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첨 (문단 편집) === [[강유]] 탄핵에 대한 해석 === >(경요) 5년(=262년), (강)유가 군대를 이끌고 한(漢), 후화(侯和)로 출병하였다가(※) 등애(鄧艾)에게 격파되니 답중(沓中)으로 돌아가 주둔하였다. > >(강)유는 본래 기려(羈旅,객지생활하는 나그네) 신세로 나라에 의탁하였는데 여러 해 동안 공전(攻戰,공격하여 싸움)하였으나 공적(功績)을 세우지 못하였다. 그런데 환관(宦官) 황호(黃皓) 등이 내부에서 권력을 농단하고 우대장군(右大將軍) 염우(閻宇)가 (황)호와 더불어 협비(協比,결탁)하니 (황)호는 __'''은밀히 (강)유를 폐하고 (염)우를 심고자 하였다.'''__ (강)유 또한 이를 의심하니 이 때문에 스스로 위구(危懼,두려워함)하여 다시 성도(成都)로 돌아가지 않았다. -『촉서』 「강유전」 >등애(鄧艾)가 촉을 평정한후 세운 경관(京觀)이 덕양현(德陽縣) 북쪽 33리 되는 곳에 있다. 등애는 경원 4년 촉을 정벌하여 제갈첨을 면죽에서 크게 깨트리고 대를 쌓아 경관(京觀)을 만들었다. 당초 제갈첨은 부현(涪縣)에 있었는데 등애는 이미 강유로 들어왔다. __'''제갈첨이 말하기를 “나는 안으로는 황호를 제거하지 못하였고, 밖으로는 강유를 제어하지 못하였으며(外不制姜維)'''__, 나아가서는 강유를 지키지 못하였다(进不守江油). 내게는 (이) 세 가지 죄가 있으니 무슨 면목으로 되돌아가겠느냐?" 마침내 면죽에서 사람의 다리를 (땅에) 파묻고서 싸우다가 (제갈첨) 부자는 죽었다. - 『삼국지집해 촉서』 「제갈첨전」 조일청 주[* 삼국지집해에 기재된 조일청 주석과 중국어 위키백과 기준으로 작성한다.] 「원화군현지(元和郡县志)」[* [[당헌종]]의 연호 원화(元和, 806~820)에 작성된 당시 기준 당나라의 군현지리지이다. 원래는 40권, 목록 2권으로 총 42권이었으며 그림이 있어 「원화군현도지(元和郡縣圖志))」라 불렸고, 이길보(李吉甫)가 원화 8년(813년)에 완성했다. 중국 전역을 다루는 현존하는 가장 빠르고 비교적 완전한 지리총지이다. 남송 이후 그림은 이미 산실되어, 「원화군현지元和郡县志」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현재는 제19, 20, 23, 24, 26, 36권이 산실되었고, 제18권과 제25권은 일부분이 부족하다.] >경요(景耀) 4년(262년), 행 도호(行 都護), 위장군(衛將軍)이 되고, 더불어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에 동궐(董厥)과 함께 평상서사(平尙書事)가 되었다. 이 때 환관(宦官) 황호(黄皓)가 안에서 정사를 어지럽히고[亂政] 강유(姜維)는 밖에서 무력을 남용하였다[黷武]. __'''제갈첨은 이를 깊이 근심하여 동궐(董厥), 번건(樊建)과 더불어 염우(閻宇)로써 강유를 대체할 것을 모의하고 제(帝=유선)에게 아뢰었으나[啓] (유선은) 따르지 않았다.'''__ -『학경 속후한서』 「제갈첨전」 >처음에 강유는 떠돌다가 한나라에 의탁하였는데, 몸소 중한 임무를 맡아서 몇 년 동안 군사를 일으켰으나 아무런 공적을 세우지 못하였다. [[황호]]가 궁중에서 권력을 잡고 우대장군 __'''염우와 친하게 잘 지내면서 속으로 강유를 폐하고 염우를 세우고자 하였다.'''__ -『자치통감』 78권 >제갈첨, 동궐 등은 강유가 전쟁을 좋아하나 공이 없고 국내가 피폐해졌다 하여 후주에게 표를 올려 그를 소환해 __'''익주자사로 삼고 그 병권을 빼앗으려 했다.'''__ 촉 장로(蜀長老)는 제갈첨이 표를 올려 염우(閻宇)로 하여금 강유를 대신하도록 했다는 고사가 있다 한다. > >진 영화(永和) 3년(347년), 촉의 사관인[* [[촉한]]에 사관이 없었다는 진수의 기록과 대치되는 부분이기에 간혹 논쟁의 대상이 되는데 애시당초 후주전을 보면 알겠지만 정작 진수의 저 기록 몇 줄 위에 있는 경요 원년에는 사관이 기록한 내용이 있으며, 유지기는 이런 내용을 사실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배송지도 이건 진수의 사사로운 감정이 들어간 평이라고 평가를 내렸다. 물론 여기서 언급하는 "촉"은 [[성한]]이다. 촉한이 멸망한지 80년이 넘게 지났는데 촉한의 사관이 살아남았을 리가 없다.] [[상거]](常璩)[* [[화양국지]]의 저자 상거 맞다.]는 촉 장로가 말한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진수가 일찍이 제갈첨의 관원이 되었다가 제갈첨에게 모욕당했는데, 이 일 때문에 죄악의 원인을 황호에게 돌리며 ‘제갈첨이 능히 바로잡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 『촉서』 「제갈량전」 주석 [[손성]]의 『이동기』 오직 『촉서』만의 기록을 참고한다면 유선에게 총애받는 환관 [[황호]]가 강유를 염우로 대체하려던 촉한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단순한 기록일지도 모르지만, 『학경 속후한서』와 『촉서』 「제갈량전」 주석 손성의 『이동기』[* 제갈량전에 붙은 [[번건]]과 [[동궐]]의 기록에 붙은 주석이다.]의 기록 덕분에 상당히 다채로운 해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학경 속후한서』와 『이동기』는 모두 공통적으로 동궐과 제갈첨이 강유의 북벌을 반대하여 강유의 병권을 염우에게 맡기려 했다고 한다. 『촉서』에 의하면 황호 또한 유선에게 동일한 제안을 했다고 한다. 두 시도 모두 좌초되었는데 덕분에 제갈첨과 동궐이 황호와 결탁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동기』를 참고하면 제갈첨은 강유의 병권을 빼앗는 대신에 강유를 '''익주자사'''로 삼으려고 했다는 점이다. [[강유]]는 그간 대장군+녹상서사+양주자사였는데 강유 이전 양주자사는 [[위연]]임을 고려하면 양주자사는 북벌의 실무책임자를 의미한다. 그에 비해 이전의 촉한의 최고 실권자들의 관직은 각각 대장군/대사마+상서령+'''익주자사'''([[장완]]), 대장군+녹상서사+'''익주자사'''([[비의]])로 대장군+녹상서사+양주자사였던 강유가 익주자사로 봉해진다는 것은 결코 의미 없다고 볼 수 없다. 예외적으로 [[제갈량]]은 승상+녹상서사+익주'''목'''인데, 이는 제갈량이 개국공신이자 [[유비]]의 탁고대신이었기 때문이다.[* 자사보다 목이 가지는 권한이 더 크다.] [[촉한]]은 황제국으로 스스로를 칭하였으나 전토가 익주에 불과한 만큼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운 다른 자사직과 달리 익주자사는 권위를 높여주는 실권직이라 해도 무방하다. 왜 하필이면 황호와 결탁한 것이 확실한 염우에게 병권을 맡기려고 했는가가 문제다. 아직 명망이 적은 우대장군[* 흥미롭게도 『[[화양국지]]』 「유후주지」에서는 염우를 우대위장군(右大衛將軍)으로 기록한다. 단순히 오기로 생각되나 『화양국지』가 서술될 무렵에 사방장군이 사방위장군이었기에 우대위장군이라 표기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염우가 경력이 다른 원로급인 진남대장군 종예, 좌우거기장군 장익과 요화, 우표기장군 [[호제]]보다 다루기 쉬우리라 여겼기에 그러했다는 해석도 있다.[* 반대로 제갈첨이 도호직을 행(行-직책앞의 '행'은 정확히 그 직책을 처음 맡은 자로서 해당 직책의 역할을 할 경우에 붙인다)했다는 시점에서 제갈첨의 지위를 다른 장수들의 앞에 놓는 의견도 있는데, 이것 또한 애매하다. 행도호가 아니라 도호는 [[이엄#s-3|이엄]]이나 장완 등이 군권을 잡을 때 맡던 직책으로, 후한 시대에는 이민족 정벌을 맡던 직책이다. 이엄의 경우 제갈량이 있던 상황에서 전적으로 군권을 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불어 장완이 군권(군령권 - 군사 작전 및 훈련을 명할 수 있는 권한- 과 군정권 -군 인사권 및 행정권 - 모두였을 것이다)을 가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도호이기도 했지만 더불어 군부 최고 직책인 대사마 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후한 기준으로 대사마는 대장군에게 따르는 직책인 동시에 삼공보다 위에 위치한다.] 다만 황호 또한 강유를 염우로 교체하려고 했다는 『촉서』의 기록을 고려하면 강유-염우 교체책은 '''외정의 [[강유]]와 내정의 황호 둘 다 동시에 제어하기 위해 내세운 제갈첨과 동궐의 묘책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익주자사로 봉해진 [[강유]]가 내정 권한이 강해지면 262년에 황호를 죽일 것을 건의할 만큼 황호를 경계했던 강유가 내정을 어지럽히는 황호를 두고 볼 리가 없다. 최소한 익주자사 책봉을 통한 권위 강화는 성도에서 위협을 느껴 답중으로 피신가야 했던 262년의 답 없는 상황만큼은 막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유를 단독으로 익주자사로 봉하려고 했다면 유선의 총애를 독차지한 황호의 위기감 서린 반대를 맞설 수밖에 없는데, 제갈첨과 동궐은 황호와 친한 염우에게 강유의 병권을 내어준다는 제안으로 설득하려 한 것 같다. 제갈첨과 동궐의 의도가 어찌되었건 간에 『촉서』에서만큼은 황호가 단독으로 강유를 염우로 교체하려 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황호는 강유-염우 교체를 좋게 받아들인 것 같다. 더불어 제갈첨과 동궐은 강유의 북벌 또한 문제로 봤는데, 강유의 병권을 염우에게 양도함으로 북벌을 쉴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려던 것이라 볼 여지가 있다. 해석을 요약하자면 제갈첨과 동궐은 ||1. 강유를 익주자사로 봉해서 내정권한을 강화하고, 2. 강유의 군권을 박탈해서 북벌을 중단할 수 밖에 없게 만들고, 3. 대신 염우에게 군권을 양도해서 근시안적인 황호의 지지를 얻는다.|| 라는 계책을 내놓았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제갈첨은 희대의 정치적 묘수를 획책한 것이지만 유선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으며[* 유선의 반대도 다각도로 비춰볼 여지있다. 당시 국정을 농단하던 [[황호]]의 권세는 모두 유선의 지원 하에 가능한 것이어서 강유가 녹상서사+익주자사의 권한으로 황호를 제어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면 유선의 권위 또한 위협할 수 있는 셈이다. 유선의 황호에 대한 신뢰도는 전쟁준비마저 좌지우할 수준이었는데 황호마저 지지한 방안을 유선이 반대했다는 것은 유선은 장기적으로 강유-염우 교체책의 위험성을 꿰뚫어봤다고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유선은 정치적 권위를 세우는 능력 하나만은 상당히 뛰어나다는 평이 있는데 이 가설마저 맞다면 유선의 통찰력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라고 볼 수도 있다. --통찰력은 [[유비|누구]]를 닮아서 뛰어난데 어째 이상한 쪽으로 뛰어나다.--] 앞서 언급한 모든 의도와 가능성은 증명하지 못한 채로 좌초되었다. 『이동기』에서는 일부분 '''촉의 장로의 증언'''을 자료로 쓴다는 점에서 신뢰성을 의심할 수도 있지만 다행히 『이동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익주자사 부임책은 장로의 구술과 상거의 보충설명을 바탕으로 한 기록으로, 제갈첨과 동궐이 병권을 염우에게 주려고 했던 부분이 『학경 속후한서』와 교차검증이 가능하다. 특히 신뢰도를 높이는 부분은 바로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익주 출신 사관이자 [[화양국지]]의 저자 [[상거]]가 촉 장로의 설명을 보충한 부분으로, 상당히 아슬아슬한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배송지]]의 비판이 없다는 점과 함께 기록의 신빙성을 높이고 있다. [[진수(역사가)|진수]]는 촉한에서 기록이 없는 인물은 [[양희]]의 계한보신찬에 넣었다고 썼지만 정작 자기를 추천해준 동문 나헌이나 사이가 틀어진 [[이밀]], [[이양]] 등의 기록을 정사 삼국지 본전에 적지 않을만큼 자신에 관한 일에서만큼은 뒤끝이 매우 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이가 안 좋았다고 유명한 제갈첨에 대해서는 가려들을 여지가 있다.[* 나헌은 제갈첨의 아들인 [[제갈경]]을 진수 본인과 함께 사마염에게 추천한 전적이 있다. 그가 제갈첨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일을 마음에 담아두었을 법 하다. 실제로 그는 제갈경과 같이 나헌의 천거를 받았음에도 본전에 제갈경이 하동으로 옮겨갔다는 기록만 적고 그가 서용되어 이름을 떨쳤다는 얘기는 넣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진수는 갈후(제갈첨)가 하지 않은 일도 그가 했다고 하여 그 명성이 실제를 넘어섰다고 기폄했지만 그가 재주가 있고 총명하여 주위의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까지는 부정하지 못했다. 그러니 명성이 부친덕에 과장이 있었더라도 기본적인 바탕은 분명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촉의 사람들이 제갈량을 사모 한 나머지, 제갈첨이 건의하여 창도한 것이 아니더라도 백성들은 모두 갈후가 만든것이다.'라고 하는 문맥으로 나오는 것이니, 이것은 제갈첨이 무조건 기폄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제갈량이 얼마나 촉의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었는지를 나타내는 일화라고 봐야 하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하여튼 간에 제갈첨이 중앙정권에서 그가 원하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분명하나 재주와 총명함으로 인해 명성을 얻었고, 그냥 놀고 먹던 것만은 아니라는 점 하나는 확실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