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일화 (문단 편집) == 남중편 == * 타전로(打箭鑪)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남정(南征)할 적에 여기에서 대장간을 설치하여 화살을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서강성(西康省) 경계의 강정현(康正縣)이 그곳이다. [[파일:제갈남정.png]] 제갈량의 남정을 묘사한 그림 * 당나라 시기에 만들어진 번작(樊綽)의 책 만서(蠻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영창(永昌)은 옛 애뢰(哀牢)의 땅이고 점창산(玷蒼山) 서쪽으로 6일 거리에 있다. 서북쪽 광탕(廣蕩)과의 거리는 60일 정도이다. 광탕은 [[토번]](吐蕃)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후설산(候雪山) 서변의 대동천(大洞川)과 사이를 두고 있으며, 또한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성이 있다. 성 안에는 제갈무후의 신묘(神廟)가 있는데 토속(土俗)이 다 함께 경외하며 기원(禱祝)을 빠뜨리지 않는다. 만이(蠻夷)가 말을 타고 가다가도 멀리서 사당을 보면 즉시 말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뛰어간다.'[* 원문: 永昌城,古哀牢地,在玷蒼山西六日程。西北去廣蕩城六十日程。廣蕩城接吐蕃界。隔候雪山,西邊大洞川,亦有諸葛武侯城。城中有神廟,土俗咸共敬畏,禱祝不闕。蠻夷騎馬,遙望廟即下馬趨走。] [[남조(왕국)|남조]]의 사람들이 제갈량을 신으로 모셨다는 기록으로 참고로 제갈량이 건축했다는 성은 [[신당서]]에도 기록이 나온다. 사실 제갈량의 사당이라거나 성이 3세기에 만들어져서 당나라 시절까지 유지·보수됐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아마 지역의 오래된 성채의 기원을 유명한 중국 영웅과 연관시킨 것 같다. 마침 제갈량은 운남 지역과 이래저래 연이 깊은 중국 영웅이기도 하고. 그냥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 지역에서 제갈량의 인기가 이 정도였다는 걸 보여주는 기록이라 생각하면 되겠다.[[https://cafe.naver.com/sam10/573229|출처]] * 만서에는 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난창강(瀾滄江)의 수원은 [[토번]] 내의 대설산(大雪山) 아래의 사천(莎川)에서 흘러나온다. 동남쪽 율재성(聿賫城)의 서쪽을 지나면 뇌수하(瀨水河)라 하는 곳이 있는데 순만(順蠻) 부락이라 불리는 곳을 지난다. 남쪽으로 흘러 검천(劍川)의 큰 산을 지난다. 난창강은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용미성(龍尾城)의 서쪽 제 7역(驛)에 다리가 있는데, 곧 영창(永昌)이다. 양편의 절벽은 높고 험하며 물살은 빠르고 세차다. 큰 대나무를 가로로 이어 새끼줄로 묶어 다리를 만들었는데, 위에 대자리를 깔고 대자리 위에 판목을 덮으니, 이로 인해 죽옥개교(竹屋蓋橋)라 하였다. 바위에 구멍을 뚫어 새끼줄로 묶었는데 공명(孔明)이 개착한 것이다. 옛날에 제갈(량諸葛亮)이 영창을 정벌하고 이곳에 성을 쌓았다. 오늘날에도 강의 서쪽 산 위에 있는 폐성에는 유적과 옛 비석이 여전히 존재하며 또 신사와 위패(廟)도 존재한다. 실제로 제갈량이 성을 쌓고 다리를 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당서]] 지리지에서도 또 서쪽으로 노강(怒江)을 건너 200리를 가면 제갈량성(諸葛亮城)에 이른다고 했다. 또 월수군 대등현에도 제갈량의 남정 당시 축성한 성이 있다고 한다. * 만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석성천(石城川)은 미현(味縣)의 옛 땅이다. 정관[* 당태종의 연호] 연중에 낭주(郎州)로 삼았고, 개원(開元) 초에 남녕주(南寧州)로 고쳤다. 주성(州城)은 곧 옛날에 제갈량(諸葛亮)이 싸웠던 곳이다. 성 안에는 제갈량의 찬문(撰文)이 적히 두개의 비석이 있다. 뒤쪽 상단의 전문篆文에서 이르길 "이 비석이 넘어가면 만(蠻)은 한노(漢奴)가 될 것이다." 라 했는데, 근해에 만이(蠻夷)들이 나무 기둥으로 괴어놓았다.' * 기고전설원집(紀古滇說原集)은 [[원나라]] 때 편찬된 책인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삼국시대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몸소 남정에 나서며 월수(越嶲)에서 출발하여 건흥 3년 봄에 남중(南中)에 이르렀는데, 가는 곳마다 싸워 이기며 [[옹개]](雍闓) 등을 참하였다. 옹개는 익주군(益州郡)의 기수(耆帥)로 한나라의 군대를 막아섰는데, 제갈량이 그를 베어 마침내 평정하였다. 그때 [[맹획]]이 만왕(蠻王)을 참위하며 여러 이족들을 유혹하고 선동하니, 장가(牂牁)와 월수가 모두 맹획에게 호응했다. 그의 품성은 평소 이족과 한인이 복종하는 바가 있었기에 호응하는 것이 [[곤명]](昆明), 동천(東川), 무정(武定)부터 오살(烏撒), 첨몽(沾蒙)의 수천 리 땅에 이르고, 무리가 수만 명이니, 제갈량은 회천(會川)을 지나 삼강(三絳), 무정, 농동(弄棟)과 요안(姚安)을 넘었다. 영창(永昌)에 이르러 구륭산(九隆山)의 맥을 끊어 왕기(王氣)를 없애고, 마침내 맹획을 생포하여 군영으로 돌아왔다. 영루를 보게 하고 7번 사로잡아 7번 풀어주니, 이에 맹획은 제갈량에게 천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백애(白崖)로 회군하여 쇠기둥을 세워 남정을 기념하였으며, 익주군을 고쳐 건녕(建寧)이라 하고 장인과(張仁果)의 17대손인 장용우(張龍佑)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원문: 三國蜀漢丞相諸葛亮南征自越嶲,乃建興三年春至南中,所在戰捷,由是斬雍闓等。雍闓者乃益州郡之耆帥,阻拒漢兵,亮斬之,遂平。時孟獲僭爲蠻王,誘扇諸夷,牂牁、越嶲皆應孟獲。其人素爲夷、漢所服,占據昆明、東川、武定以及烏撒、沾蒙數千里地,其衆數萬,亮經會川,歷三絳、武定也。弄棟姚安也。而抵永昌,斷九隆山脉以歇王氣,遂將孟獲生擒於營,使觀營壘,七縱七擒,以知亮有天威也。回兵白崖,立鐵柱以紀南征,改益州郡曰建寧,以仁果十七世孫張龍佑領之。] 해당 내용 자체는 이전에도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삼국시대나 진나라 시절에 만들어진 이야기는 아니고 남조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지만. [[칠종칠금]]도 나오고, 한족과 만족의 지지를 받는 맹획을 더 대단한 제갈량이 때려잡는 둥 별별 이야기를 다 때려넣은 전설이다. * 사갈편(思葛篇)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운남(雲南)과 면전(緬甸, [[미얀마]])의 이인(俚人)들은 모두 머리카락을 가지런히하여 3개의 [[상투]]를 트는데 가운데의 상투는 무후(武侯)를 표시하고 좌우의 상투는 부모를 표시한다. 매번 차를 마실 때마다 반드시 찻잔을 이마까지 들어올려 보답을 표한다. 그들 중 [[중국어|한어]](漢語)에 능한 자는 무후에게 지극히 칭하기를 '제갈아버지(諸葛老爹)'라 한다.'[[https://cafe.naver.com/sam10/577240|이상 일화들 출처는 여기]] 제갈량은 당시 운남을 비롯한 서남 소수 민족에게 널리 전승되어 숭배되었으며 심지어 지금도 [[미얀마]]엔 제갈량묘가 있다. * 위 전설에서 제갈량이 세웠다는, 혹은 세웠다고 여겨지는 쇠기둥은 남조도전(南詔圖傳)에 그려져 있다. [[파일:남조도전.png]] 이 그림이 남조도전인데 어깨에 새가 올라간 인물이 흥종왕 [[나성염]], 선두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인물이 장용우의 후손인 운남국주(운남대장군) 장낙진구(張樂進求). 장낙진구는 이후 남조 황실에 선양한다. 참고로 제갈량이 백애에 세웠다는 쇠기둥은 승전기념비 같은 것으로 복파장군 [[마원]]도 [[교주]]에 이런거 세웠다는 일화가 있다. 기고전설원집에 따르면 또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당나라 때 장인과(張仁果)의 33대손 장낙진구는 건녕(建寧)을 고쳐 운남(雲南)이라 하였으며, 당나라에서는 장낙진구를 수령(首領), 대장군(大將軍), 운남왕(雲南王)에 책봉했다. 장낙진구가 쇠기둥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금으로 주조한 봉황(鳳凰)이 습농락(習農樂)의 왼쪽 어깨에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장낙진구 등은 이를 보고 놀라서 기이하게 여기며 마침내 애뢰왕(哀牢王)의 자손에게 양위하였다. 왕은 국호를 몽(蒙)이라 하고 왕을 기가(奇嘉)라 일컬었다. 사직이 이곳에서 비롯하였기에 몽사(蒙社)라 하였다. 이는 [[당고종|고종]] 영휘(永徽) 4년의 일로, 곧 몽 13왕의 비조이다.' 또 남조도전(南詔圖傳)에도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철주기鐵柱記』에서 말했다. 처음에 삼탐백(三賧白)의 대수령, 장군 장낙진구가 흥종왕(興宗王) 등 아홉 사람과 더불어 쇠기둥 곁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주조(主鳥)가 쇠기둥 위로부터 날아와 흥종왕의 팔뚝 위에서 쉬었다. 장낙진구는 이 일이 있은 후로 더욱 놀랍고 의아하게 여겼다. 흥종왕이 이를 기억하기를 '이는 우리 집안의 주조(主鳥)로다.'하며 비로서 스스로 기뻐하였다. 여기서 습농락은 [[세노라]], 흥종왕은 [[나성염]]이다. 애뢰, 혹은 애뢰이는 한나라 시절에 남중에서 나름 세력을 떨치던 서남이의 한 일파로, 설화에 따르면 제갈량은 남중 정벌 때 구륭산에 맥을 끊어 왕기를 훼손시켰는데, 마침 이곳이 애뢰의 시조가 났다는 지역. 그런데 남조 황실은 스스로 애뢰의 후예를 자처하던 양반들이다. 그러니까 대강, 제갈량이 구륭산(애뢰산)의 왕맥을 끊은 이후 왕이 나타나지 않고 수백 년간 분열되고 지배받던 운남 지역에 옛 애뢰왕의 후예가 나타나 나라를 세우고 민족을 통합했으며, 이후 애뢰왕의 후예들은 왕맥을 끊은 제갈량이 승전비로 설치한 쇠기둥을 남조의 사직이 시작된 곳이라 여겨 성스럽게 여겼다더라식의, 무슨 예언서에나 나올법한 이야기.[[https://cafe.naver.com/sam10/576167|이상 일화들 출처는 여기]] * [[구당서]] 장간지전에 따르면 황제 [[측천무후]]에게 대신 장간지[* 625 ~ 706, 양양 사람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이 간언을 올린 측천무후를 705년에 정변을 일으켜 퇴위시키고 당나라를 회복했다.]가 말하길, 옛날 제갈량은 남중을 깨뜨리고 그곳의 거수(渠率, 무리의 우두머리)들로 하여금 자체적으로 다스리게 하고 군사를 두어 진수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3가지 이유로서, 관리를 두고 이적과 한인이 섞여 살면 반드시 싫어하게 되며 병사를 두어 양식을 옮기면 근심이 더해지고, 반란하면 수고가 거듭 많아진다는 것이며 기강이 서투르게 서면 자연히 안정된다고 제갈량이 말했다고 했다. 그는 생각하건데 이 제갈량의 계책이 만이를 기미(羈縻, 굴레와 고삐라는 뜻으로, 속박하거나 견제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하는 묘술로 알겠다며 여기 유지하는 데 비용과 수고가 많이 들고 여기 관리들이 제갈량처럼 (이족들을) 놓아주고 가둘 수 있는([[칠종칠금]])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요주(姚州)[* 현 [[윈난성]] 추슝(楚雄)이족(彝族)자치주 야오안(姚安)현. 고대엔 야오저우(姚州)라고 불렸으며 '야오저우를 알면 윈난 역사의 절반을 안다'라는 말도 있을 만큼 역사가 깊은 곳이다.]를 폐지하고 요부(姚府)는 수부(嶲府)에 통합시키고 관리대신 그 지방의 우두머리들에게 자치를 시키자고 했다. 그는 (삼국지) 촉지에 따르면 제갈량이 남정하고 나서 국가는 부유하고 갑병은 충분하다고 했고 전대(당고조)에도 이 말을 따라 그 이로움이 자못 깊었는데 지금은 소금과 베(布)를 세금으로 바치지않고 진기한 공물을 들이지 않으며 병장기를 군대에 충실히 보낼수 없고 보화의 소비는 대국을 깨뜨림만 못하니 국고를 비워가며 백성들을 몰아 만이를 정벌하는 것은 애석한 일이라고 했다.[[https://cafe.naver.com/sam10/581453|출처]]--진짜 제갈량 이 아저씨는 대단하게도 온갖 곳에서 튀어나온다. 평가가 나쁜 것도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