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첨 (문단 편집) === 면죽에서의 최후 === 263년, 위의 [[종회]], [[등애]], [[제갈서]]는 총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촉한]]을 침공했다. 여러 악재 끝에 [[한중]]의 양안관구를 상실했으나 강유는 공함곡 30리 북진으로 제갈서를 낚은후 바로 남진하여 하루 차이로 무사히 제갈서의 포위망을 회피하는 현란한 기동전을 보이며 검각에 무사히 도착해서 결사적인 항전을 펼쳤다. 종회의 주력군은 검각에서 막혀서 발이 묶였지만 병사와 치중까지 합쳐도 2만명이 채 되지 않는 등애의 별동대는 음평으로부터 작은 길을 돌파해 한의 덕양정을 지나 부현을 공략한 이후 [[성도]]를 향해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등애는 결국 음평(陰平)에서부터 경곡도(景谷道)를 거쳐 우회해 들어왔고 제갈첨은 제군을 지휘해 부(涪)현에 이르러 머물렀다. 대장군 강유, 좌우거기장군 [[장익]], [[요화]]가 검각에서 필사적으로 종회군을 막아내고, 우대장군 [[염우]]와 우표기장군 [[호제]]가 이 당시 뭘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무해 의미가 없으니 본토 촉군 중 가장 직위가 높은 위장군 제갈첨은 [[제갈상]](제갈첨의 장남), 상서랑 [[황숭]]([[황권]]의 차남), 상서 [[장준]]([[장포]]의 아들), 우림우부독 [[이구]]([[이회(삼국지)|이회]]의 조카)등을 이끌고 등애를 막으러 나섰다. 이들 지휘관 중 군사경험이 기록된 인물이 하나도 없다는 점은 등애의 음평침공이 얼마나 시급한 비상사태였는지를 시사한다. 제갈첨은 강유관이 그렇게 쉽게 점령당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이후 부현에서의 말로도 '나아가선 강유관을 지키지 못했다'며 한탄하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그러하다. 아쉽게도 강유관은 이미 [[공대 내부의 적]](...)인 마막이 '''그냥 항복'''한 상태였고 원화군현지(元和郡县志)에 따르면 제갈첨이 부에 있을때 이미 등애는 강유에 들어간 상태였고 자치통감에서도 강유관이 넘어가고 제갈첨이 부에 도착했다고 나온다. 위서 등애전과 자치통감을 보면, 말 그대로 사지(死地)를 지나와 제대로 된 보급도 없이 지치고 다친 등애군의 선두 진영이 도착하고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 성을 넘겨버린 것이다. 진서 [[단작]]전의 단작의 말에 따르면 양흔이 거느린 병사들 만이 강유관의 형세를 핍박하였음을 이유로 30명이 봉해질 수 있었다. 이렇게 소수의 병사들만이 공이 인정되어 봉해진 것을 보면 이들을 중심으로 한 뭔가의 군사적 압박이 있었을테지만 자세한 사항은 알 수가 없다. [[마막]] 문서에서도 확인이 가능하지만 강유관은 혹시나 올지 모르는 적을 막는 제대로 된 관문이라서 양흔이 강유관을 핍박하던 말건 대비가 잘 되어 있었다면 공성전으로 가도 보급이 부족한 등애군이 역으로 자멸할 수도 있었고 적어도 큰 피해를 입고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 했을수도 있다. 결국 그런 중요 직책에 이런 소규모 군사 압박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마막 같은 인물을 배치한 촉한의 실책이 컸다. 어쨌거나 [[원준]]의 원자와 진서 문제기에 따르면 이 당시 1만명 정도 남은 등애의 병력은 강유관을 거저먹고 재정비 후 다시 한덕양을 거쳐 부현으로 침공한다. 결국 제갈첨은 성도의 병력을 인솔하여 부현으로 진격했다. 황숭은 제갈첨에게 곧바로 신속하게 요충지(덕양으로 추정)를 점거해서 등애군의 평지 진입을 저지해야한다고 건의했으나 제갈첨은 주저할 뿐 전진하지 않았다. 황숭은 이후에도 제갈첨에게 요충지를 점거해야한다고 여러 차례 권유했지만 제갈첨은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않으니 황숭은 급기야 눈물까지 흘렸다. 왜 황숭의 눈물겨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는지에 대한 여러 설들이 분분하다. ||1. '''황권이 위에 투항한 사실을 상기하고 황숭의 건의를 믿지 않았다.''' [[청나라]]의 학자 주수창이 세운 이론이지만 황권의 투항은 이미 40년 전의 일인데다가 [[유비]]가 황권의 항복은 본심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직접 보증했다. 이런식이라면 애초에 제갈량이 직접 보증한, 검각에서 종회를 막고 있는 항장 출신 강유부터 의심하고 그를 검각에서 소환했을것이다. 그리고 등애를 방어하러 나간 촉한군의 중진들은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 장비의 손자 장준, 이회의 조카 이구 등 대대로 촉한 황실에 은혜를 입은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촉한 입장에서도 나름대로 '배신하지 않을자들'을 선발해서 보낸 것이라는 것인데 싸우기 전부터 황숭을 의심했다면 애초에 싸우다가 배신당하면 치명적이니 부성으로 출전시키지 않으면 그만이고, 명색이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은 군부내에서 끗발이 강한 총사령관 위장군으로서 처음부터 믿지 않았으면 출전시키지 않을 권력 정도는 있었다. 그런고로 가능성이 많이 낮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이 가설을 채용했다. 2. '''녹록치 않은 후방 사정'''. 이미 종회의 대군이 익주의 눈앞인 검각에 진입한 상황에 등애의 별동대가 익주 내부로 밀고 들어오는 덕에 성도의 예비군마저 동원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물론 험지에서 대치상황만 지속한다면 음평에서 보급로 걱정을 해야하는 등애군을 언젠가는 격파 할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제갈첨이 신속히 등애를 격파하지 않으면 민심이 동요하는 것을 후방에서 우려할 수도 있다. 특히 적을 지연시키며 결판을 내지 못하는 장수가 간신의 모함에 몰락한 일화는 여러번 되풀이 된 사례고 유선 옆에는 이를 이행하고도 남는 황호가 있었다. 특히 [[초주]]같은 항복론자에 의한 선동을 고려하면 확실한 불안요소라 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초주는 조정에서 유일하게 항복을 유선에게 권해 유선이 항복을 선택함으로서 각지의 군대가 구원하기 오는 와중인데도 촉한을 망하게 했다.] 제갈첨 스스로도 싸우러 나가면서 안으로는 황호를 견제하지 못하고, 밖으로는 강유를 제어하지 못했으며 나아가서는 강유관을 지키지 못한 당시 자신의 상황을 한탄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이쪽이 다른 가설보다 확실히 가능성에서 훨씬 높다.[* 사실 제갈첨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부친의 계자서를 주의깊게 읽었다면 1의 가설은 처음부터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3. '''수뇌부의 동요와 민심의 동요, 양쪽 모두일 가능성이다.''' 1번과 2번은 같은 것을 수뇌부의 동요와 민심의 동요로 나누어본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적군이 촉한 중심부로 진입한 상황에서 등애를 몰아내지 못해 민심이 동요했고 여기에 수뇌부조차 민심과 같이 동요해 황숭의 계책을 신뢰하지 못하였으며 전시상황에서 그의 계책을 따라 등애와 무작정 대치국면에 서는건 믿음직 하지 못하고, 동요를 바로잡는데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가설은 근거가 좀 부족하다.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정사 삼국지 초주전에서 등애가 음평(陰平)에 들어올 때부터 백성들이 동요한것은 잘못 쓰여진 것으로 음평에서 '음(陰)'자를 빼서 등애군이 '평지(平)'에 들어오자 백성들이 동요한것이라 적어야 한다고 썼고[* (초주전 삼국지집해) 하작이 말하길, 황숭이 말했다. "신속하게 가서 험지를 점거하여, 평지 진입을 저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작이 말하길 ) 후인들이 음(陰)자를 잘못 더한 것이다. (즉 초주전의 음평(陰平)은 그냥 평(平)이라는 말.)] [[자치통감]]도 제갈첨이 격파되고 난 뒤, 촉한인들이 뜻하지 않게 위나라 군대가 도달하니(漢人不意魏兵卒至) 성을 지키는데 조절과 통제를 못하였고(不爲城守調度) 등애가 이미 평지로 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聞艾己入平土) (그 때부터) 민심이 동요(百姓擾擾)했다고 기록했으며 [[화양국지]]도 제갈첨군이 격파된 후 등애군이 평지에 들어오자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산과 들로 흩어졌다고 나온다. 즉 제갈첨군 격파 이전에 촉한의 민심은 아직 동요되지 않았다는 얘기고, 등애군을 평지에 들이지 않고 막고만 있었거나 제갈첨군이 격파되지 않았으면 애초에 민심의 동요는 없었거나 제갈첨군이 격파될 때보다 적었을거라는 뜻이다.|| 어쨌든 제갈첨이 주저하는 사이 등애군은 마침내 먼거리를 달려 전진해 제갈첨의 선봉을 격파했다. 제갈첨은 후퇴해 면죽으로 물러났다. 어떤 이유던간에 전쟁터에 나가보지도 않은 제갈첨이 강유를 격파한 적도 있고 후일 무성왕묘에도 등재되는 명장 등애를 상대로 황숭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애초에 황숭의 말을 들을것이 아니었다면 면죽에 있으면서 선봉이 격파되는 일 없이 손실이 없는 상태에서 맞았으면 더 유리하지 않았는가라는 부분에선 제갈첨의 군사적 실적 부족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최소한 손실을 덜 입었다면 인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등충과 사찬을 맞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등애는 제갈첨에게 서신을 보내 회유하려 했다. >"만약 투항하면 반드시 표를 올려 낭야왕(琅邪王)으로 삼겠소."[* [[제갈량]]을 비롯한 냥야 제갈씨의 본관이 서주 낭야군이다. 아마 이를 꼬집어서 낭야왕으로 봉한다고 회유한 듯. 호삼성 역시 '제갈씨의 본관은 낭야인이니 연고로서 이를 유혹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실 [[사마소]]조차도 겨우(?) 촉한 정벌 중에 '''진공'''에 올랐고, 촉한을 정복한 공로로 진왕에 올랐음을 고려하면 제아무리 낭야왕이 이자왕으로 진왕보다 두 단계 낮다지만 일개 정서장군이 마음대로 임명할 권한이 있을 리가 없다. 후일 황제였던 유선도 왕이 아닌 안락공에 봉해진 데다가, 낭야왕에 책봉된 인물이 [[사마주]]에 서진통일 이후 대부분 사마씨 종친들이 이자왕이었음을 고려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게 도발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 대목에서 엄연히 제갈첨전과 자치통감은 등애가 제갈첨을 편지로 유혹(誘)했다고 썼다.[* 백화문 번역인 자치통감전역에서는 좀 더 정확하게 편지로 권유(劝诱)한다고 나온다.] 또 제갈첨이 이 편지로 화를 내긴 했어도 도발당했다고 생각해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 무모한 결전에 나서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면죽에 열진(列陣, 포진)하면서 등애군을 기다렸다. 어차피 후일을 생각하면 도발이든 유혹이든 사마소 귀에 들어갔으면 좋은 반응이 나오지 못했을 얘기다. 그만큼 등애 역시 되도록이면 싸우지 않고 성도로 진격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해서 뒷일 생각하지 않고 이런 편지를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제갈첨은 해당 서신에 분노해서 사신의 목을 베는 것으로 응답하고 면죽에 포진하여 주둔했다. 의외로 한 성깔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나라가 망할까말까 하는 상황에서 되도 않는 헛소리를 하고 있으니 열받지 않겠냐마는... 등애는 아들 [[등충]]에게 우익을 맡기고, [[사찬]]에게 좌익을 맡겨서 제갈첨을 공격했다. 등애는 군을 삼등분해서 포위섬멸을 노린 것으로 보이지만 놀랍게도 군사적 경험이 없는 장수들로만 구성된 '''제갈첨의 군대는 등충과 사찬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촉한 진영은 전투 경험이 아예 없던 것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분전했다 볼 수 있다. 다만 이는 그만큼 등애군 역시 지쳐있었기 때문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어쨌거나 정사 삼국지 등애전에 따르면 제갈첨과 싸운 등충과 사찬은 전세가 불리했으므로 나란히 퇴각하여 돌아와서 적을 공격할 수 없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등애군은 자포자기에 빠질 뻔했다. 그러나 등애는 화를 내며 지금 존망의 위기가 이 싸움에 있는데 어떻게 불가능하다고 하느나며 사찬과 등충을 나무랐고 아예 이들의 목을 베어버리려 했다. 등충과 사찬은 급히 돌아가 다시 출진해 제갈첨군과 교전했는데 이때는 촉군이 대패했다. 제갈첨과 같이 싸웠던 황숭, 장준, 이구는 모두 전사하고 제갈첨은 진중으로 끌려나가 참수되었다. 위에서도 몇번 나왔지만 삼국지집해 『촉서』 「제갈첨전」에 주석으로 기재된 원화군현지(元和郡县志)의 글귀에 의하면 제갈첨은 부현에 있을때 등애가 강유관에 이미 들어가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나는 안으로는 황호를 제거하지 못하였고, 밖으로는 강유를 제압하지 못하였으며, 나아가서는 강유를 지키지 못하였다. 내게는 세 가지 죄가 있으니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겠느냐?" 그리고 면죽으로 가서 죽었다. 동일한 열전에서 주석으로 기재된 『화양국지』에 의하면 제갈첨의 장남 제갈상은 촉군의 괴멸을 바라보며 한탄하며 말했다. >부자가 나라의 무거운 은혜를 받고서 일찍 황호의 목을 베지 못하고 나라를 무너지게 하고 백성들을 죽게 하였으니 살아본들 무엇에 쓰겠는가?" 그리고 말을 때리며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돌격하다 사망했다. 제갈첨의 패배로 성도의 방어선이 한 번에 무너졌다. 이에 혼란에 빠진 촉한 조정은 남중으로 피하자, 오나라에 의탁하자 의견이 분분했는데 이때 혼자 항복을 주장한 초주의 설득에 남쪽으로 피난가려던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하면서 [[촉한]]은 멸망한다. 당시 제갈첨의 나이는 향년 37세로, 아버지인 [[제갈량]]은 그 나이대에 [[유비]]의 한중왕 즉위로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할 무렵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나이에 아들인 제갈첨은 조국을 지키려다 전사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