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평가 (문단 편집) === [[남송]] 이후 === >{{{+1 [ruby(王佐奇才儒者氣象, ruby=왕 좌 기 재 유 자 기 상)] [ruby(伊呂之間管樂之上, ruby=이 여 지 간 관 악 지 상)]}}} >[[왕좌지재|왕을 보좌할 만한 뛰어난 재주]]가 있고 유학자의 기상이 있으니, >[[이윤(상)|이윤]]과 [[강태공]]에 비길 만하고 [[관이오|관중]]과 [[악의(전국시대)|악의]]보다 낫도다. >----- >[[주자(철학자)|주희]]가 쓴 근사록(近思錄) 관성현편(觀聖賢篇)에 등장하는 표현 >'''"제갈공명이 죽지 않았다면 예악을 부흥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孔明無死 禮樂可興)''' >---- >남송(南宋) 진량(陳亮, 1143~1194)[* 남송 무주(婺州) 영강(永康) 사람. 자는 동보(同甫)고, 학자들은 용천선생(龍川先生)이라 불렀다. 재주와 기상이 뛰어났고, 군사에 대해 논하기를 즐겼다. 성리(性理)에 대해 공리공담하는 것을 반대하고 실사실공(實事實功)을 강조했으며, 영가학파(永嘉學派)에 상응하는 영강학파(永康學派)를 창립했다. 주희(朱熹)와 가까웠지만 학문적으로는 왕도(王道), 패도(覇道) 및 의리(義利)에 대해 대립하는 관점으로 비판했고, 실제의 효용을 중시했다. 저서에 용천문집(龍川文集)과 용천사(龍川詞) 등이 있다.]의 〈제갈공명론(諸葛孔明論)〉 >나는 매양 [[진수(역사가)|진수]]의 삿됨과 고루함을 한스럽게 여긴다. 그는 무후(武侯)의 경략(經略)의 차제와 사전에 조짐을 알아 환란을 미연에 방지한 것, 나라를 다스리고 사람을 등용한 것과 군대를 부리고 통제하던 요점은 모두 덮어두고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다른 전기(傳記)와 [[배송지#s-2|배송지]]의 주(注)에 뒤섞여 나타난 사실이 있어서 주워모았는데, 감히 말을 수식함으로써 사실을 잊게 하지는 않았다. >---- >남송의 성리학자, 장식[* 자는 경부(敬夫), 혹은 흠부(欽夫), 낙재(樂齋)이며, 호는 남헌(南軒)이고, 시호는 선(宣)이다. 나라를 지키고 군사를 중시하는 치국의 원칙을 비롯하여 경세치용 등을 강조했고, 많은 제자를 양성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장식은 학교가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랐으며 학문의 현실적인 의의를 중시했다.] >이로 인해서 당시의 평론이 [[장준(송나라)|장준]]의 충의는 대략 한(漢)나라 제갈량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제갈량은 자기가 생존해 있는 동안 위연(魏延), 양의(楊儀)로 하여금 이의를 품지 못하게 하였으나, 장준은 오개(呉玠)로 인해 곡단(曲端)을 주살하였으며, 제갈량은 [[법정(삼국지)|법효직(法孝直)]]을 포용하였으나, 장준은 이강(李綱), 조정(趙鼎)을 포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방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제갈량에게 미치지 못한 점이다. >---- >《[[송사]](宋史)》 361권 〈장준전(張浚傳)〉 >뭇 영웅 벌떼처럼 일어나 세상 일 어지러운데 >온갖 경륜 품고서 초가집에 누웠었네. >나라 위한 의리는 삼고초려로 높아졌고, >출사표의 위대한 계책은 칠종칠금으로 남아 있다오. >목우와 유마 누가 어찌 알았겠으랴. >백우선과 윤건은 제갈 승상만 썼다오. >일월처럼 밝은 무후의 충성심은 천고에 빛나는데, >고개 들어보니 위나라, 진나라의 옛터만 남았구나. >---- >[[이제현]]의 제갈공명의 사당을 돌아보며 >"그분의 훌륭함 논해 보자면 [[이윤]]과 [[여상]]에 버금가네." >---- >명나라의 재상 [[방효유]]가 지은 제갈무후찬(諸葛武侯贊)에서 >진 효공(秦孝公)이 병이 들어 상군(商君, [[상앙]])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는데 상군이 받지 않았다. 효공의 마음가짐이야말로 공의(公義)에 입각한 것이었는데 다만 한스러운 것은 인물이 상앙밖에는 없었던 점이었다. 한(漢) 나라 소열황제(昭烈皇帝, 유비)가 제갈공명(諸葛孔明)에게 전해주려 한 것도 대체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그러고 보면 두 임금이 자립할 수 있었던 것은 요행이 아니었던 것이다. >---- >조선 신흠, 상촌집. >촉한의 [[유비|선주(先主)]]는 한나라의 후손으로, 공명 같은 왕좌지재를 만나 군사를 출동하여 역적을 토벌하되 삼대[* 三代: 하(夏)·은(殷)·주(周)]처럼 군사를 동원함에 있어 도(道)가 있어 거의 한나라 왕실을 회복할 듯 하였다. 비록 하늘이 돌보지 않아 선주가 죽고 무후도 죽어 비록 공업은 끝을 맺지 못하였으나, 그 성취한 바는 참으로 컸었다. >---- >[[정도전]] >제갈공명은 남양 땅에서 용처럼 누웠다가, [[삼고초려|선주의 삼고]]를 기다린 후에 일어났으니, 이는 곧 이윤(伊尹)이 밭이랑에서 갑자기 깨달은 것과 같다. 두 차례의 출사표는 의론이 정대하여 이훈(伊訓)·열명(說命)과 함께 참고하여 볼 것이다. 그러므로 나아가고 처하는 큰 절개와 충성·대의가 삼대(三代) 이후로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그 성심을 열어 공도(公道)를 편 것은 실로 재상의 법이 될 만하였다. 비록 운수가 옮겨가 몸이 죽어서 공업을 이룩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렇다고 어찌 이것 때문에 저것을 버리겠는가. >---- >[[권근]] >불 꺼질 듯 한나라 지킬 수 없었는데 >위기에 직면하여 명 받들어 자기 한 몸 잊었네 >사람을 논함에 꼭 성패를 따질 것이 아니노라 >천고에 아직도 팔진도가 전해지고 있으니 >---- >[[신숙주]] >君臣知遇動昭融 군신의 지우에 소융이 움직였으나 >其柰劉家運已窮 유가의 운수가 다했음을 어이하리요 >兩表忠誠照千古 [[출사표|두 표문]]의 충성이 천고에 비추나니 >莫將成敗少英雄 성패를 가지고 영웅을 폄하하지 말라 >---- >[[이산해]] >[[제환공|제(齊)나라 환공(桓公)]]은 음악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이 귀와 눈에서 떠나지 않았고, 한(漢)나라 소열(昭烈)은 군중(軍中)에 분주하여 넓적다리 살이 말안장 위에서 닳았으니, 만약 어질고 재주 있는 신하가 보좌하지 않았더라면, 환공은 어진 임금이 될 수 없었을 것이요, 소열이 조그마한 땅도 소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환공은 [[관이오|관중]]을 등용하고 소열은 제갈량을 등용하였기 때문에 제후를 규합(糾合)하여 천하를 한 번 바로잡는 공(功)을 이루기도 하였고, 한중과 서천을 점유하여 한나라의 국운을 연장시키기도 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관중이 성현(聖賢)의 도를 알지 못하였고, 공명(孔明)은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 같은 법가(法家)의 폐습을 벗어나지 못하여 공렬(功烈)이 여기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어진 이에게 맡겨 패도를 행한 자이다. >---- >[[율곡 이이]] 동호문답(東湖問答) 중 >이윤이 유신(有莘)의 들에 있을 때에 몸소 밭 갈고 도를 즐거워하여 당세에 뜻이 없는 것 같았고, 성탕이 재차 초빙하러 올 때까지도 뜻이 확고했었는데, 매우 간절하게 청하고 그 정성이 더욱 드러난 뒤에야 마음을 확 돌려 부르는 데 응하였습니다. 그래서 뜻을 같이하고 덕이 합쳐져서 하늘까지 감동시켰습니다. 수대에 걸쳐 재상을 역임하고 임금을 추방하기까지 하였으나 혐의를 받지 않았고, 진실한 덕을 끝까지 다하고 벼슬을 그만두게 되어서도 오히려 간절하게 훈계하여,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습니다. > >제갈량은 융중(隆中) 땅에 있을 때는 무릎을 안고[抱膝] 길게 휘파람을 불면서 우주에 눈을 높이 두고 생을 마칠 생각이었으므로, 소열제가 두 번째 찾아가도 오히려 은둔(隱遁)할 생각이 견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여 세 번이나 찾아가기를 게을리하지 않은 뒤에야 마음을 돌리고 몸을 바쳤습니다. 계책이 서로 부합하자 재능을 다하고 정성을 극진히 함으로써 나라가 회복하기를 기약하였습니다. 어린 임금을 도우면서부터는 정책이 자기에게서 나왔는데 누구도 이간하는 말이 없었고, 강대한 위나라도 겁을 내었으며, 거의 '''예악(禮樂)의 교화가 이루어졌습니다.''' > >이 두 사람은 비록 도에는 정조(精粗)의 차이가 있고 덕에는 대소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임금을 믿어 충성을 다한 것은 한가지이니 후세사람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어찌 두 사람의 현명한 것만으로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실은 임금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건대, 탕왕이 이윤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마침내 으뜸가는 성인을 찾아 그와 함께 온 힘을 다했다.” 하였으니, 지극히 감복한 것입니다. 소열제가 제갈량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하였으니, 그가 매우 즐거워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신이 이렇게 서로 마음이 맞으니 두 사람이 어찌 독실하게 서로 돕지 않았겠습니까. >---- >율곡 [[이이(조선)|이이]], [[성학집요]] 중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소하(蕭何) 와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위징(魏徵) 과 송(宋)나라 태조(太祖)의 조보(趙普)같은 이가 어찌 이윤(伊尹) ·부열(傅說) ·여상(呂尙) ·제갈량(諸葛亮) 같은 인물들과 비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시대의 특출했던 자들을 얻은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령 이 세 임금이 그 사람을 버려두고 쓰지 않고서 반드시 이윤·부열·여상·제갈량 같은 이를 기다린 다음에야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였다면, 이윤·부열·여상·제갈량 같은 이를 마침내 얻을 수가 없어 한나라 4백 년의 기업과 정관(貞觀)의 치세(治世)와 천하의 평정을 함께 시작할 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인물은 한·당에 비하여도 훨씬 뒤떨어지는데 더구나 삼대(三代) 때와 같은 인재를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에 한 시대의 특출한 자를 취하고자 한다면 어느 시대인들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것은 전하께서 위임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선조 16년(1583년) 4월 1일 임자 6번째기사,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과 폐정의 혁신을 진달한 병조 판서 이이의 상소문 중 >제갈무후와 선공(宣公) 육지(陸贄)[* 당나라의 명신, 754년 ~ 805년]는 자신이 태평성대를 잘 이룰 만한 위치에 있었으나 필경에는 뜻을 품은 채 펴지도 못하고 죽었으니, 그것을 천(天)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당시에 만약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촉(蜀) 나라와 당(唐) 나라가 존재했을지 의문이니, 오직 이러하기 때문에 끝내 인사를 버리고 천수만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 >[[류성룡]] >恢復思諸葛 중원을 회복하던 [[제갈량]]이 생각나고 >長驅郭子儀 위기를 막아내던 [[곽자의]]가 그립구나 >---- >[[이순신]] >[[진린]]: 내 지난번 천문을 보니 대장별이 떨어지던데, 공이 이를 모르지 않을것인즉, 어찌 무후의 기도법을 쓰지 않는 것이오? >[[이순신]]: 내 충성이 무후만 못하고, 내 덕망이 무후만 못하고, 내 재주가 무후만 못하여 세 가지 다 무후만 못하매 무후의 기도법을 쓴다고 해도 하늘이 능히 들어주시겠소? >---- >이충무공전서 中, [[진린]]과 대화하며 >그러나 와룡을 위해서는 언젠가 한 번 변무(辨誣)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문로(門路)와 연원(淵源)은 비록 우리 유학의 정통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백세를 두고 사표가 될 만한 인물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세상에서 그를 논하는 이들이 허다히 근본은 버리고 지말(枝末)만 따지고 정상적인 것은 소홀히 봐 버리고 괴이한 것만 믿는 통에, 그의 정대광명한 사업이 결국 풍운이나 일으키고 팔진도나 쳤던 일에 가리워져 버리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통한스러운 일입니까. 그의 계자서(戒子書) 한 편과 출사표(出師表) 두 편만 보더라도 그의 심학(心學)의 올바름과 조수(操守)의 신밀(愼密)함, 그리고 충직한 절의와 식견의 고상함이 과연 어떠합니까. 노재(魯齋)는 공명의 초려 장소(草廬長嘯)를 칭찬했는데, 담박(澹泊)과 영정(寧靜)의 교훈[* 《[[소학]] 가언小學 嘉言》에 이르길 제갈량이 제갈첨에게 남긴 말로 "담박이 아니면 뜻을 밝힐 수 없고, 영정(寧靜)이 아니면 멀리 이를 수 없다."라고 일렀다.]은 빠뜨려 버리고 도리어 이것만을 취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 >[[안정복]] >제갈공명의 학문은 그 궁극에 이른 경지를 고찰할 수 없지만 행동으로 드러난 것을 가지고 논한다면 계로의 용맹과 염구의 재예와 자공의 변설, 중궁의 천자가 될 만한 덕을 참으로 이미 겸했다. 지금 [[공자]]의 사당(문묘)에 배향 되는 사람 중 산동의 얼치기 학자나 문사나 일삼는 소인은 모두 들어갔는데도 제갈공명의 경우에는 거론하는 이가 있는 것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 >서포 [[김만중]] >한 나라의 정치를 섭행하고 범상한 임금을 섬기며 권병(權柄)을 오로지하였으나 예를 잃지 않았고, 임금의 일을 행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다. 법 집행이 근엄하여 나라 사람들이 마음으로 기뻐하여 복종하였고 백성들의 힘을 쓰되 그들의 힘을 다하게 하였으나 아래에서 원망하지 않았다. 군사를 출동하여 적국에 갔을 때도 규율이 엄하여 행인이나 죄없는 사람들을 해치지 않기를 본국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용병(用兵)할 때 중지하면 산처럼 중엄했고 진퇴할 때는 비바람과 같았으므로, 천하가 흔들려도 인심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갈량이 죽은 지가 지금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나라 사람들은 주(周) 나라 사람들이 소공(召公)을 그리듯 노래하며 사모하고 있다. 법령(法令)이 엄명하고 상벌(賞罰)이 미더웠으므로 사졸들이 명령에 복종하여 위험(危險)한 데에 달려가도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수 만의 군대를 거느리고도 수십 만의 군대가 이룩한 공(功)을 세웠다. 가는 곳마다 영루(營壘)를 설치할 때는 [[우물]], [[부엌]], 울타리, 장색(障塞)을 모두 법대로 만들었으므로 한 달 간 있다가 떠날 때도 처음과 같았다. 게다가 촉(蜀) 사람들은 용맹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부릴 수 있었다. 실(實)을 힘쓰고 명(名)을 힘쓰지 않았고, 뜻이 크고 바라는 것이 위대하여 관부(官府), 차사(次舍), 교량(橋梁), 도로(道路)를 잘 수리했으며, 작은 나라는 어진 인재가 적기 때문에 존엄하게 하고자 했다. 농지(農地)를 개간하고 창고를 가득채웠으며, 기계를 편리하게 수리하고 저축을 넉넉하게 했다. 따라서 조회(朝會)는 검소하게 하고 도로에는 술취한 사람이 없었다. 이와 같이 근본이 확립되었으므로 끝이 잘 다스려졌으며 여력이 있은 뒤에 작은 일에 미쳤으니 이것이 바로 그의 공을 권장하게 되는 이유이다. 제갈량은 근본을 준행한 사람이었으므로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술책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감히 자신의 단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인데, 어찌 한몸에 구비하기를 요구할 수가 있겠는가? > >난국(亂國)을 다스리는 데는 준엄한 법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원자(袁子)의 의논이 공명의 뜻과 멀지 않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바가 조리 정연하여 규도(規度)가 어제 일처럼 완연하다. 그러나 ‘임기응변은 공명의 장기가 아니었다.’ 하는 것은 대체로 [[진수(역사가)|진수]]의 여론(餘論)을 주워모은 것으로 공명을 모르는 자의 말이다."[* 원준의 글을 보고 이덕무가 이를 인용하여 평가한 글이다.] >---- >조선 [[이덕무]], 청장관장서 >제갈무후(諸葛武侯)가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만으로 교제를 하면 먼 훗날까지 가기가 어렵다. 선비가 서로를 아는 것은, 온화한 날씨라고 해서 더 꽃을 피우지도 않고 추운 날씨라고 해서 잎이 떨어지지도 않아 사시장철 시들지 않고 험난함을 겪을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것과 같다." 하였다. >삼국(三國) 중에서, 위(魏)나라는 찬시(篡弑)한 일이 있었고 오(吳)나라는 폐립(廢立)한 일이 있었던 것은, 모두 드센 신하에게 제재를 받았기 때문이다. 촉한(蜀漢)은 망하기 전에 용렬한 임금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으나 나라에 내우(內憂)가 없었으니, 소열제(昭烈帝)와 무후(武侯)의 규모가 원대했던 것이다. >---- >조선 이유원, 임하필기 中 >[[손권]]이 제갈 무후를 칭찬하기를, '진실함은 음양을 감동시키고 정성은 천지를 감동시켰다.' 하였고, [[사마의]]는 그의 군영과 보루를 살펴보고 감탄하기를, '천하의 기재(奇才)이다.' 하였으며, [[종회]]는 촉 땅에 들어가 그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갔다. 무후가 적국에게 존경받고 신뢰받은 것이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자신의 나라에서이겠는가. 무후가 죽자 요립(廖立)이 눈물을 흘리고 이평(李平)이 슬퍼하다 죽은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남만의 풍속에 북쪽 문을 모두 낮게 만들어 나갈 때에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하니, 이것은 무후가 가르친 것이다. 항상 북쪽에 머리 숙여 복종하게 한 것인데 이것을 오랠수록 더 잘 준수하여 감히 고치지 않았으니, 그의 신성한 위엄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이다. 그의 신이(神異)한 자취가 남만과 촉 지방에 많이 남아 있는데 시간이 오래될수록 더욱 신이하니, 어복포(魚腹浦)에 돌로 쌓아놓은 팔진도(八陣圖)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훼손되지 않아 마치 귀신의 돌봐 줌이 있는 듯하다. 그 외에 사만세(史萬歲)가 그의 기공비(紀功碑)를 넘어뜨린 것[* 수(隋)나라 행군총관(行軍摠管) 사만세(史萬歲)가 남녕(南寧) 만이(蠻夷) 찬완(爨翫)의 반란을 평정하던 도중에 제갈량(諸葛亮)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을 보았는데, 그 뒷면에 “만세 뒤에 나보다 나은 자가 여기를 지나갈 것이다.〔萬歲後 勝我者過此〕”라고 새겨 있었다. 이에 사만세가 좌우로 하여금 그 비석을 쓰러뜨리고 진격하게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북사]] 권 73 사만세 열전》]과 조빈(曹彬)이 그의 비석에 절한 것[* 이것 역시 제갈량의 예지력과 신통력에 관련된 일화일 듯하나, 《송사(宋史)》 권258 조빈열전(曹彬列傳)에는 그가 촉(蜀) 지방으로 출정한 사실만 기록되어 있고 이에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숙친왕(肅親王)이 비지(祕誌)를 얻은 것 등은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옛사람 중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었는가. > >제갈공명이 죽자 촉(蜀)이 망했다. 허나 위(魏)의 멸망도 제갈공명의 죽음에서 연유하였으니, 이는 왜인가? 제갈공명이 죽지 않았다면 사마중달은 온 힘을 다해 서쪽을 막느라 관서 지방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했을 것인데, 어느 겨를에 정권을 찬탈해 나라를 도둑질했겠는가. 설령 국권을 빼앗을 만한 힘이 있었다 하더라도 제갈공명의 공격이 두려워 감히 그러지 못했을 텐데 하물며 촉을 도모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촉이 망하자 사마씨의 세력이 더욱 강해져서 위가 결국 진(晉)에 선양(禪讓)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미 촉과 위가 병합되었는데 오(吳)가 어찌 독존할 수 있었겠는가. 오에서 제갈각(諸葛恪)을 쓴 것이나 위에서 제갈탄(諸葛誕)을 쓴 것은 모두 제갈공명 때문이었다. 제갈공명이 있었던들 손준(孫峻)이 어찌 감히 제갈각을 처참하게 죽이고 사마소(司馬昭)가 어찌 감히 제갈탄을 해쳤겠는가. 그러므로 제갈공명의 죽음에 삼국(三國)의 운명이 달려 있었을 뿐 아니라 제갈씨 가문의 운명도 달려 있었으니, 이 점에 있어서는 이윤(伊尹)과 여상(呂尙, 강태공)도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 >조선 성대중, [[청성잡기]] 中 >삼국(三國)이 나뉘어 있을 때 촉(蜀)나라가 가장 약하여 믿는 바는 오직 제갈공명(諸葛孔明)뿐이었습니다. 제갈공명이 죽은 뒤에는 촉나라의 형세가 아주 위태로웠으니, 그때는 바로 임금이 부지런히 정무를 돌보아야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후주는 자주 바깥으로 행행(行幸)하고 풍악(風樂)을 더욱 크게 베풀고 놀았습니다. 신하들은 간사스럽고 임금은 어두웠으며, 조정에는 직언을 하는 사람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는 굶주린 기색이 있었습니다. 이에 주변 나라의 사신들조차도 능히 촉나라가 망할 것임을 알았는데, 그 임금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망하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않습니까. > >혹자는 말하기를 “공손술(公孫述) 이후로 촉(蜀) 땅을 근거지로 삼았던 자들은 모두 중국(中國)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이것이 어찌 비록 형세가 험고하기는 하지만 땅이 작아서가 아니겠는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촉 땅에 봉해졌을 그 당시에는 항씨(項氏)는 초(楚)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전씨(田氏)는 제(齊)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위표(魏豹)는 위(魏)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진여(陳餘)는 조(趙)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하열(夏說)은 대(代)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영포(英布)는 구강(九江)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장한(章邯)과 동예(董翳)와 사마흔(司馬欣)은 진(秦)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한(漢)나라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단지 파촉(巴蜀) 가운데 한 귀퉁이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고조는 파촉에서 일어나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구강(九江)을 귀순시키고, 제(齊)와 위(魏)와 대(代)와 조(趙)를 병합하고서 마침내 항적(項籍)을 사로잡아 천하를 다 차지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촉 지방은 땅이 작아서 천하에 횡행하기에 부족하다고 한단 말입니까. > >예로부터 승패(勝敗)는 사람에게 달려 있었지 땅에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위(魏)나라는 촉(蜀)나라에 비해 훨씬 컸는데도 제갈공명을 두려워하기를 마치 범을 두려워하듯이 하였습니다. 가령 제갈공명이 죽지 않았다면, 비록 한(漢)나라를 회복할 수는 없었을지라도 등애(鄧艾) 따위의 무리는 두려워하기에도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능히 촉나라로 쳐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 >이것을 가지고 논해 본다면, 승부는 사람에게 달려 있지 땅에 달려 있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이 때문에 장강(長江)의 험고함은 마찬가지인데도 손권(孫權)이 있을 때에는 능히 조조(曹操)를 패퇴시켰으며, 손호(孫皓)가 있을 때에는 왕준(王濬)에게 항복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파촉의 땅은 마찬가지인데도 한 고조 때에는 능히 항우(項羽)를 사로잡았는 데 반해 유선(劉禪)이 있을 때에는 등애에게 항복하였던 것입니다. > >예로부터 창업을 한 임금으로는 크게는 한나라 고조가 천하를 통일한 것을 말하고, 작게는 손권이 할거한 것을 듭니다. 그런데 그들의 후예에 이르러서는 유선이나 손호와 같이 되지 않는 경우가 드무니, 참으로 슬픕니다. 《서경》 〈상서(商書) 태갑 상(太甲上)〉에 이르기를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너의 선조를 욕되게 할 것이다.〔辟不辟 忝厥祖〕”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 >《시경》에 이르기를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서, 너를 낳아 준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라.〔夙興夜寐 無忝爾所生〕”라고 하였습니다. >---- >조선 정두경[* 1597년 ~ 1673년, 조선 중기의 문인, 학자. 그를 평하는 사람들이 악부는 한․위(漢․魏)와 같고 가행(歌行)은 이백(李白), 두보(杜甫)와 같고 근체시는 초당, 성당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효종이 즉위하자 27편의 풍시를 지어 올려 호피를 하사받기도 했다. 이조판서, 대제학을 추증하였다.], 동명집 中 >(전략) [[제갈공명]]은 제왕을 보좌할 만한 재주로 한실(漢室)의 적통(嫡統)을 보좌하여 한(漢)나라의 적을 토벌할 것을 맹세하고 한실을 회복하기를 기약했으나, 구구하게 한쪽 구석에 머물러 있다가 뜻을 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중략) 제갈량은 신야(莘野)에서 농사짓던 [[이윤]](伊尹)에게 은연중 부합하고, 한 번 조이고 한 번 푸는 것을 법도가 있게 하는 것은 위천(渭川)에서 낚시질하던 [[강태공]](姜太公)과 거의 같았습니다. 게다가 뛰어난 웅지를 분주히 펼쳐 한 세상을 좌우하면서 나라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다가 죽고 난 뒤에야 그쳤으니, 공명(孔明)의 소양(所養)이 어떻습니까.(중략) 더구나 공명이 대업(大業)의 단서를 열지 못한 것은 천명인지라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가령 하늘이 그에게 좀 더 오래 살게만 해줬더라면 한실을 흥복(興復)시키고 [[천하통일|한실의 대업을 열었으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하략) >---- >[[기대승]], '옛 사람들의 은현(隱見, 숨었다 나타났다 함)과 지업(志業, 지망하는 사업(事業))의 서로 다른 점을 들어보라'에 대한 답안을 적은 책문(策問)[* 조선시대 고급공무원 선발 시험인 [[과거]] 대과의 마지막 관문으로, 최종합격자 33명의 등수를 정하는 시험에서 쓰는 답안.] >제갈량이 이르기를,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라에 이바지하되 죽은 뒤에 그친다(鞠躬盡膵 死而後已)’고 하였으니, 신하된 자로는 오직 제갈량 한 사람 뿐이다. >---- >[[강희제]]가 63세에 남긴 생시 유조 >군사를 잘 통솔할 수 없을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통솔했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없을 때에도 오직 그만이 이를 다스렸다. 정치가 편안하지 못할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편안케 했고,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풍족하게 했다. >---- >[[청나라]] 철학자 왕부지(王夫之) >애석하게도 이때 이미 인재들이 이미 위, 오 두 나라에 다 거두어졌기 때문에 얻은 사람은 비교적 적었지만, 그러나 제갈량은 일류의 인물로서 두 나라 모두 얻을 수 없었는데 유비 혼자 그를 얻을 수 있었으니 역시 성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의 효력을 볼 수 있는 것이다. >---- >청나라의 학자 조익, 이십이사차기 권7 >{{{+1 [ruby(三代下一人, ruby=삼 대 하 일 인)]}}} >'''[[하은주(동음이의어)#s-2|하은주]] 이래 최고의 인물.''' >----- >중국의 근대 사상가 궈모뤄(郭沫若, guōmòruò)[* [[https://ko.m.wikipedia.org/wiki/궈모뤄]]]의 평[* 참고로 궈모뤄는 [[조조]]를 "민중적 혁명가"로 매우 높이 평가하고 [[유비]]와 [[제갈량]]에 대해선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인물이다.] >진수가 제갈량을 논하며, "재주가 군을 다스리는 게 장점이었고, 기묘한 계책은 단점이었으며, 백성을 다스리는 재능이 장수의 지략보다 뛰어났습니다."라고 일렀는데, 이는 슬퍼서 나온 말이 아니다. 용병하며 기책을 내는데 능숙함은, 의당 위무제(魏武帝)만 못하다. 그러나 더불어 대적한 바는, 원소 이외에는, 모두 큰 모략이 없었고, 또한 모두 깊고 단단한 뿌리가 없었으나, 위(魏)와 같은 경우는 힘써 싸우지 않으면 이길 수 없었다. 위연의 다른 길을 통해 모두 모이는 모략은, 취하지 않음이 아까워할 만하다. 그러나 포야(褒斜), 자오(子午)는, 나오기는 쉬워도 이어지기는 어려워, 함양(咸陽) 이서가 만약 평정될 수 있어도, 위가 대군을 일으켜 이를 다투고, 농우의 여러 군이 그 뒤에 기대면, 촉이 과연 이를 지킬 수 있겠는가? 이가 제갈량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자 한 이유인가? > >제갈량전의 주에서 인용한 장엄(張儼)의 묵기(默記)에서 제갈량과 사마의의 우열을 논하길 : "공명은 보졸 수만을 이끌고, 기산祁山으로 멀리 달리며, 흔쾌히 하(河), 낙(洛)에서 말에게 물을 먹일 뜻이 있었다. 중달은 10배의 땅에 근거하나, 견고한 성에 근거해, 정예를 가지고, 자신을 보전하는데 힘쓸 뿐이었다. 만약 이 사람이 죽지 않고, 그의 의지를 이루었다면, 승부의 형세는 이미 결정됐을 것이다." 이는 헛소리가 아니다. > >주에서 또한 한진춘추(漢晉春秋)를 인용해 말하길 : 가허, 위평이 자주 싸우길 청하며 이르길 : "공께서 촉을 호랑이와 같이 두려워하시니, 천하의 비웃음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선왕(宣王)이 이를 괴로워했다. 상표하여 거듭 싸우길 청했다. 위위 신비(辛毗)에게 절(節)을 가지고 이를 억제하게 했다. 강유가 제갈량에게 이르길 : “신좌치(辛佐治)가 절을 가지고 이르러서, 적은 다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제갈량이 이르길 : "그는 본래 싸울 뜻이 없었으니, 거듭 싸우길 청한 것은, 그의 무리에게 용감함을 보이려던 것일 뿐이다. 장수가 군에 있으면, 임금의 명도 받지 않는 바가 있는데, 만약 우리를 제압할 수 있다면, 어찌 천 리를 가서 싸우길 청했겠는가?" 위지 명제기(明帝紀)에서 이 해에 조서로 선왕에게 다만 보루를 단단하게 하고 수비하여 그들의 예봉을 꺾으라고 시킨 것을 특별히 적었으니, 승조(承祚)에게 진실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 >제갈량이 손권을 논하며 그의 지력이 가지런하지 못하기에, 강(江)에 한정하여 스스로 보호한 것이라고 이르나, 제갈량은 중원을 밟고 돌아다니며, 상국(上國)에 맞먹을 수 있어서, 용병하며 그치지 않고, 자주 그의 무력을 과시했으니, 그의 재주는 진실로 때를 어기지 않았다. >---- >여사면(呂思勉, 중국의 근대 사학자), 진한사(秦漢史) >제갈량은 매우 재능이 있어 서촉에서 대단히 훌륭한 정부를 성립할 수 있었고, 또한 여섯 번 기산에 거하며 북벌할 수 있었으며 오나라, 위나라와 함께 셋으로서 정족을 이루었다. >---- >[[쑨원]], 《[[삼민주의]](三民主義)》의 민권주의 중 제갈량 칭찬. >제갈량의 행동은 봉건시대 기준으로도 도덕적 기준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 >중국의 근대사학자 범문란(판원란,1891~1969)[* 중국의 역사학자. 난카이 대학, 베이징대학교 등에서 중국 문학을 강의하였고 《문심조룡강소》를 저술하였다. 1929년경부터 역사학으로 전환하여 《중국통사간편》을 썼고 1947년에는 《중국근대사》를 편찬했다. 중국공산당 간부로서 역사학의 지도적 역할을 했다.] >유일하게 제갈량이 있어, 나중에 삼국이 양한([[전한]], [[후한]])과 똑같이 후세에 빛날 수 있게 되었다. >---- >중국의 근대사학자 전목(쳰무, 1895~1990)[* 중국의 역사학자. [[장쑤성]] 출신, 장난대 문학원 원장을 지냈고, 홍콩 신야서원을 설립했다. 타이완 중국문화대학 교수로 주자학 연구에 전념하여 '국학대사'로 불렸다. 저서는《논어요략》,《중국사상사》등이다.] >유비 선생이 제갈량에게 탁고를 주고 제갈량에게 스스로 정권을 인수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정말 명분이 좋아서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순풍에 돛을 단 채 황좌에 앉기는커녕 고등학교 1, 2학년 나이의 (유비의) 열일곱 살 나이 큰아들을 추대하였고, 공경스럽고 신중함을 지키며 온 힘을 다 바치다가 죽어서도 끝이 없었다. 현실정치에서 황제의 권좌는 누구의 힘이 크면 누가 위에 앉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능히 윗자리에 앉을 수 있지만 윗자리에 앉지 않는 충신의사에게 그 때문에 존경심을 느낀다. 왜냐하면 편리하고 아주 쉽게 구석에서 여러 나쁜 짓을 하고, 재물과 여색이 넘치는 것은 바로 대장부가 하지 않는 정조가 있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하지 못하는 일이 있는 것에 우리는 정례(頂禮,이마를 땅에 대고 가장 공경(恭敬)하는 뜻으로 하는 절)를 드린다. >---- >[[대만]]의 평론가이며 반체제 인사이자 역사가인 백양(보양,1920~2008), 《백양판자치통감:18 삼국정립》에서.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제갈량의 명성을 불후의 것으로 만든 까닭은 그의 우수성보다는 그의 진정성에 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촉한의 황제가 될 수 있었고, 위나라에 항복해 좋은 대우를 받을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독한 투쟁의 길을 갔다. 후한 말기에서 진나라 통일에 이르는 시대는 도덕이 조소받고 힘이 곧 정의가 되던 시대였다. 동탁, 조조, 사마의, 그리고 유비는 모두 자신을 믿어준 군주를 배신하고 힘으로 권좌를 차지했다. 한나라 헌제나 유선, 손호는 편안한 여생을 보내기 위해 조상이 남겨준 나라를 저버렸다. 이런 시대에 오직 제갈량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바보’로 살다가 간 것이다. 오직 눈앞의 이익을 탐하는 혼란스러운 세상, 그 속에서의 한 조각 진실됨, 또는 진실되어 보임. 그것이야말로 비슷하게 ‘천재적인 전략가’의 이미지를 가진 태공망이나 장량이 멋지게 성공하고서도, 오히려 실패한 제갈량의 명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 >네이버캐스트 인물세계사, 제갈량 편 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