이곳은 제왕의 거처이다.(鍾山龍蟠 石頭虎踞 此帝王之宅)라고 하였다.[* 《太平御覽 卷156 吳錄》] * 잔도 철산(棧道鐵山) 몹시 험준한 요해지(要害地)를 이르는 말로 모두 중국의 파촉(巴蜀) 지방을 이르는데, 잔도(棧道)는 산로(山路)가 험준하여 나무 가교(架橋)를 만들어 통행하는 것이고, 철산(鐵山)은 지금의 사천성 정연현(四川省 井硏縣) 동북에 위치한 철(鐵)의 산지로 제갈량이 이곳에서 병기(兵器)를 만들었다 한다.[* 《한서(漢書)》 권40 장량 열전(張良列傳), 《독사방흥기요(讀史方興紀要)》] * 《사천통지(四川通志)》〈고비부(古碑附)〉에 "장맹양이 그의 아버지를 따라 촉(蜀)으로 들어가 〈검각명(劍閣銘)〉을 지었다. 익주 자사(益州刺史) 장민(張敏)이 보고 천자에게 보고하여 비석에 새겨 검각(劍閣)에다 세웠다."라고 하였다. 검문(劍門)은 검각인데, 잔교(棧橋)의 이름이다. 지금 사천성(四川省) 검각현(劍閣縣) 동북쪽 대검산(大劍山)과 소검산(小劍山) 사이에 있는데, 제갈량이 설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천협(川陜) 사이의 주요한 통로로서 군사적 요충지이다.[* 《元和郡縣志 劍閣道》] * 제갈량이 남양(南陽)에 은거하면서 남들과 서로 왕래하지 않고 지내던 시기에 유독 서서(徐庶)와 방덕공(龐德公)과는 사이좋게 지냈으며, 특히 방덕공을 매우 존중하여 혼자 찾아가서 침상에 절을 하곤 하였다. 제갈량은 그를 매우 존경하여 스승으로 예우했고, 자주 인사하러 왔고, 방문할 때면 침상 아래에서 공경히 절하였고, 방덕공은 제지하지 않고 태연히 절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資治通鑑》,《漢丞相諸葛忠武侯傳》] * 《풍우부(風雨賦)》는 천문(天文)의 변화를 통해 일기(日氣)를 예상하고 점치는 방법을 실은 책자로, 주(周)나라 강자아(姜子牙)가 짓고, 한(漢)나라 제갈량(諸葛亮)이 편집하였으며, 명(明)나라 요종도(饒宗道)가 주해하였다. 1795년(정조19) 천문에 관한 서적들을 편집하여 《협길통의(協吉通義)》를 간행하였는데, 이 책에 《풍우부》가 부록으로 실려 있다. [* 《奎章閣韓國本圖書解題 子部 天文, 算法類 天文》,《日省錄 正祖 19年 3月 16日》] * 송(宋)나라 유학자 호안국(胡安國, 1074~1138)은 제갈량의 가산이 뽕나무 수백 그루였다는 일화를 높게 평가하여 "이러한 사람은 진실로 대장부라 할 수 있다.(如此輩人 眞可謂大丈夫矣)"라고 하였다.[* 《小學 嘉言》] * 사혜련(謝惠連)의 〈설부(雪賦)〉에 겨울의 추위를 노래하기를 "화정에는 불길이 꺼지고 온천에는 얼음이 얼었으며, 불담에는 물이 끓어오르지 않고 뜨거운 염풍이 불지 않으니, 북쪽으로 난 방문 틈을 잘 바르고 나양에서는 처음으로 비단옷을 걸친다.(火井滅 溫泉冰 沸潭無涌 炎風不興 北必墐扉 裸壤垂繒)" 하였다. 화정은 촉(蜀) 땅 임공현(臨邛縣) 서남쪽에 있는 우물인데, 제갈량이 처음 발견했으며 불길이 올라왔다고 한다. 나양은 나라 이름으로 이 나라 사람들은 옷을 입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 [[조조]]가 제갈량에게 편지와 함께 한약재 계설향을 보낸 적이 있다.(삼조시문전집역주, 여제갈량서: 三曹詩文全集譯注, 與諸葛亮書) 내용인 즉슨 '계설향 다섯 근을 보내니 작은 성의로 알고 받아주십시오.(今奉雞舌香五斤,以表微意.)'라는 달랑 한 줄의 글귀였다. 사실 이건 굉장히 의미심장한 표현인데 계설향은 [[정향]]이다. 후한시대 학자 응소(應劭)의 〈한관의漢官儀〉에 의하면 상서랑이 황제에게 상주할 때에는 입 냄새가 나지 않도록 정향을 입에 물고 아뢰는 것이 법도였다.[* 그래서 향을 머금어 품는다는 의미로 상서랑을 회향옥란(懷香屋蘭)이라고도 불렀다고.] 즉 '''너는 황제를 모셔야 할 사람이다 = (황제를 모시고 있는) 내 밑으로 오라'''라는 뜻이 되는 것으로 [[조조]]가 제갈량에게 일종의 --스카우트--회유의 의미로 보낸 것이다.[* 다만 똑같이 자가 공명(孔明)인 영천 사람 [[호소]](胡昭, 161-250)에게 보낸 편지인데 후대에 잘못 명명되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물론 [[태사자]]에게도 [[당귀]]를 보낸 적이 있는 [[조조]]인 만큼 제갈량에게도 비슷한 회유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2018년에 나온 중화서국(中華書局)의 《조조집(曹操集)》에 따르면 이 서찰은 건안 13년(208년)에 인편으로 정향 5근과 함께 보냈을 것이라는데 이걸 제갈량에게 보낸 이유는 유비-손권 연합의 공격을 늦추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유비에게도, 손권에게도, 주유에게도 안 보냈는데 정향 안 보낸 걸로 봐선 제갈량을 손유연합 주도자, 혹은 저 동맹에서 상실될 시 가장 타격이 클 인물로 보아 조조 입장에서는 제갈량이 무척 골치 아픈 존재였기 때문이었던 듯. 아니면 이간계를 겸해서 보냈을 수도 있다. 제갈량은 이에 답장을 보내지 않고 그냥 무시했다. 제갈량이 의미를 몰랐을 것 같지는 않고, [[유비]]에 대한 충성심과 [[서주 대학살|서주대학살]]에 대한 원한 때문일 듯.[* 기록에서 제갈량이 서주에서 형주로 이주한 것은 가족 일 때문으로 나오지만, 그 시기에 고향이 지옥으로 쑥대밭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다.] 유비 사후 항복하라는 위 명사가 보낸 서신에 대해 정의(正議)라는 글로 명사들과 위를 깔 때 조조에 대한 증오를 엿볼 수 있다. * 남북조(南北朝) 시대 송(宋)나라와 양(梁)나라 사이의 이름 난 의약학자(醫藥學者)이자 도가(道家)인 도홍경(452년 ~ 536년)이 쓴 책 중에는 '고금도검록'이라고 하여 당대까지 전해지던 명검들에 대한 서술을 하고 있는데 제갈량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 제갈량이 검중을 평정할 때, 청석사를 지나다가, 칼을 뽑아 산을 찔렀는데, 칼이 빠지지 않아 가버렸고 지나던 사람이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동양의 엑스칼리버?~~ * 유비는, 장무 원년, 간지가 신축이었으므로, 우산의 철을 캐서 검 8자루를 주조했고, 각 검의 길이는 3척 6촌이었다. 하나는 유비 자신이 차고, 하나는 태자 유선에게 주었으며, 하나는 양왕 유리에게, 하나는 노왕 유영에게, 하나는 제갈량에게, 하나는 관우에게, 하나는 장비에게, 하나는 조운에게 주었다. 모두 제갈량이 칼에 글을 썼으며, 모든 검이 풍각(風角)을 만들었고, 영을 내려 도(刀) 5만 자루를 만들게 하고, 모두 칼날을 연결하고, 72련(鏈)의 칼자루를 늘어놓았으며, 그것들에 모두 두 글자가 쓰여있었다고 한다.[* 사실 장무 원년은 221년으로 관우가 이미 죽었을 터인데 관우에게도 검을 내렸다는 부분이 석연치 않다. 아마도 기록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혹은 죽은 관우를 추모하기 위해 검을 만들고 관우의 사당이나 그의 유족들에게 전달했다는 의미인 듯하다.] 후세에 방자용은 말하길: 당나라 사람 상서랑 이장무의 본명은 방고인데, 정원 계년, 동평사가 되었다. 이사고는 과거에 급제하여 판관이 되었는데, 땅을 파서 검신이 좁은 검을 얻었으며, 위에 '장무'란 자가 모나게 쓰여져 있었다. 옛 <박물지>에서 [[장화(삼국지)|장화]] 또한 말하길 촉의 재상 제갈공명은 검을 패용했다고 하였다. 이에 이름을 고쳐 '사고'라 하였고, 주청하여 '장무'라 하였다. 아마 이것이 유비의 8검중 하나였던 듯 하다라고 적고 있다. * 《[[송사]]》 〈종택전〉에 따르면 종택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종택이 전후로 고종에게 수도 개봉으로 돌아오라는 상소를 20여 번 올렸으나 매번 황잠선 등이 물리쳤고, 이에 울분이 쌓여 등창이 생겨 병에 걸렸다. 제장들이 문병하여 왔는데 종택이 놀라서 두리번거리며 말하길 "내가 두 황제께서 오랑캐에게 잡혀간 일로 울분이 쌓여 이에 이르렀다. 너희들은 능히 적을 섬멸할 수가 있을 터이니 내가 곧 죽어도 여한이 없다!" 제장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길 "감히 있는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제장들이 나가자 종택이 탄식하며 말하길 "출사하여 이기지 못하였는데 몸이 먼저 죽으니 길이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게 하는구나!"[* 위에서 나오듯이 당나라 시인 두보가 제갈량의 사당을 방문하고 지은 시이다.] 다음 날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날이 어두웠는데 종택이 한마디도 없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다만 "도하! 도하! 도하!" 세 번 연이어 외치고는 죽었다. 개봉 사람들이 서러워 부르짖었다. * 청나라의 장주(張澍)가 집본한 《제갈량집》의 유적편(遺蹟篇)에 《촉고적기(蜀古蹟記)》를 인용한 이야기 하나가 전해지고 있는데, 대략적인 내용을 옮기면 이러하다.[* [[https://zh.wikisource.org/wiki/%E8%AB%B8%E8%91%9B%E4%BA%AE%E9%9B%86_(%E5%BC%B5%E6%BE%8D)/%E9%81%BA%E8%B9%9F%E7%AF%87|원문]]은 이곳을 참조.] * [[북송|송]][[태조(송)|태조]] 건륭 2년(961), 조빈(曹彬)이 명을 받고 촉 땅을 정벌하러 갔다가 [[청두 무후사|무후사]]에 들렀다. 그런데 조빈은 자못 불쾌해하며 "공명이 비록 한나라에 충성했다지만 촉나라의 군민들을 피로하게 만들고 중원의 만분지 일도 회복하지 못했는데 어찌 [[시호]]에 무(武)가 들어갈 수 있겠는가?"라 하고는 "제갈량은 나라를 기울게 한 자이니 이곳은 철거하여 제사 지내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라는 명을 내렸다. 그렇게 한창 무후사를 철거하고 있는데, 무너뜨린 중전(中殿)에서 돌로 된 비석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조빈이 가서 보니 한 자 가량의 비석에 공명이 친히 지은 글이 새겨져 있었는데, 내용은 '''"내 흉중을 헤아릴 이는 송의 조빈 뿐이리!(測吾心腹事 惟有宋曹彬)"'''였다. 이를 읽고 대경실색한 조빈은 비석에 절하며 "저같은 애송이가 어찌 무후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라 하고는 무후사를 새로이 정비하란 명을 내렸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낸 후에 떠났다. * 중국에서 무속의 신으로 숭배된다. 이때는 '와룡선생'이라고 부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