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일화 (문단 편집) == 예술편 == * 제갈량은 [[고금|금]](琴)을 잘 다루었다. 제갈량은 음악에 대한 전반적인 교양과 높은 예술적 성취를 갖고 있었다. 그는 노래뿐만 아니라 기악도 할 수 있고 음악 창작을 하면서 악기도 만들 수 있었고 '금경'이라는 음악 이론 전문 저서도 한 편 썼다. 중흥서목(中興書目)에 "금경(琴經) 1권, 제갈량이 제금(制琴)의 시작과 칠현의 소리를 저술했다. 13휘(徽)[* 금(琴)의 줄 짚는 자리를 표시한 것. 금의 '휘'는 소라 또는 조개로 만드는데 모두 13이고, 가운데 제7휘가 가장 크고 가운데 '휘'에서 제1휘와 제13휘 양쪽으로 이를수록 점점 작아진다.]의 모양을 취한것라는 의미이다." 라고 했다. 사희이(謝希夷) 금론(琴論)에도 제갈량이 [[양보음]]을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양보음 노래는 이전부터 있었으므로 그는 양보음을 금으로 타기 위해서 일종의 편곡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여지지(輿地誌)》에는 "정군산 무후묘 안에 석금(石琴)이 하나 있는데, 이를 스치면 소리가 맑고 가락이 높다, (제갈)무후가 남겼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의를 비롯해 여타 창작물에서 제갈량이 금을 타는 장면은 이런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파일:9nn0008so70p4q7on3n.jpg]] 《원섭첩(遠涉帖, 비단에 적어 보낸 원정에 관한 장계)》 * 제갈량은 또한 서예에도 능했다. 제갈량이 살던 삼국시대는 서예가 성숙하여 자리잡았던 시기였다. 그는 서법, [[초서]], [[전서]] 모두 뛰어났다고 한다. 가장 고전적인 서예작품은 《원섭첩(遠涉帖)》[* 원문은 師徒遠涉,道路甚艱。自及褒斜,幸皆無恙。使還,馳此,不復云云。亮頓首。이다. '군사들이 먼거리를 걸어 도로에서 많은 고생을 한 끝에 포야도에 이르렀는데, 다행히 모두 무사합니다. 사신을 보내 날아가듯 빠르게 서신을 보내니, 이외에 운운은 또 없을 것입니다. 량이 돈수합니다.'], 《현막첩(玄莫貼)》으로 《원섭첩》은 서예의 대가 [[왕희지]]가 제갈량의 작품을 모사하여 쓴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험한길을 통해 북벌을 나섰던 선현에 대한 존경을 표한 것이다. [[북송]] 시대의 서적 선화서보(宣和書譜)에는 촉한의 서예가로 제갈량이 홀로 기록되어 있다. [[남송]] 진사(陳思)《서소사(書小史)》에는 [[전서|전]][[예서|예]]팔분[* [[예서]] 이분(二分)과 [[전서]] 팔분을 섞어서 만든 서체, 채옹이 만들었다고 한다.](篆隸八分)을 잘했다고 한다. * 제갈량은 그림에도 능했다고 한다. ~~이쯤되면 능하지 않은 게 뭔가 싶다~~ 당나라 시기 장언원의 역대명화기 권1에는 역대의 그림에 능했던 화인 373명에 아들 제갈첨과 함께 들었으며 권2에는 삼국시대 유명한 화가 중 하나로 제갈량을 꼽고 있는데 지금 삼고로 나누어 귀천을 정하고, 한위 삼국을 상고하면, [[조기(후한)|조기]], 유포(劉褎), [[채옹]], [[장형(후한)#s-1|장형]](이상 4인은 후한), [[조모(삼국지)|조모]], [[양수(삼국지)|양수]], [[환범]], [[서막]](이상 4인 위나라) [[조불흥]](오나라의 화가), 제갈량(촉한)의 흐름이 있다고 하였다. 권4에서는 제갈량, [[제갈첨]] 부자가 촉한에서 그림을 잘 그렸다고 썼다. [[화양국지]]에는 제갈량이 남중을 평정할때 이도(夷圖)를 그려보내자 이인들이 그걸 잘 간직했다는 기록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