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평가 (문단 편집) === [[수나라|수]]·[[당나라|당]] ~ [[북송]] === >당태종: [[위징]]과 제갈량 중 누가 더 훌륭하다 보오? >잠문본: 제갈량의 재주는 재상과 장수를 겸하니 위징이 견줄 수 있는바가 아닙니다. >당태종: 위징이 인의를 이행해 짐을 보필하여 요순에 이르도록 하고자 했으니 비록 제갈량이라고 할 지라도 대등하지 못할 것이오. >---- >[[태종(당)|당태종]] 이세민과 잠문본의 대화, [[신당서]] 中 >옛날 [[주문왕]]은 형벌을 만들고 사면하지 않았으며 촉나라 선주([[유비]])는 일찍이 제갈량에게 말하기를 '나는 진원방과 정강성 간의 주선으로 다스림과 혼란에 관한 도를 갖추었소, 그러나 일찍이 사면에 대한 말은 없었소.'라고 말하였소. 그러므로 제갈량은 촉나라를 10년간 다스리면서 사면하는 일이 없었으나 촉나라는 잘 다스려졌소. 양무제는 해마다 여러 차례 대사면을 단행하였지만, 결국 나라는 멸망했소. 작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큰 덕을 상하게 하오. > >또 한나라와 위나라 이래 제갈량은 촉나라의 승상이 되어 또한 매우 공평하고 정직하였소. 제갈량이 일찍이 표를 올려 요립과 이엄을 남방으로 내쫒았으나, 제갈량의 부음을 들어 요립은 슬피 울며 '나는 좌임(오랑캐)이 될 것이다.'라고 했고 이엄은 병이 나서 죽었소. 그러므로 진수가 칭찬하기를 '제갈량의 정치는 성심을 열고 공평한 도리를 폈다. 충성을 다하여 시대에 유익한 자라면 비록 원수라고 할 지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범법자나 태만한 자는 비록 친분이 있더라도 반드시 벌하였다' 하였소. 경들은 어찌 이를 흠모하여 따르지 않으려 하는 것이오? 짐은 역대의 훌륭한 제왕을 흠모하고 있으니, 경들 또한 전대의 훌륭한 재상을 본 받아야 할 것이오. 만일 이와 같이 한다면 곧, 명성과 높은 지위를 오래 지킬수 있을 것이오. > >옛날 촉나라 후주는 유약하고 어리석었으며, 제나라 문선제는 미친 행동을 하고 패덕스러웠으나 나라가 다스려 질 수 있었던 것은 각기 제갈량과 양준언[* 북제의 재상 양음(楊愔, 511~560)을 뜻한다, 준언(遵彥)은 그의 자.]을 임용하고 미워하거나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 >당태종 이세민, [[정관정요]] 中 > "옛날 제갈량은 작은 나라의 승상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말하기를 '내 마음은 저울과 같다. 특정한 사람을 위해 제멋대로 경중을 조작할 수 없다'고 했다. 하물며 내가 지금 큰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야 더 할 말이 있겠는가!" >---- >당태종 이세민, 중서령 [[방현령]]이 인사의 공평을 묻는 질문에 대해 >승상의 사당이 어딘지 찾으니 >금관성 밖의 잣나무 숲이라네. >계단에 드리운 풀은 봄기운이 완연하고 >나뭇잎 사이로는 꾀꼬리 울음 울리네. >[[삼고초려|세 번 찾아준 은혜]]에 [[천하삼분지계|천하삼분의 계책]]을 내고 >[[유비|두]] [[유선(삼국지)#s-1|대]]를 정성껏 섬긴 늙은 신하의 마음이여. >[[출사표|출사]]하여 [[제갈량의 북벌|이기기 전에]] [[추풍오장원|몸이 먼저 가니]] >후세의 영웅들은 옷깃을 적시네. >---- >[[두보]]의 촉상(蜀相) >이윤과 여상(태공망)에 백중하고 천하가 그 지휘에 따른다면 소하나 조참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 >[[당나라]] 시인 [[두보]] >제갈공명 큰 이름 우주에 드리우고 >종신이 남긴 모습 엄숙하고 청고하나니. >[[천하삼분지계|삼분할거]]의 계책을 펼쳐 놓고 >만고에 하늘 높이 뜬 제일의 명예더라. >맞수 찾으려면 [[이윤]]과 [[여상]]을 보고 >자신있는 지휘는 [[소하]]와 [[조참]]도 달아나리라. >명이 다한 한나라 운세 끝내 회복 어려워 >뜻을 세우고 몸 바쳐 군무에 힘쓰더라. >---- >두보, 고적에서 회포를 읊다 제5수(詠懷古跡 其五) >제갈량은 촉에 웅거했으되, 그의 큰 뜻은 장안까지 덮었구나. >물고기와 물이 세 번 만나 합치니 사해(四海)에 풍운이 이는구나! >---- >[[당나라]] 시인 [[이백|이백(李白)]] >위엄으로 국가를 고요하게 하고, 지모로 이웃을 움직이고, 북을 들고 군을 내면, 삼군의 용기가 넘치고, 군을 국경에 두면, 천 리에 티끌이 없으며, 내외의 재주를 겸한 이를 말하자면, 오직 공명(孔明)과 경략(景略, 왕맹) 뿐이었다. 그러므로 최호는 "왕맹은 부견의 [[관이오|관중]]이고, [[유유(송무제)|유유]]는 사마덕종의 조만(曹瞞, 조조)이다.”라고 일렀고, [[손성]]은 "공명은 소국을 훌륭하게 보필했으니, [[자산(춘추시대)|자산]]의 부류다."라고 일렀다. 이 말이 적당하도다. >---- >당나라 주경칙(朱敬則)의 수고조론(隋高祖論) 중 >무후(공명)가 죽은지 거의 500년이 된다고 하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양한(梁漢, 촉)의 백성들은 그 공적을 노래하며, 사당에 모시는 자가 있다. 그 백성들에게 사랑받음이 이 같이 오래였다. >---- >손초, 각무후비음(刻武侯碑陰) 中 >승상(제갈량)은 [[정치]]를 보좌할 것을 유증받아 나라는 부유하고 형벌은 공정하니, 비록 [[이윤(상)|이윤]]의 격이 [[황천]]에 있고, [[문공(주)|주공]]의 빛이 사표에 있어도 이보다 더 낫지 않을 것이다. >---- >『[[태평광기]]』 [[제갈각]]편, [[손권]]이 숙부 제갈량과 비교하며 제갈각에게 시험삼아 질문한 말. >[[위(삼국시대)|위]]와 [[촉한|촉]] 사이의 얽히고 설킨 험준한 길, 그 길을 통해 제갈량은 때때로 많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강적에 대항했다. 그 빛남이 마치 새벽녘의 샛별과 같으니, 오직 제갈량만이 촉을 밝게 비추었구나. >---- >[[북송]] 왕안석(王安石) >'''"공명(孔明)은 거의 예악(禮樂)을 일으킬 수 있었다."''' >---- >명도 선생 정호(程顥,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성리학자)[* 《근사록(近思錄)》 권14 〈관성현(觀聖賢)〉에 나온다. 당시 제갈량의 정사가 도에 가까워 성왕(聖王)의 정사처럼 예악을 일으키는 데 거의 가까웠다고 높이 평가한 것이다. 또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왕자(王者)를 보좌할 마음은 있었으나 그가 행한 도리는 미진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한실을 부흥시키려고 했던 일은 옳은 일이었다. 공명은 유자의 기상이 있었고 공명은 예악(禮樂)을 거의 일으킬 수 있었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왕통(王通)이나 [[주자(철학자)|주희]](朱熹)도 이와 비슷한 평론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